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철썩!
기절한 차영의 얼굴을 때리는 어떤 존재가 있었다. 사람의 체온 같지는 않았다. 보다 차갑고, 영역이 넓게 분포되는 액체였다. 물 같았다. 입술 위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느다란 틈을 벌리고 입 속으로 침투했다. 얼굴의 혈흔과 뒤섞였는지 약간의 피 맛이 함께 느껴졌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차영의 눈앞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다리였다. 검은 정장 바지로 감싸여 있었다. 고개를 위쪽으로 들어 올릴 힘도 없어서 누구인지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아까 전의 일이 착각이나 꿈이 아니라면 아마 윤 원장이리라는 짐작에서였다.
실신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차영은 자신의 온몸에 얼음장 같은 냉기가 서렸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하게 됐다. 쌀쌀한 날씨에 난방도 되지 않는 곳에서 차가운 물세례를 받았으니 이대로 이곳에 밤새 있게 된다면 손쉽게 동사에 이르게 될 듯했다.
보다 따뜻한 장소로 이동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신은 처음 이곳에서 눈 떴을 때처럼 묶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이차영 씨.”
퍽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제 몸 한참 위쪽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가 안 실장이라는 것을 인지한 차영이 대답 대신 움찔했다.
아마 자신이 지금 베고 누운 것은 윤 원장이고, 제게 방금 전 물을 뿌린 건 안 실장인 모양이었다.
“곧 도련님께서 이쪽으로 오실 겁니다. 회장님과 도련님을 너무 자극하지 않는 편이…… 가장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정말 안타까워서 드리는 충고입니다.”
이 알량한 조언을 얌전히 아로새기던 차영이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입을 벌려 보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죄다 갈라진 음성이 겨우 샜다.
죽여 버리겠다고 말을 할까.
모두 갚아 주겠다고 쏘아붙여 버릴까.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문장들이 뒤엉켰지만 정작 차영의 입을 통해 비집고 나오는 음성은 애원이었다.
“아저씨, 저 좀 살려 주세요…….”
하필이면 그들의 앞에서 비굴하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제 자존심의 한계는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비참하고 참담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살고 싶은 열망이 응어리처럼 단단해져서 차영의 입 속에 맴돌다가 연신 탈출을 시도했다. 여태까지 잘 견뎌 왔으나 눈물 또한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주르륵 뺨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안 실장이 그런 차영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눈가에 연민이 한 자락이라도 있었는지 차영은 고개를 돌릴 힘이 없어 보지 못했고, 그래서 알지 못했다.
다만 크게 얼굴을 움직이지 않아도 시선이 닿는 측면의 차량 뒷좌석에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문 회장이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문 회장을 보니 통증이 극심해지는 듯했다. 겁이 난 차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멀리서 차영의 모습을 본 건지, 아니면 단순히 그럴 만한 때가 됐다고 느낀 건지 문 회장이 차에서 내렸다.
“살, 살려 주세요.”
차영이 안 실장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뒤쪽으로 물러서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윤 원장의 옷자락이라도 잡아 봤다. 손아귀에도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아서 계속 풀리기 일쑤였다.
서서히 문 회장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삼도천을 함께 건널 사람으로 차영과 윤 원장을 선택한 저승사자처럼, 이쪽으로 걸어오는 서늘한 얼굴엔 표정이 하나 없었다. 처음에 추위와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기만 하던 차영의 몸이 발작하듯 파들거렸다. 자신마저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에 띄는 동요였다. 미친 듯이 떨리는 몸에 정신을 겨우 맡기는 것 외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안 보였다.
그때였다.
끼이익. 엄청난 마찰음을 내며 처리장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흑진주색 차량이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신경질적으로 비추던 차는 이윽고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 댔다. 차영을 비롯한 이곳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뒤편을 향했다.
얼핏 봤을 때, 처음 보는 차인 듯했다. 그러다가 제집 야외 주차장 한구석에서 본 적 있던 것이란 걸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됐다. 무엇보다 그 안에서 내리는 사람을 익히 알았다.
죽지는 않겠구나.
안도감이 마치 헛구역질처럼 산발적으로 치밀어 올랐다. 태주가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이다.
“한태주…….”
차영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서러운 눈물도 함께였다.
그가 여기에 나타나 준 일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땐 세상에서 가장 사무치게 미워하는 문 회장에게 건넬 거래 조건 몇 가지가 있어야 하리라는 것도 짐작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하러 나타나 줄 구증의 손길로 그 외에 아무도 생각이 안 났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왔구나.”
침묵하던 문 회장이 덤덤히 내뱉었다. 그러고는 안 실장으로 하여금 늘어진 차영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게 만들고 부축하도록 했다. 기절해 있는 윤 원장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는 태주는 계속 엉망이 된 차영에게만 제 시선을 고정했다.
“이차영!”
아마 문 회장은 태주를 막는 것보다는 이쪽의 피해자들을 사수하는 편이 훨씬 더 그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데 용이하리라는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그리고 이는 적중했다.
미친 듯이 차영을 향해 뛰어오던 태주가 중간 부근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제 스스로 버티고 서 있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양새로 부축을 받고 있는 차영의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안 실장의 손에는 바늘이 길고 날카로운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태주의 미간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그가 괴롭다는 양 가볍게 탄식을 토해 냈다.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태주가 다시 발걸음을 떼려 하자, 문 회장이 차가운 음성으로 그를 저지했다.
“캠코더는 잘 가져다 놨니? 네 엄마 유품 말이다.”
“이차영부터 내놔.”
“총은. 얌전히 뒀고?”
“내놓으란 말 안 들립니까?”
“지금부터 네가 한 걸음만 더 다가와도 저 아인 죽는다.”
다시 발걸음을 내디뎌 빠르게 차영을 향해 접근하려던 태주는 멈칫했다.
그와 차영 간의 사이는 겨우 몇 미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더는 다가갈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생기고 만 것이다.
거리가 있는 곳에서 봐도 한눈에 그의 안 좋은 상태를 알아챌 수 있었다. 얼굴은 피떡이 된 상태였고, 잔뜩 부어오르고 멍이 든 자리들이 선연했다. 차영을 잘 아는 사람이 본다 해도 쉽게 그라는 것을 알아채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식별하기 힘들 정도로 안면이 망가져 있었다. 흠씬 구타당한 게 분명했다.
휘청거리는 몸은 종잇장 같았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지도 못해서 원수 같은 안 실장에게 제 몸을 힘겹게 의탁했다. 젖은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저 고문의 흔적들을 눈으로 직접 담아야 하는 태주는 더할 나위 없이 참담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네 앞에 나타나지 말걸.
시간을 돌린다면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 짧은 순간 수천 번도 넘게 후회했다. 멀쩡히 혼자서도 잘 살고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나 인생을 흔들어 놓고, 급기야 몰골이 저 지경이 되게 만들었다. 차영의 운명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놓은 게 자신이라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어쩌면 자신이 문 회장의 외손자라는 불편한 진실보다 더더욱 말이다.
“한태주…….”
가까스로 입을 연 차영이 태주의 이름을 불렀다. 먼발치에서 두 사람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태주는 움찔했다. 그러나 다가갈 수도, 당연히 안아 줄 수도 없었다. 태주는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급기야 울컥했다.
“나한테 원하는 걸 말해요. 당신이랑 할 얘긴 나랑 있는 거잖아. 왜 죄 없는 이차영한테 이러시는 겁니까. 일말의 연민도 없어요?”
“네가 이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지. 이 앨 망친 건 너다, 태주야.”
“차영이 돌려주세요. 쟤 병원에 보내고, 다시 얘기해요.”
“병원? 물론 가야지.”
“지금 당장……!”
“죽어서 가게 될 거다. 윤 원장과 함께 나란히.”
“문현기 회장!”
“그러게 이 애가 네 약점이 되기 전에 헤어졌으면 모두가 험한 꼴 볼 필요 없이 편했잖아. 적당히 놀았어야지. 네 할아비를 이렇게 번거롭게 만든 것도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