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운전석에 앉은 태주는 룸미러로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 생각보다 훨씬 더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내심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괜히 애꿎은 제 코트 자락을 여며 보았다. 그의 코트 안에 어린 제 이마에 총구가 겨눠졌던 총기가 잠자고 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엔 캠코더가 얌전히 놓여 있는 상태였다.
이윽고 창밖을 힐끗 살핀 그는 핸들을 과격하게 쥐었다. 마치 엄청난 압력에 빨려 들어가듯 손아귀에 힘이 미친 듯이 들어갔다. 부서뜨릴 기세로 핸들을 잡고 있던 태주는 겨우 손을 떼어 내고 휴대폰을 꺼내 안 실장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제 차가 지금부터 향할 목적지가 어딘지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였다.
- 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거두절미하죠. 왜 걸었는지 알잖아요.”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태주 쪽이었으니, 응당 보채게 됐다.
“안 실장!”
- 그냥 이 문젠 회장님께서 해결하도록 두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도련님께서는 약속한 물건만 제자리에 가져다 두시고 댁으로 돌아가셔서…….
“어디예요, 차영이 가둔 데. 말해요. 난 차라리 본가였으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최소한 목숨은 부지할 것이다. 결벽증이 약간 있는 문 회장은 본인이 매일 취식하는 집에서 살육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 도련님, 이쪽으로 오시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
“이쪽이라고 하는 거 보면 장소는 하난데. 납치한 사람은 두 사람이네요.”
허를 찔린 안 실장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태주는 멈추려 들지 않았다.
“윤 원장이랑 이차영 같이 가뒀구나. 차라리 잘됐군요.”
- 도련님.
“이제 구체적으로 말해 보세요. 뭘 어쩔 건데요.”
- 회장님께서 도련님이 가슴 아플 일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차영 씨는 사안의 엄중함에 대해 경고만 드린 후 댁으로 되돌려 보낼 겁니다. 그러니까…….
“걘 돌려보내고 윤 원장은 죽일 건가 봐요? 아, 할아버진 치운다고 하죠?”
- …….
“어디야. 자꾸 여러 번 묻게 만들지 마. 성질 더 나빠져.”
상대는 또다시 말이 없었으나, 태주는 지금의 침묵이 여태까지 안 실장이 보인 것과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챘다. 그의 직감은 현재 수화기 건너편에서 안 실장이 문 회장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역시나, 안 실장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이렇게 응답했다.
- 이곳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태주는 그의 덤덤한 음성을 귀로 새겨들으며 본격적으로 난폭한 주행을 시작했다.
* * *
어느새 윤 원장에 필적할 만큼 엉망이 된 차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신에 남은 힘이 거의 없었다. 겨우 의사 표현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게만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그 외엔 의지가 있어도 행동하는 게 어려웠다.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픈데 아직도 죽지 않았다니 의아했다. 대체 사망에 이르려면 얼마나 극도로 아파야만 하는 것일까.
온 얼굴에 피가 줄줄 흘렀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땀이 비 오듯 떨어졌다. 혈흔과 뒤섞여서 체액의 색깔이 다소 흐려져 오묘했다. 퍽 예쁜 색이었으나 눈자위가 퉁퉁 붓고 시야가 흐린 마당에 감상하듯 눈에 담기는 어려웠다.
겨우 숨을 고르던 차영은 쿨럭, 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입 밖으로 혈액이 뭉텅이로 터져 나왔다. 그게 너무 끔찍해서 미간을 구겼다. 눈앞이 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물체로 자꾸만 흐려졌는데 정작 너무 억울한 나머지 눈물은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온몸을 좀먹을 듯이 파고들더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것보다 더한 분노와 통분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휘감고 놓아주질 않으려 들었다. 화가 나서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자 터진 살결이 더 크게 찢어진 듯 물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맨살이 툭 터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꼭 석류를 입에 넣고 씹는 기분이다. 이런 순간 한가하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서서히 그런 차영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접근했다. 지팡이를 든 노신사였다. 저 기다랗고 튼튼한 물건이 분명히 처음엔 옅은 갈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어느 틈에 군데군데 피투성이가 되어 단풍처럼 새빨간 옷을 덧입고 있었다.
“윽……!”
일순 기다란 물체의 끄트머리가 아래로 축 처진 차영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아까 전의 혹독하리만치 잔인했던 폭행이 다시 시작되는 건 아닐까 차영이 몸을 흠칫 떨고 그를 올려다봤다.
얼굴이 죄다 화끈거렸다. 어느 부위를 얻어맞았는지 짐작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온 얼굴을 가격당했고, 온몸을 난타당했다. 뺨이 왠지 길게 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손이 자유롭지 못해서 만져 볼 수가 없었다. 막상 만지면 상처들이 화끈거려 아플 듯했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차영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을지 걱정됐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문 회장이 얼굴의 움푹 들어간 자리를 지팡이의 끄트머리로 쿡 찔러 자극했다.
“아윽…….”
“살려 달라고 한 번을 안 하는구나. 넌 무서운 것도 없어?”
차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 회장은 그의 흔들리는 동공만 보고도 충분한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아까처럼 어른 말씀에 대답을 해야 한다고 다그치지는 않았다.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한데 왜 입을 닥치고 있어.”
“당신 같은 인간한테 구걸하기 싫으니까.”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뱉자 목구멍이 따가웠다. 퉁퉁 부은 입술도 아리고 쓰렸다.
“그래? 넌 태주와 다르구나.”
“한태주가 당신 같은 쓰레기한테 그랬을 리 없어요.”
“네가 아는 게 전부는 아니지.”
“나는…… 읏, 젠장…….”
뭔가 더 반박하려던 순간 울컥하고 차오르는 목구멍의 핏덩이 때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땅에 붉은색의 덩어리를 토해 내게 됐다. 차영은 혼잣말하듯 욕설을 내뱉었다. 목소리가 죄다 갈라졌다.
“자존심이 목숨을 구해 주지는 않는다. 자존심으로 구명을 하려면 네가 상대보다 일부일지라도 강한 면이 있어야 해. 내가 살아남았을 시 상대에게 얼마나 위협이 되느냐. 그 수치가 날 지키는 척도가 되어 주는 법이거든. 그런데 넌 벌레야. 그러니까 구걸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럼 제가 사나요? 그냥 회장님 마음 아니고요?”
“아니, 네가 죽고 살고는 내가 아니라 태주한테 달렸어. 태주가 여기에 온다면…… 넌 죽는다. 오지 않는다면, 기꺼이 살려 주마. 어려운 일도 아니지.”
“결국 본인 마음대로란 소리로 들리는데요.”
“네가 태주한테 소중한 존재도 아닌데 굳이 널 죽일 필요까지는 없단다. 내 귓전을 괴롭히는 모기는 죽여도, 외부에 날아다니는 날벌레들을 굳이 찾아 죽이지는 않듯이, 언제든 그럴 만한 이유가 생겼을 때 밟으면 그만이야.”
교활한 노인의 생각을 몇 마디 말들로 전부 읽어 내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결국 이곳에 자신을 가둔 이유는 일종의 태주를 위한 테스트라는 듯이 들렸다. 그리고 선뜻 이 테스트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친절히도 문 회장이 직접 입을 열었다.
“난 네가 그 애의 슬픔이 되길 바란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 때문에 자신은 아직 태주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굳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때론 있었다. 단 한 번도 태주의 마음을 의심한 적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짐작이 갔다.
태주가 정확히 어떤 슬픔들을 어깨 위에 이고 지고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가 지닌 것 중, 꽤 큰 영역을 점유하는 슬픔이 되리라. 죄책감만으로도 감당이 어려운데 자신을 향한 애정까지 덧대어져 있으니 견디기 어려울 터다.
그리고 태주의 마음에 슬픔을 한 가지 더 얹어서 문 회장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일지 상상하는 일은, 너무나도 역겨웠다.
“무릇 기업가라면 그 정도 슬픔과 미움은 기저에 간직하고 있어야 돼. 인생에서 가장 험준한 협곡을 넘는 역경도 겪어 봐야 하지. 그래야 그것들을 딛고 악착같이 큰일도 해낼 수 있는 거다. 일을 배우기 전에 냉정과 열정을 배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거든. 사실 여태까지 좀 재미없게 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널 만난 뒤로 태주는 아주 잘하고 있는 셈이지.”
“…….”
“그러니 네가 죽어 줬으면 좋겠다.”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자신의 핏줄에게 슬픈 일을 하나 더 만들어 주겠다는 그 모순이, 평범한 사람인 차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