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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10화 (110/144)

110화

그 자리에 못 막힌 듯 우뚝 서 있는 태주의 몸도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들을 겨우 억누르고, 외부로 빠져나가려 하는 경솔한 충동들을 주워 담는 일만으로도 매우 버거워 보였다.

“헤어질게요. 아니, 이미 헤어졌어요. 저만 붙잡고 있었던 거예요.”

중저음의 음성은 느릿했다. 그러나 발음만은 분명했다. 태주의 침착한 설득에 움찔한 건 놀랍게도 차영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차영의 가슴 한편이 알싸했다.

“얌전히 말 들을게요. 평생 안 보고 살라면 그렇게 할게요. 허튼짓 안 하고 열심히 일할게요. 그러니까 살려만 달라고.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이제야 우리 태주가 누구 말이 법인지 깨달은 모양이구나.”

숨을 헐떡거리던 차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 문 회장과 저런 비참한 대화를 하는 태주가 자신만큼 불쌍했다. 그래서 그와 보다 분명히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그러나 줄곧 차영에게만 오롯이 고정되어 있던 태주의 시선은 어느 틈에 제 외할아버지에게로 향한 뒤였다. 언제 시선이 마주쳤었냐는 듯 차영을 더는 봐 주지도 않았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차영은 그 와중에 너무 서글펐다. 눈이 몹시 많이 부어서 눈물이 안 나오는 게 우스울 따름이었다.

“살다 보면 태주야,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고 대다수는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걸 깨닫게 돼. 나는 살면서 실패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봐 왔다. 대부분 누군가를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들이 대사를 망쳐. 패턴이 다 똑같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네 앞길에 장애물은 내가 막아야겠다.”

그는 평생 고고하게 세우던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고 애원하는 태주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 대답으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태주는 제 손을 움찔거리면서 눈으로는 문 회장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외할아버지의 뒤편에는 차영을 부축한 안 실장이 있었다. 자신의 시야를 기준으로 문 회장이 왼편, 차영과 안 실장이 오른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치에 윤 원장이 보였다.

차분히 숨을 내쉬어 본 태주가 마지막 경고를 하듯 내뱉었다. 음성이 소름 끼칠 만큼 차갑고 음산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한다니까!”

“요사이 계속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 주는구나. 언제 철들는지.”

그러나 여전히 문 회장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태주의 음성을 곱씹는 듯하던 문 회장은 정말 애잔한 생명체를 보듯 혀를 끌끌 차더니, 안 실장의 손에서 주사기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턱짓했다.

“외할아버지! 제발……!”

태주의 절박한 외침을 들은 안 실장이 움찔했다. 그러자 문 회장이 뭐 하느냐는 듯 지그시 뜬 눈으로 안 실장을 힐난했다. 미래의 권력일 태주와 현재의 권력인 문 회장과의 사이에서 망설이던 그는 하는 수 없이 누더기가 된 차영의 목울대를 세게 압박했다. 마치 주사를 놓기 전 자세를 잡는 모양새였다.

공포와 통증의 이중 고통으로 괴로워진 차영은 마른빨래에서 물을 짜내듯 힘겹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 실장이 다소 난감해하는 기색으로 그의 복부를 힘껏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차영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윽……!”

“회장님이 보고 계십니다. 얌전히 계시는 편이…….”

문 회장의 눈치를 살핀 안 실장이 차영의 귀에 아주 낮게 속삭였다. 그걸 보고 머리끝까지 흥분한 태주가 결국 참아 왔던 비명을 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개한테 뭘 어쩌려고. 뭘 어떻게 하려고! 당신은 얼마나 더 나를 망쳐야 만족할 건데. 대체 왜!”

“태주야. 나는 지금 이차영이를 죽일 거다. 그리고 안 실장, 이 아이가 죽으면 둘 다 치워. 깔끔하게.”

〈한주혁이는 제대로 치웠나?〉

떠오르는 오래전 기억으로 괴로워진 태주가 미간을 구겼다. 제 외할아버지는 독선적인 사람이었다. 무슨 말을 한대도 이미 단단히 결심한 그의 결정을 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윤 원장이 태주에게 미끼를 던진 것이라 충고했지만 그건 어떤 복선이었던 모양이다. 도리어 윤 원장을 미끼로 던진 문 회장은 진짜 목표인 차영을 연달아 포획하고, 급기야 차영을 보호하고 있던 태주까지 잡아먹으려 들었다.

몸이 앞으로 숙여진 차영이 숨을 헐떡이며 움찔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타고 피가 줄줄 흘렀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윤 원장도 주변을 둘러보며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유명을 달리하게 될 제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 실장.”

문 회장이 차갑게 호명했다.

그러자 차영을 팔에 걸치듯 부축하고 있던 안 실장이 손에 힘을 주었다. 그걸 눈으로 확인한 문 회장은 차영의 목울대에 바늘을 슬쩍 찔렀다. 저대로 당장 손가락에 힘만 주면 실린더 안에 든 저 정체 모를 약품이 차영의 몸으로 침투할 것이다.

“하, 한태주. 한태주…… 나 살려 줘. 제발.”

제 앞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때문에 몹시 두려워진 차영이 오열했다.

헉.

그걸 본 태주는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차영의 흰 살결 위에 서서히 쑤셔 박히기 시작하는 바늘 끝을 두려워하는 눈길로 직시한 채 심호흡했다. 그러면서 제 코트 위를 더듬었다.

그 당시의 분노를 명확히 각인하기 위해 얼마 전 탄환을 새로 구해 넣은 일이 신의 한 수인지, 악수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이걸 사용하게 된다면 이건 여태까지의 일생, 혹은 앞으로의 일생을 날려 버리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분노가 치밀어 충동적으로 떠올리게 된 일도 맞았다.

하지만 차영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망설임은 사치였다.

“그 손은 앞으로 못 쓰게 되실 거예요. 운이 나쁘면 한쪽 팔을 떼어 내셔야 할지도 모르고, 어쩌면 상체 일부분까지 망가질 가능성도 있겠죠. 진짜는 쏴 본 적이 없어서요.”

어투는 침착했지만 태주의 목소리 끝은 여과 없이 떨렸다.

그제야 태주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인지한 문 회장이 그를 쏘아봤다.

태주는 시력이 좋았고, 타고난 방향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실제로 총구를 겨눠 방아쇠를 당겨 본 적이 없어 자신이 명사수일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비슷한 것쯤은 되리라 믿었다.

민첩하게 코트 안에서 총기를 꺼낸 태주가 정확히 문 회장이 선 자리를 향해 한 발 장전하고 총구를 겨눴다. 철컥.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상황을 인지할 능력이 있는 모두가 태주 한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첨예한 침묵이 흘렀다.

스스로를 지키는 법은, 받은 만큼 갚아 주는 것이라고 문 회장이 제게 가르쳤다. 그게 최고의 복수라고 말이다. 이 말은 태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거, 어릴 때 제 머리에 겨누셨던 겁니다. 물론 외할아버지가 지금 그 손 치우시면 저도 안 쏠게요. 하나를 얻고자 하면, 하나는 내줘야 한다고 배웠으니까요.”

문 회장은 흥미롭다는 듯 태주를 보다가 잠시 멈추라는 듯 안 실장을 향해 손짓했다.

“네가 나한테 그걸 쏠 수 있을 것 같니?”

“뭐가 더 빠를까요. 탄피? 바늘? 제가 알기론 확실히 탄피가 빠르거든요. 비교적 느리더라도, 회장님 손 정중앙에 금세 꽂힐 거고요. 남은 여생 불편하게 살고 싶으시면 본인 몸에 시험해 보시는 것도 괜찮겠죠.”

“태주 네가 나한테 그걸 쏠 수 있는 간덩이를 가졌다고 생각해?”

“역으로 묻죠. 제가 이까짓 것도 못 쏠 간덩이를 가졌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놈이라면 제 한 목숨 살려 달라고 빌지 않지.”

“저 외할아버지 핏줄입니다. 이건 제가 좆같이 싫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단호한 음성이 땅 밑까지 가라앉을 듯 점차 낮아졌다.

“이 안에, 총알 열다섯 발이 들어갑니다.”

“거기 든 탄피는 이미 쓸 수 없을 것들이다. 자그마치 20년이 넘었어.”

“글쎄요. 제가 그걸 그대로 가져왔을 것 같으세요? 뭔가 다른 짓을 하진 않았을까요?”

“태주 너…….”

“이런 걸…… 자업자득이라고 하거든요.”

“그거 내려놓지 못해?”

그제야 상황이 본인 판단보다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문 회장이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여태까지는 태주가 전혀 쏘지 못하리라 여겼거나 혹은 탄피가 낡아 효력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의 그릇된 짐작을 알기라도 한 듯 태주가 보다 분명하게 문 회장의 손아귀를 정조준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끼워 넣어 방아쇠를 슬쩍 당기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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