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살려서 돌려 놓겠다고는 안 했다. 화근은 미리 제거하는 게 내 방식이지. 윤 원장을 너무 오래 살려 뒀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구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사람은 손아귀에 쥐어짜서 죽일 수 있는 벌레가 아니에요. 진짜 미치신 거예요?”
“제정신이 아닌 건 너야.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구는 거니. 내 말은 경전이니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가르쳤잖아. 태주야, 나는 널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도 말했다. 이걸 까먹으면 네가 우산이 되어 주던 벌레들이 밟히게 된다는 걸 정말 모르겠어?”
원래 이런 추잡한 싸움의 규칙은 늘 그렇다. 지킬 게 많은 사람에게 극악으로 불리했다. 여태 번번이 이겼기에 문 회장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윤 원장이 끔찍하게 밉고 증오스럽지만, 그래도 태주는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문 회장의 명령’으로 인해 비명에 죽는 건 바라지 않았다. 더는 그런 일은 없었으면 했다. 그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결심한 것을 빌미로 납치됐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됐으니 뾰족한 도리가 없었다.
“물건은 돌려 드릴게요.”
“잘 생각했다.”
“그리고 윤 원장이랑 같이 기자들 불러 만나려고 했던 약속은 취소하겠습니다.”
“이제야 네가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그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던 문 회장이 그제야 부드럽게 웃었다. 그걸 보며 태주는 이미 자신이 겨뤄 보기도 전에 패배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애초에 지는 싸움일 줄은 익히 짐작했으나 주먹 한 번 내질러 보기도 전에 모든 일이 좌절될 줄은 솔직히 예상 못 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통제당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고, 또 벗어날 수도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으나 그게 전부 꺾여 버린 기분이었다. 괴물을 상대로 형성한 방어막치곤 너무 얇았던 탓이다. 늘 자신이 문 회장보다 한발이 늦었다.
“대신 살려서 돌려보내 주세요. 아내분 전화받고 온 거라, 그 아저씨 죽어서 돌아가면 제가 면목이 없어요.”
“내가 연민은 가르친 적이 없는데.”
“연민이 아닙니다. 추잡한 짓은 저랑 상관없이 제가 모르는 곳에서 하시라고요. 저한테까지 구정물 좀 그만 튀기시고요.”
“그래. 이번엔 살려 두겠다고 약속하마.”
“저한텐 말장난 안 통해요. 식물인간 만들지도 마세요.”
“일단 물건들부터 가져다 놓은 뒤에 이 얘긴 다시 하자꾸나.”
깊이 환멸이 인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던 태주는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중문 밖에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기다리는 안 실장이 바로 보였다. 안쪽 두 사람의 대화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파악한 것 같았다.
그는 날카롭게 뜬 눈으로 안 실장을 냉랭하게 노려보다가 이내 무시하고 차갑게 지나쳤다.
* * *
집에서 낡은 기계와 탄환이 든 총기를 챙겨 나온 태주는, 차에 탑승하려다가 멈칫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울리지 않는 제 휴대폰을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본가와 백은관, 그리고 다시 공항 근방의 제집까지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이미 시간은 세 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
도착하면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했던 일을 잊은 건 아닐 터다. 지금 제 휴대폰이 잠잠한 이유의 경우의 수는 크게 두 가지였다. 태주에게 전화하기가 싫어서, 혹은 연락하지 못할 만한 이유가 생겨서. 둘 다 불안했다.
다급해진 그가 직접 통화를 시도해 봤지만 여전히 차영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제 차의 위치를 추적해 보니 멈춘 곳이 낯익었다. 언젠가 도윤의 본가라고 지나가듯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나마 안도했다.
겨우 차량에 올라탄 태주는 아쉬운 대로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도윤 씨.”
- 한 기장님? 어쩐 일이세요?
“차영이 거기 갔습니까?”
서두도 없이 불쑥 묻는 말에 상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뒤이어 붙여 오는 응답은 태주를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차영이가 여기 온다고 했던 거 맞죠?
“무슨 대답이 그래요. 안 왔어요?”
- 얘가 전화해선 자기 집 앞이라고, 다 왔다고 해 놓곤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안 들어와서 나가 봤는데, 없잖아요. 얘가 시간 약속이 칼 같은 앤데…….
핸들을 쥔 태주의 손이 설핏 떨렸다. 그는 낮은 음성을 겨우 쥐어짜 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 제가 아이스크림 사 오라고 했는데……. 우리 집 골목 바로 밖에 가게가 있거든요. 그런데 사 오겠다고 대답하고 끊더니 연락이 안 돼요. 치킨 시켜 먹잔 이야기도 제가 해서 걔가 그걸 사러 갔나 싶어 가지고 인근 가게에 다 전화 돌려 봤는데. 방문 포장 하러 온 사람 없었대요. 날이 춥고 어두워서 이 시간엔 거의 배달이라고…….
“인상착의 이야기해 봤어요?”
- 당연히 했죠. 절 뭘로 보시고. 차영이 되게 멀끔하게 잘생겼잖아요. 그런 얼굴을 사람들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어요. 아무래도 골목에 차 대 놨다더니 차가 없는 게 도로 갔나 싶은데.
“아뇨. 이차영 본인 차 안 타고 갔어요. 몰고 간 차 위치는 거기로 잡힙니다. 혹시 골목에 못 보던 검은색 벤츠 있어요? 7955.”
건너편에서 밭은 숨소리와 함께 길을 거니는 듯한 지면 마찰음이 함께 들렸다.
- 있어요! 가로등 앞에! 이거, 이 비싼 거 타고 왔다고요? 얘 차 아닌데…… 잠깐만요. 그럼 얜 본인 타고 온 차만 두고 어딜 간 거예요? 한 기장님이 직접 이 시간에 저한테 전화하신 거 보면 차영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죠. 그렇죠.
“이봐, 일단 침착하고. 정신 사나워. 꼭 해야 할 말만 합시다.”
사실 진짜 침착해야 할 건 자신이라, 일부러 제 마음을 다잡듯이 말로 내뱉으며 호흡을 골랐다. 심장이 점점 더 가속도를 붙여 뛰는 것이 느껴졌다. 별반 도움은 안 되는 듯했다.
“구도윤 씨. 주변에 혹시 떨어뜨린 물건 같은 거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휴대폰이나.”
- 어……. 아무것도 없어요. 어떡해요. 무슨 일이지? 걔가 이 주변에 뭐…… 갈 데가 없는데. 부모님 사시는 주택지라 동네 조용하고 가게도 이 시간이면 셔터 다 내리거든요. 한 기장님은 따로 짐작 가는 데라도 있으세요? 없으시면 경찰에 신고할까요? 느낌이 이상해요.
마찬가지다.
태주는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이마마저 좁혔다. 실은 차영의 부재를 알게 되자마자 짐작이 간 곳이 있었다.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그를 데려오라고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보일 터다. 아니길 바라지만, 아마 제 추측이 맞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언젠가 외할아버지가 제게 했던 명료하고 섬뜩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너한테 복종하고 기어들어 올 시간을 주고 있는 거다. 너를 길들이고 있다는 의미야.〉
제 외할아버지는 이번 일을 계기로 확실히 태주의 숨통을 조일 셈인 듯했다. 그리고 이게 문 회장이 둘 수 있었던 가장 악수였음은 분명했다.
조금 전 자신이 백은관에 들렀을 때. 이런 상황이면서도 그는 한 마디를 하지 않은 것이다.
상태이 이 지경이 됐는데 이 굴욕을 참고 넘길 만큼 자신은 도덕적인 성인군자가 아니다.
태주는 이 치욕과 분노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저기, 한 기장님?
“성인 남자 없어진 지 몇 시간 됐다고. 경찰이 실종 신고 안 받아 줍니다.”
- 그러면 어떡…… 어떡하죠?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진짜요? 차영이 괜찮은 거죠?
“괜찮길 바라야죠.”
가장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그 누구보다 태주가 바라고 있는 바였다. 제게서 차영까지 빼앗아 간다면 정말이지 문 회장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폭주해서 어떤 짓을 저지르게 될지, 자신조차도 흐렸다.
젠장. 그 차를 타고 가라고 하는 게 아닌데.
무엇을 타고 갔어도 문 회장이 그를 낚고자 한 이상 결과는 같았겠지만 태주는 왠지 자신이 앞서서 차영을 사지로 몬 듯한 죄책감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일단 차영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가능한 한 냉정해야 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냈다. 그러고는 화면에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고유 주소를 통화 중인 이에게 전송했다. 윤 원장과 일을 도모하면서 이런 일에 쓰일 것을 대비해 제 보유 차량들에 각각 추적기를 설치해 둔 것이었는데 정말로 요긴한 쓰임새가 생기게 되자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망했다.
- 여보세요? 한 기장님! 들리세요?
“잘 들립니다. 방금 구도윤 씨 휴대폰으로 내가 탄 차 위치 추적 소스를 보냈어요. 인터넷 연결되는 곳에서 프로그램 연결하면 실시간 GPS 확인할 수 있는데, 만에 하나 내가 한 시간에 한 번씩 연락이 없으면 마지막 위치 인근 경찰서에 연락해서 그 주변 찾아 달라고 해요.”
- 차를요?
“흑진주색 마세라티고 차량 번호는 8200. 아마 그 차 위치 반경 수십 미터 이내 샅샅이 수색하면 차영이 있는 곳이 나올 거예요.”
- 경찰에요? 그러면 지금 한 기장님이 차영이 찾으러 가시는 거예요?
“네, 그러려고요. 꼭 좀 부탁할게요.”
- 그런데 왜 한 기장님이 연락이 안 되면 차영이를 찾을 수 있는 건데요?
꽤 예리한 질문이었지만 태주는 이 물음에 답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한 말 까먹지 말고, 자지도 말고 내 전화 기다려요. 다시 연락드리죠.”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고 룸미러를 힐끗 살폈다. 아까 도로로 진입했을 때부터 쫓아오는 차량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착각이 아닌 듯했다. 순간 짜증이 미친 듯이 치밀어 오른 태주가 힘껏 경적을 울리고는 난폭 운전을 감행했다. 이곳저곳을 들이받을 듯이 광폭하리만큼 험하게 차를 몰자 주변 차량들이 하나둘씩 놀라서 그를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태주의 차가 있는 차선은 거칠 게 없었다. 반면 옆과 뒤쪽은 모두 차량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재빨리 신호를 무시하고 속도를 높인 그가 자신을 쫓던 차량을 결국 따돌렸다.
힐끗 룸미러로 뒤쪽을 살핀 그의 얼굴 표정은 딱딱했다. 굳은 의지를 담고 있었다.
마치 위험한 불구덩이에 자발적으로 몸을 던지기라도 할 듯 결연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