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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11화 (111/144)

111화

“회장님!”

“한태주! 우욱…….”

당황한 안 실장이 문 회장을 향해 소리쳤다. 뒤늦게 권총을 들고 있는 태주를 발견한 차영도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태주의 이름을 외쳤다. 겨우 목구멍을 쥐어짜 내 비명을 지르다가 울컥 각혈하며 쓰러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태주는 그런 차영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도 없이 서늘하기만 했다.

그는 흐트러짐 없이 오직 단 한 가지의 목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문 회장이 이 기세에 밀리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차영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목울대를 틀어쥐었다. 뒤이어 주사를 다시 기다란 목에 비스듬히 댔다.

마침내 여린 살결 위에 바늘을 꽂아 넣으려던 때였다.

탕!

태주가 예고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윽……! 이런! 으윽……!”

손에 극심한 통증을 느낀 문 회장이 바늘을 놓치고 차영의 위로 쓰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안 실장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노인을 부축했다. 탄피로 꿰뚫린 손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노인이 괴로워하며 태주를 노려보다가, 독이 바짝 올라 떨어진 주사를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차영에게 그것을 꽂아 넣으려 시도했다.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어느 틈에 그들에게로 뛰어온 태주가 문 회장의 어깨를 끌어냈다. 그러고는 차영을 보호하기 위해 안 실장이 선 방향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문 회장 쪽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양 이를 악물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주사를 치켜들어 실랑이를 하게 됐다.

“우리 태주 아주 잘 컸구나. 그 간덩이가 아주 마음에 든다.”

칭찬인 듯 비난인 듯 모호한 말투로 내뱉은 문 회장이 이번에야말로 차영의 손등에 바늘을 꽂아 넣으려 했다. 놀란 태주가 억지로 그것을 빼앗았다. 다만 바로 그 대응이 패착이었던 것 같았다.

정신없는 사이에 문 회장이 태주의 손아귀에서 총을 빼앗아 든 것이다.

“외할아버지!”

“간덩이는 마음에 드는데……. 허를 쉽게 찔리는구나. 아직 멀었다.”

“가서 치료부터 받으세요! 이젠 그만하시라고요.”

“나는 하기로 작정한 일을 해내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후회 같은 것도 해 본 적이 없다. 모든 일은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니까. 그리고 나는 오늘 이차영이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지. 네가 이걸 막을 수 있을 것 같니?”

철컥. 총알을 장전한 문 회장이 차영을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태주가 그의 전신 위를 가로막듯 문 회장의 눈앞을 막아섰다.

“쏘시면 제가 맞게 될 거예요.”

“글쎄. 열다섯 발이라고? 하나를 썼으니 열네 개. 그중에 단 하나도 저 아이 몸에 안 박히리라는 보장이 있겠어?”

“제발…… 그만해!”

태주는 비명처럼 외쳤다. 제 외손자가 이토록 괴로워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가 철철 흐르는 손으로 총을 고쳐 쥐는 문 회장은 악귀 같았다.

이 시선이 정답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듯 노인은 방아쇠를 서서히 당겼다. 다만 다친 손이라 쉽지만은 않은 듯했다. 이를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킨 태주가 두 사람 간의 거리를 가늠했다.

떨리는 손가락이 최대치의 힘을 내어 방아쇠를 당기는 바로 그 순간. 문 회장의 풍채 좋은 몸을 무너뜨리듯 그를 밀어냈다.

“억……!”

비틀거리면서도 총기만은 놓치지 않은 문 회장이 끝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방향을 잃은 탄피가 어디론가 날아가 꽂혔다. 소란해진 틈을 타 태주가 손을 뻗어 문 회장에게서 총을 빼앗으려 했다. 빼앗고자 하는 자와, 빼앗겨선 안 되는 자 사이에서 물체가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문 회장이 다시 한 번 차영을 겨냥해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던 태주가 하는 수 없이 문 회장의 팔을 꺾었다.

“윽……!”

어쩌면 운 좋게 지금 이 순간은 어찌어찌 흘러가게 둔다 해도, 제 외할아버지는 멀지 않은 시간 내에 차영을 죽이려고 무슨 짓이든 할 터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차영은 죽을 목숨인 셈이다.

그걸 이제야 깨닫게 된 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짧은 시간 동안 수천 가지의 고민들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총구의 방향을 문 회장에게로 돌렸다.

“태주야!”

“외할아버지.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게 만드세요. 그 죄 다 어떻게 갚으시려고!”

괴로워하는 태주의 음성에 물기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이거 놔라!”

“타협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틀렸어요.”

“이 녀석이! 이거 안 놔!”

“치영일 죽게 둘 순 없어요.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차영이에요. 죄송해요.”

“놓으라니까!”

“그동안 돈 처들여 키워 주셔서 감사했어요.”

이 마지막 인사가 그의 입술을 가르고 나오는 순간, 문 회장이 그 어느 순간보다 크게 동요하며 움찔했다. 안 실장도 태주의 목소리를 통해 그가 지금 진심이라는 걸 느꼈던지 그들 쪽으로 다가오려는 듯한 기척을 냈다. 태주는 이를 인지하고 차갑게 일갈했다.

“안 실장은 안 끼어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살고 싶으면.”

이내 덜덜 떨리고 있는 총구의 위치를 움직여 문 회장의 이마를 유일한 표적으로 삼은 태주는 추구하고자 한 바를 이루기 위해 노인의 손가락 위에 제 손가락을 얹었다.

“태주 너……!”

“지옥 가세요.”

이 최후의 선택이 고통스러운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그는 그대로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탕! 타앙!

카트리지 안에 들어 있던 금속 탄피 두 발이 노인의 이마에 한 발, 그 아래 눈자위에 한 발 잔혹하게 연달아 꽂혀 들었다. 눈의 주변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으윽……!”

풀썩, 하고 그 나이 대에 비해 풍채가 좋고 키가 큰 노인이 총알에 안면이 관통당해 뒤편으로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배수관의 입구를 잘못 건드린 모양이었다.

퍼엉! 펑! 터진 배수관에서 고여 있던 물줄기가 미친 듯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 참혹한 현장을 보고 식겁한 구경꾼들이 모두 정지 상태로 태주를 직시했다. 심지어 차영은 급작스럽게 물세례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도, 도련님, 진정하시…….”

태주는 안 실장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 발을 더 장전해서 그에게로 겨눴다. 태주의 창백한 얼굴 위에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서러워 보일 정도로 가득 차올랐으나, 끝내 흐르진 않았다. 이를 본 안 실장이 화들짝 놀랐다.

“도련, 도련님.”

본능적으로 위계 서열을 직감한 안 실장은 차영을 아주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태주의 총구는 안 실장을 향해 있었다.

“눈이……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문 회장을 쏠 때 연속으로 탄환을 발사하면서, 발사할 때의 충격이 가까이 있던 태주에게도 전이되었던 모양이었다. 워낙 탄이 강한 권총이라 슬라이드 틈새로 화약 분말 조각이 튀어 올라 태주의 눈자위 주변으로 튄 것 같았다. 안 실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 한쪽 눈에서 피가 흐르는 것과 통증을 함께 느낀 그는 잇새를 짓이겼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세요. 건방지게 나보다 한발 앞서 지껄이지 말고.”

태주의 음성이 푹 잠겨 있었다. 그냥 하는 말뿐인 경고가 아니란 걸 직감한 안 실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회장님 자리가 공석이 됐네요. 앞으로 안 실장이 누구한테 충성해야 할까요.”

“물론 도련님이십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네, 잘 알고 있네요. 외할아버지한테 보였던 그 충성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대물림하면 돼요. 키워 주던 주인이 죽으면 개도 다른 주인을 섬겨야죠. 그래야 살지.”

“명심…… 하겠습니다.”

“회장님, 윤 원장, 그리고 이 장소, 다 책임지고 깔끔하게 수습하세요. 회장님 여든 넘은 고령이시고, 외할머니 돌아가신 뒤 기다렸다는 듯이 저한테 상속 작업 시작하셨으니 여러 가지 문제로 급사하셨대도 큰 문제 안 될 거예요. 우리 집 개 재롱떠는 솜씨 좀 볼게요.”

조련을 할 때는 상과 벌을 확실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태주는 가장 증오했던 사람에게 배운 대로 하고 있었다.

참담해하는 얼굴의 안 실장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는 흡족한 대답이라는 양 그를 지나쳐 차영에게로 다가갔다. 물이 뿜어져 나오는 길을 걸어온 통에 죄다 젖은 태주가 차영을 넘겨받아 제 품에서 부축했다. 그러고는 기절한 차영의 귓전에 나지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미안해. 이게 다 내가 널 좋아해서 이렇게 된 거야.”

너는 이제 더는 나를 좋아해 주지 않겠지.

“다 나 때문이야.”

그건 꼭 작별 인사 같았다.

이윽고 태주는 차영의 귓가에 부드럽게 키스하곤 그를 안아 들어 그곳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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