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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12화 (112/144)

112화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온 납골당에서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올려다보던 어린 차영은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자취를 감췄다.

또래일까. 어쩌면 자신보다는 조금 나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얼굴은 앳됐지만 키가 훌쩍 컸고, 시선을 교환했던 시간이 너무 찰나여서 정확하게 보진 못했지만 짓고 있는 표정도 자신보다는 훨씬 침착하고 어른스럽다는 게 느껴졌다.

〈뭐 해. 우리 차영이, 아빠한테 안녕히 계시라고, 또 오겠다고 인사해야지.〉

조금 전 제 앞을 스쳐 지나간 웬 소년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차영은 사진 속 아버지와 다시금 눈을 마주쳤다. 제복 차림의 남자는 분명 다정하게 웃고 있었는데 미소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앞으로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지 모르지만, 차영은 장차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빠, 또 올게요.〉

아버지가 이제 영영 차영에게 책을 읽어 줄 수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 것도 이맘때쯤이었다. 차영이 더는 엄마에게 ‘아빠가 몇 밤이나 자면 돌아오느냐’라는 서투른 질문을 하지 않게 됐던 터라, 그녀도 슬픈 침묵으로 답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그녀가 굳이 세세하게 설명해 주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이미 매년 한 번씩 사진으로 만나게 되는 그가 앞으로 차영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아버지의 존재라는 걸 마음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어머니가 손을 내밀어서 차영은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때만 해도 차영의 손이 어머니의 것보다 작았다. 두 사람은 맞닿은 체온을 유지하고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바깥의 날씨는 싸늘했다. 한겨울인 데다가 납골당이 산자락에 있어 공기가 찼다.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간이역 같은 곳이었다. 죽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잠깐 들렀다가 모두들 조용히 지나쳐 갔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해서 찾아오게 되다 보면 차영은 꾸준히 자라 어른이 될 테고, 지금 맞잡고 있는 그녀보다 키가 훌쩍 커지게 될 것이다.

〈엄마, 날씨가 너무 추워. 아빠 춥겠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다가 뭔가 마음에 걸린 차영이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제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괜찮아.〉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듯 차영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대꾸해 주었다.

아직은 어려서 계절이나 기후를 초월한 곳에 그가 있으리라는 상상까진 할 수 없었지만, 제 어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차영에게는 뭐든 맞는 말이었다. 다시 얌전히 두 다리를 내딛는데 계단 아래에 아까 저 안에서 봤던 소년이 버티고 있는 게 보였다. VIP실 쪽으로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언제 한 바퀴를 빙 돌아 이곳으로 와 있는 건지 몰랐다.

차영이 힐끔거리면서 소년의 뒷모습을 관찰하다가 한쪽 운동화 끈이 풀려 있는 걸 우연찮게 발견했다.

〈저기! 운동화 끈 풀렸는데.〉

왠지 마음이 초조해진 차영은 소년의 옆을 지나쳐 가면서 손으로 왼쪽 운동화를 가리켰다. 소년은 시선을 내려 제 신발을 직시했다. 상대가 살짝 고개를 숙인 바람에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다란 속눈썹과 하얗고 깨끗한 피부가 차영의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자신보다 키가 컸는데 고개를 확 숙이니까 비슷해졌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계속 내려가던 차영이 그녀의 손을 놓고 멈춰 섰다. 그는 문득 물었다.

〈누구 보러 왔어?〉

쪼그리고 앉아 제 운동화 끈을 동여매면서, 소년이 대꾸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아버지.〉

〈나돈데…….〉

〈차영아, 서둘러. 버스 놓치겠다.〉

조금만 기다리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머니가 채근하는 바람에 차영은 여유가 없어지고 말았다. 소년을 등지고 걸어 내려가면서 아까 전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돌아봤을 때처럼 고개를 돌렸다. 앉아서 운동화 끈을 매고 있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소 차가운 인상의 미소년과 눈이 분명하게 마주쳤다.

〈잘 가. 또 보자.〉

그가 차영에게 상냥하게 인사했다.

이미 거리가 꽤 벌어진 뒤여서 그의 음성이 명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미루어 대충 그런 말인 것 같았다. 잘 가. 또 보자. 납골당 마당 한편에 주차된 버스에 올라타던 차영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버스에 다시 올라타서 창문을 통해 그를 내다보려고 했을 때,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착시인가?

눈을 뜨자마자 당장 보이는 얼굴이 그녀일 리가 없었다. 괴롭다는 양 눈살을 찌푸린 차영이 제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이 광경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차영, 차영아…….”

덜덜 떨리는 음성은 생각보다 무척 현실감이 느껴졌다. 당황한 차영이 손을 뻗어 보려 했다. 힘이 잘 들어가질 않았다. 가까스로 들어 올리니 손등과 팔뚝 위에 주삿바늘이 여러 개가 꽂혀 있었다. 그 외의 부분에는 붕대가 감겨 있는 부분도 있었고, 또 다른 일부 위에는 시퍼런 멍들이 산적했다. 왼팔만 봐도 꽤나 처참한 꼴이었으니 다른 곳은 안 봐도 훤했다.

“엄마 맞지?”

목소리는 가뭄이 난 척박한 땅처럼 쩍쩍 갈라졌다. 그걸 듣고 화들짝 놀란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차마 누더기가 된 차영의 몸 어딘가에는 손을 대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본인의 양손만 부여잡은 채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맞아. 엄마 맞아. 엄마야……. 차영아. 괜찮아? 엄마 잘 알아보겠어?”

“엄마가 왜 여기 있어?”

그는 뒤늦게 그녀의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평상복 차림의 도윤이 울고 있었다.

일단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은 이곳이 병원인 것 같다는 것과 다친 자신의 앞에 어머니와 도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기절하기 전 중수 처리장 같은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분명한 기억 세 가지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그 후로 어떤 식으로 일이 처리됐는지, 날짜상으로 정확히 얼마나 지난 건지, 그 어떤 일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선뜻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도 되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차영이 어두침침한 사념에 빠져 있는 사이, 끔찍하고 절망적인 세계를 관찰하는 듯한 표정이던 어머니는 결국 흐느낌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있는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게 곤란했던지 급히 눈물을 훔치고 등을 돌렸다.

“엄마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녀는 차영으로부터 대답이 있기도 전에 병실을 빠져나갔다. 한 사람이 사라진 공간은 적막이 비탄한 심경을 태우고 느리게 흘렀다. 차영의 어머니를 뒤쫓아 나가야 하나, 환자인 차영을 돌봐야 하나의 기로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도윤이 결국 후자를 선택하고 우뚝 섰다.

“나 어떻게 된 거야? 도윤이 네가 설명해 줄 수 있어?”

차영은 일단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녀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다.

“나도 자세하게는 잘 몰라. 아무튼 되게 위험했대. 까딱하면 죽었을 거라고. 의사가 너한테 천운이 따랐다고 했어.”

“무슨 천운?”

“너 얼굴 뼈 여기 위에…… 전부 함몰될 뻔한 거 알아?”

뒤늦게 제 안면을 만져 보니 붕대가 친친 둘러져 있었다. 괜스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가슴뼈도 부러졌대. 그, 복장뼈인가. 갈비뼈랑 연결된 거. 거기 뼈들 때문에 짓눌려서 장기가 죄다 파열될 뻔했는데 정말 정말 운이 좋았다고 했어. 내가 봤을 땐 분명히 기다란 걸로 맞은 상처인데, 의사랑 경찰들이 다…… 너 높은 데서 떨어져서 그런 거라고…….”

잠자코 그녀의 설명을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쉰 차영이 미간을 구겼다. 숨을 쉴 때마다 아팠다. 이건 조금 전 안면을 만질 때 느꼈던 환상지통 같은 게 아니었다. 자가 호흡에 분명한 부담이 느껴졌다.

“얼굴도 기다랗게 구타당한 자국으로 엉망인데 그게 어떻게 떨어져서 난 상처야? 그런데 떨어지면서 봉 같은 거에 부딪힌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잖아. 나랑 어머니 생각엔 분명히 뭔가 이상하고 잘못됐는데, 무서워서 더 못 물어봤어.”

정확히 며칠 전인지는 알 수 없는 그날, 자신은 묶인 채로 가혹한 행위를 당했다. 상상의 산물이었으면 했으나 실제가 맞는 듯했다. 천천히 제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현대판 미라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하얀색 붕대로 이곳저곳이 뒤덮여 있었다.

제 기억을 더듬어 보던 차영은 바깥의 눈치를 보는 듯한 도윤을 힐끗 살폈다.

“네가 엄마 여기로 불렀어? 넌 어떻게 알고 왔어.”

“아냐. 어머니도 나처럼 병원에서 연락받고 오셨다는데…….”

“병원에서?”

“응, 그런데 난 아무래도 한 기장님 지시 같아. 여기 한국 항공 협력 병원 중 하나고, 또 지금 바깥에 대영 그룹에서 보내 준 경호원들 쫙 깔려 있거든. 실은, 나 너 사고 나던 날 한 기장님한테 연락을 받았어. 너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어디로 증발된 거였잖아.”

허둥지둥하면서도 열심히 설명하던 그녀가 상체를 한껏 수그렸다. 그러고는 둘만의 비밀을 속삭이듯 음산하게 내뱉었다. 예고도 없이 상대가 몸을 기울이자 차영이 바짝 긴장해서 움츠러들었다.

놀란 그녀가 차영을 진정시키려는 듯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주삿바늘로 난잡한 팔을 겨우겨우 뻗어 냉정하게 쳐 내는 것이었다.

내쳐진 손을 보고 도윤도 당황했지만 차영이 더욱 황망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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