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기절해 있던 차영은 어렵사리 눈을 떴다. 쿨럭.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이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또. 비슷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는 법이다. 아니, 승리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목숨 정도는 구할 수 있는지 모른다. 하는 수 없이 일단 눈을 크게 뜨고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드넓은 공간이었는데도 스며드는 빛이라곤 거의 없어 사위가 많이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겨우 눈을 적응시키고 나니 주변에 원통으로 연결된 기계들과 물탱크로 보이는 물 공급 시설이 아주 많이 있는 게 보였다.
‘물…….’
물이 간헐적으로 흐르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하수 따위를 다루는 공간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차영은 자신의 짐작이 맞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규모는 다르지만 공항에서도 이런 비슷한 구조의 시설을 본 적이 있었던 터다. 바로 중수 처리장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비릿한 쇠의 냄새였다. 또 이 시설이 전반적으로 묘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손이 탄 흔적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도 이 공간이 음험해 보이는 데 크게 한몫했다. 아무래도 현재는 잘 이용하지 않는 곳 같았다. 바꿔 말하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본대도 자신을 구하러 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적을 것이라는 의미다.
가까스로 눈을 굴려 보던 차영은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가 옆쪽에서 인기척이 들려 깜짝 놀랐다.
고양인가? 강아지?
께름칙한 기분을 느끼며 살짝 시선 아래로 고개를 틀어 보는데 웬걸, 사람이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몸이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신 흐느적거리는 사람은 자신처럼 꽁꽁 기둥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결박되어 있을 뿐 아픈 곳은 없는 차영에 비해 상태가 매우 나쁜 듯했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고 자세히 보이지는 않아서 상태가 얼마나 나쁜 건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참혹한 느낌만 물씬 전해졌다.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곧 자신도 저런 꼴이 되는 건가 싶어졌던 것이다. 대체 저 사람은 무슨 짓을 하려 했고 저질렀기에 저런 상태가 됐을까.
“저기, 말씀하실 수 있어요? 죄송한데 왜 여기에…….”
“이…… 차영 씨?”
“누구……. 저를 아세요?”
“전 윤정훈 원장이라고 합니다.”
일순 상대에게 안정을 주기 위해 애써 끌어 올렸던 차영의 입매가 아래로 내려갔다. 표정은 싸늘하게 식었다. 너무 익숙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제 아버지의 죽음에 협력한 사람이었다. 왜 자신이 그와 같은 장소에 비슷한 모양새로 묶여 있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기가 막혔다.
“뭐예요? 왜 그쪽이 여기 그런 꼴로 있는 건데요.”
날카롭게 반응하던 차영의 머릿속에 급작스럽게 태주의 음성이 스쳤다. 윤 원장이 자신을 돕고자 한다는 이야기였다. 문 회장 측에서 이 일을 알게 돼 사달이 난 게 아닐까 추측이 가능했다. 순간적으로 태주의 안위가 걱정된 자신이야말로 정말 답도 안 나오는 문제라는 걸 느꼈다.
“이정욱 기장님 일은…….”
“더러운 입으로 그 이름 담지 마세요.”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영이 서둘러 그의 말허리를 끊어 냈다. 윤 원장의 입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변명이고, 핑계가 될 뿐이었다.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애초에 미안할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난 그렇게 치사하게 안 살았어요. 그래서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저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본인 마음 편하자고 그러는 거 기분 더럽습니다.”
차영의 냉랭한 음성이 잦아들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윤 원장이 애써 가누고 있던 몸을 축 늘어뜨리는 게 기척으로 전이됐다. 그러나 차영은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대신 생각에 골몰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다시 열심히 주의력을 쥐어짜 내 주변을 둘러봤지만,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없어 보였다. 사방에 녹슨 물탱크들이 위압적이었다. 제 등 뒤에 원통을 반으로 갈라놓은 긴 통로에 물이 고여 있는 모습은 물고문을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환경이라 볼수록 암담했다.
일단 정신을 잃은 채로 와서 출입문을 알 수 없었고, 나간대도 빈손이라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 아득했다. 어쨌든 탈출할 길을 찾으려면 몸이 자유로워야 했는데 포박당한 상태였고, 지난번 납치 때와는 다르게 자신을 방치한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가 심각하게 주변 상황을 되짚고 있던 그즈음. 끼릭, 하고 무언가 조그마한 물체가 낡은 원통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헉…….”
힐끗 보니 팔뚝 반만 한 쥐 한 마리가 그의 옆을 잽싸게 스쳐 지나갔다. 차영은 저 쥐가 묶여 있어 도망치기가 요원한 제 쪽으로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 이 암담한 상황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다.
이쯤 되니 누군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위협이라도 했으면 하고 바랐다. 출입문이 어딘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쥐가 자취를 감추고 나니 설상가상으로 조용한 공간에 물 흐르는 소리만 졸졸졸 이어졌다. 차영은 왜, 어떤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소리를 들려주면서 청각 고문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이대로 이곳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다가는 두려움에 잠식되는 것보다도 스트레스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자꾸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나마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게 조금 안심이었다. 홀로였다면 질겁해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다만 제게 위안이 되는 존재가 윤 원장이라는 게 너무 참담했다.
“저기요, 윤 원장님. 저 물소리 계속 듣다가 신경증 걸릴 것 같은데,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아무 말이나 괜찮아요. 각자 한 마디씩…….”
“…….”
“저기요! 윤…….”
응답 없는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 한 번 더 말을 걸어 봤으나, 상대는 끝내 대답을 주려 하지 않았다. 뒤늦게 말을 중간에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모양새가 이미 기절한 게 아닐까 싶었다. 혹시 단순히 정신을 놓은 게 아니라 죽어 버린 건 아닌지, 별별 암울하고 비참한 생각이 다 들었다.
초조해진 차영은 물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싶은 충동과 자꾸만 극한으로 치달으려 하는 제 비관적인 상상력 모두를 억누르며 제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바로 그때였다.
끼익.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영이 묶인 자리의 측면에서였다. 멀리 불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대낮의 따사로운 햇빛이 아니라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인공적 빛이었다. 아직 밤인 것이다. 활짝 열린 문 틈으로 가로등 따위가 전혀 안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이 장소가 꽤나 외지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
이윽고 한 대의 위협적인 차량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서서히 내부로 접근하다가 두 사람이 묶여 있는 기둥의 인근에서 멈춰 섰다.
차에서 제일 먼저 내리는 건 안 실장이었다. 그가 뒷문을 열고 어떤 노인을 내리게 했다. 문 회장이었다.
“문현기 회장?”
그가 내리는 차량의 뒷문의 두께가 어마어마했다. 그는 강하고, 지닌 것도 많지만 그만큼 이면에 두려운 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어머니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일 이외에도, 여태까지 저 위치에 올라서면서 그가 짓밟고 올라서서 울게 만든 사람과 그들의 가족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리라.
고급스러운 의전 차량에서 완전히 내린 문 회장은 지팡이를 짚고 단단히 버텨 섰다. 그러나 차영의 눈에 문 회장이 저걸 짚고 서 있는 이유가 다리가 불편해서는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차영 쪽으로 다가오는 걸음걸이에 저는 기색 같은 게 전혀 없었다.
헤드라이트의 일부를 꺼서 불빛이 조금씩 어스름해졌다. 문 회장은 눈을 깜빡이고 있는 차영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우리가…… 또 보는구나. 벌써 이게 세 번째지?”
“저한테 아직 용건 남으셨어요? 한 기장이랑은 헤어졌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글쎄다. 네 의사가 아니라 태주 의사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내가 설명을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차영이 네가 우리 태주 찜 쪄 먹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구나. 덕분에 내가 요즘 재밌는 꼴 아주 잘 보고 있단다.”
굴욕을 느낀 차영은 응답하지 않았다. 일순 가까이 온 문 회장의 얼굴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졌던 탓이다. 그 안에 든 내용물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의 껍데기는 태주와 꽤나 닮았다. 태주에게서 노인을 읽을 순 없으나, 그를 보니 태주가 읽혔다. 그게 가슴에 사무쳤다. 차영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침묵하고 있는데, 끝이 날카로운 지팡이가 그의 턱을 치켜들도록 만들었다.
“내가, 그래서 특별히 수신료를 좀 내고 싶은데.”
“헉, 읏!”
밭은 숨을 내쉰 차영이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문 회장이 차영의 턱을 들어 올린 지팡이로 턱 주변을 부드럽게 긁다가, 그것을 떼어 냈다. 그 촉감으로 인해 불쾌해진 차영이 뭔가 입을 열어 말하려던 차였다.
뻐억! 문 회장이 그대로 있는 힘껏 휘두른 갈색 지팡이가 차영의 안면을 후려쳤다.
“아윽!”
“어른이 말씀을 하시면 제때 대꾸를 해야지.”
고개가 휙 돌아간 차영이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끼고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아픔을 달랠 시간 같은 건 사치라는 양, 문 회장이 한 번 더 지팡이를 휘둘렀다. 뻐억! 또다시 거칠고 공격적인 마찰음이 일었다.
“아윽! 윽.”
발끈한 차영이 애써 통증을 견뎌 내며 제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여지없이 지팡이가 날아와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러고도 모자랐던지 문 회장이 차영의 입 안에 지팡이를 넣어 휘저었다.
“읍, 우욱……!”
고통과 충격으로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침인지 타액인지 알 수 없는 끈적한 액체들이 계속 흘렀다.
“이제야 좀 공손하구나.”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차영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문 회장을 쏘아봤다.
“대영 그룹 회장님은 사람 가두는 게 취미인가? 번번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네가 아무리 거두는 거 아니라는 검은 머리 짐승이라도 내가 거뒀으면 처신이 달라야지. 내가 주는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두 번뿐이라고 설명해 주지 않았나?”
그가 묵직한 지팡이로 차영의 안면을 또다시 후려쳤다.
“악……!”
차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형편없이 부어올랐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원망스럽게 문 회장을 쏘아보자, 그가 차영의 시선을 느끼고 혀를 쯧, 차더니, 차가운 얼굴로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순간 차영의 등줄기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아 올랐다. 왠지 저 행위가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차영의 창백한 얼굴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준 문 회장이 지팡이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머리, 어깨, 팔과 복부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퍽퍽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버러지 같은 게 감히 내 딸이 피고름 쏟아 낳은 외손자를……!”
“윽……! 윽! 윽! 윽!”
“어딜 감히!”
“아악……!”
묶여 있어 저항을 할 수도 없는 차영의 몸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그러다가 견디지 못하고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문 회장이 듣기 싫다는 양 차영의 입술 위를 힘껏 내려쳤다.
“아윽……!”
뻐억! 강타당한 차영의 얼굴이 바닥으로 축 처졌다.
“요사스러운 놈. 제까짓 게 욕심을 부릴 걸 부려야지.”
차영의 입을 통해 빠져나온 액체가 다시금 지면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위로 게슴츠레한 시선을 던지던 차영은 저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