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백은관」이라는 이름의 대영 그룹 영빈관은 마치 예스러운 궁궐처럼, 보기에 우아한 맛이 있었다. 지을 때 처마 끄트머리 하나하나까지 정성을 들여 놓은 듯 둥그런 모양의 도리 밖 부분마저 기품이 있었다.
이 건물의 내부는 꼭 풍등 축제에 온 것처럼 사방에 전등이 밝게 켜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무척 고요했다.
정적이 흐르는 안의 복도를 태주가 거닐었다. 그는 이곳에 처음 오는 것이었으나, 문 회장이 이곳에 방문할 때마다 쓰는 전용 객실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상석이 가장 안쪽 자리이듯, 제일 높은 사람이 머무는 곳은 으레 깊숙한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객실 문 바로 앞에는 익숙한 얼굴의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 안 실장이 버티고 있는 게 보였다.
“도련님?”
일단 문 앞에 멈춰 선 태주는 판판한 문에 제 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 직원들이 이렇게 바짝 가까이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저 안에 중문이 따로 있고, 문 회장과 손님은 그 안에서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가 문을 직접 열려는 사이, 안 실장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도련님, 안 됩니다.”
그러자 태주가 상대의 미간을 제 검지로 오만하게 쿡, 쿡 찔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회장님께선 안에서 지금 정부 부처의 관계자와 독대 중이십니다. 무척 중요한 자리입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비켜.”
“도련님.”
“지금 내가 한 말은 명령이니까, 안 실장이 계속 내 앞을 이렇게 가로막고 있으면 그건 항명이겠네. 그렇죠?”
안 실장의 옆에 서 있던 비서들이 겁먹은 눈길로 태주를 올려다봤다. 안 실장만이 이런 대치 상황이 익숙한 듯 초연했다. 그리고 태주는 이쯤에서 너그럽게 상대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지 이유부터 말씀을…….”
“윤 원장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난 그 사람이 왜 사라졌는지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순간, 날카로운 안 실장의 시선이 태주를 서늘하게 쏘아봤다.
“그건 회장님께 여쭤보셔도 대답을 들으실 수 없을 겁니다.”
“들을 수 있을지 말지는 부딪쳐 본 다음 판단하죠. 비켜요.”
“도련님.”
“참고로 나는 외할아버지보다 성격이 더 지랄 같아서 그 양반도 두 번씩 주는 기회를 딱 한 번밖에 안 줍니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서 있을 거예요? 나 이제 곧 문 회장 아들인데. 안타깝게도 내가 기분 나빴던 걸 차곡차곡 적립해 두는 스타일이라서. 당신 나 감당 안 될걸.”
동시에 태주의 차가운 시선이 안 실장의 덤덤한 눈동자에 정통으로 향했다. 차분히 숨을 몰아쉰 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태주를 상대로는 그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느 틈에 손잡이를 덥석 쥔 태주가 문을 벌컥 열었다. 뒤에서 수행 비서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그는 무시했다. 평소 가장 끔찍해하는 문 회장의 그를 향한 애정은 역설적으로 항상 그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 주었다. 그게 참혹하리만큼 진저리 났고, 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끌어들여 방패막이로 쓰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안으로 입성하자, 역시나 정면에 굳게 닫힌 중문이 있었다. 그는 그곳까지 한걸음에 걸어가 그것마저 벌컥 열어젖혔다.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대화를 하고 있던 노인 두 사람이 한꺼번에 그를 쳐다봤다.
“아니, 아드님이 아니십니까.”
정부 부처의 관계자가 태주의 외할아버지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문 회장은 겸연쩍다는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이거 실례가 많습니다. 늦은 시간에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아닙니다. 마침 우리 이야기도 끝나 가는 수순 아니었습니까. 아무래도 아드님한테 급한 용무가 있으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죠.”
“민망하게 됐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조만간 다시 뵙는 걸로 하지요. 오늘 독대 허락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공손하게 예의를 차린 상대가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태주에게도 간단하게 묵례를 하고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때까지도 태주는 가만히 그곳에 서 있었다. 문 회장도 그 자리에 달라붙기라도 한 양 움직임 하나 없이 버틴 채였다. 드르륵. 이윽고 바깥에서 중문과 출입문이 연이어 닫힌 뒤라야 문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태주에게로 망설임 없이 다가와 손찌검까지 불사했다.
철썩! 자신보다 키가 큰 태주의 뺨을 힘껏 갈겨 버린 그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대를 연이어 때리려고 할 즈음, 태주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이 녀석이……!”
풍채 좋은 외할아버지의 단단한 팔뚝을 붙든 태주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칫 엇나갔다가 당장 제 눈앞 노인의 멱살이라도 쥐고서 흠씬 때려눕히고 만신창이로 만들게 될 것 같았다. 자신은 잘 단련된 데다 제 외할아버지에 비해 두 세대나 어린 터라 분명한 완력의 차이가 있었다. 부들부들 흔들리는 손으로 붙들고 있던 팔뚝을 힘껏 뿌리치자, 문 회장이 휘청거리다가 벽을 짚으면서 겨우 제 몸을 지탱했다.
화를 참지 못한 문 회장이 다시금 손을 뻗은 바로 그때. 태주가 그의 멱살을 확, 쥐었다.
“이거 놓지 못해! 네가 정신이 단단히 나갔구나!”
그러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 회장을 벽면으로 밀어붙였다. 터억. 벽에 등을 부딪친 문 회장이 금수의 왕 같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쏘아봤다.
“태주 너, 이러고도 후회 안 하겠니?”
“보세요.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죠. 그러니까 우리 평화롭게 말로 해결하자고요. 외할아버진 완력으로 저 못 이겨요.”
“시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이러고도 네가……!”
“그리고 제가 외할아버지를 치기 시작하면 여기서 두 다리로 걸어서는 못 나가세요.”
“…….”
“함부로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한 번은 맞아 드렸어요. 두 번째부턴 이거 그린 라이트로 알게요. 참고로 제가 생각보다 힘이 세거든요.”
그가 문 회장의 팔을 쥔 손아귀를 마치 더러운 것이 묻은 양 신경질적으로 털어 냈다. 포박에서 풀려난 노인은 잠시 비틀거리면서 숨을 고르긴 했지만 놀랍게도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표정이 바뀌지는 않았다. 어떤 순간이 와도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이기는 법이라고 평생을 거쳐 익혀 왔기 때문일 터였다.
“용건이 뭐냐. 이 시간에 찾아와서 큰 공사를 방해했으면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윤 원장 어디 있어요. 어디 보내셨어요!”
“난 내 뒤에 칼 꽂을 놈들한테는 자비가 없다.”
“또 죽이시게요? 당신 마음에 안 드는 사람 그렇게 하나씩 제거하면 누가 남긴 남아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넌 신경 끄고 네 일이나 하면 돼.”
“어디다 뒀어요!”
“둘이서 뭘 하려고.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너희가 공표하는 걸로 뭐가 바뀔 것 같아? 전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세상은 쳇바퀴 돌듯 다시 돌아가고 나는 내 자리에서, 너는 네 자리에서 또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게 될 거야. 그게 내가 가진 힘이다.”
내심 문 회장 쪽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모두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짐작은 했다. 문 회장이 풀어 놓은 끄나풀들은 아무리 인기척을 능란하게 숨기고 있어도 주시하는 듯한 관찰자의 시선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태주는 때때로 자신을 집요하게 좇는 듯한 보이지 않는 눈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달리기 위해 두 다리를 뻗었다, 그랬다고 믿었는데, 애초에 발목이 묶여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이토록 태주를 좌절하게 만든 그것을 문 회장은 본인이 지닌 힘이라고 말한다.
자신도 이럴진대, 차영이 진짜 적이 그라는 것을 알게 되고 무기력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 그래도 버거울 그를 자신까지 골치 아프게 만들면서 밀어붙이지 말 걸 그랬다.
“윤 원장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 불참할 거야. 그리고 그 기자들은 네가 나와 달라고 요청한 자리에 나오게 되지만 이런 기사를 싣게 되겠지. 한 종합 병원의 원장이 나흘째 실종됐다.”
“그 죄 어떻게 다 받으려고 이러세요.”
“그런 건 내세를 믿는 사람이나 하는 말 아니냐. 난 후회 없이 살다 죽을 거란다.”
“외할아버지!”
태주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문 회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힐난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지긋이 노려봤다.
“윤 박사는 그냥 미끼를 던진 거야. 필요할 때 얻을 건 다 얻고, 젊은 시절 취할 건 전부 취하고, 이제 늘그막에 마음 하나 편해지자고 어리숙한 널 이용하려는 거라고. 그리고 넌 그걸 생각도 없이 물었다. 이렇게 미련하고 즉흥적일 수가. 널 대체 어디부터 가르쳐야 돼!”
“당신 같은 인간한테 뭘 배워요. 권력으로 사람 겁박하는 방법? 하청 업체 쥐어짜는 능력? 그러다가 사위와 손자가 마음에 안 드니 죽이라고 사주나 하겠죠! 제가 진짜 그렇게 쓰레기처럼 살길 원하세요? 당신이 너무 끔찍해요.”
두 사람은 첨예하게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태주의 눈동자에 증오심이 가득했다. 그걸 보며 무척 못마땅한 듯이 눈썹 사이를 구긴 문 회장이 눅눅한 날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캠코더는 당장 제자리에 가져다 놔라. 그건 네 엄마가 처음으로 직접 번 돈으로 마련했던 선물이야. 너한텐 낡은 고물이겠지만 나한테는 아주 귀한 물건이다. 영상이 필요하다면 따로 복사를 해 둔 파일이 있으니 그걸 가져가. 돌려놓는다면 윤 원장도 제집으로 데려다 놔 주지.”
“총은요. 대체 그건 왜 아직도 가지고 계셨던 겁니까.”
“그건 널 위해서다. 나는 네가 날 죽을 때까지 미워하고, 또 두려워하길 바란다. 그런 대상이 있어야 사람은 욕심을 가지게 되는 법이거든.”
“뭐라고요?”
“네가 나를 짓밟기 위해 내 위치를 뛰어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동기 부여라고 부르지.”
“외할아버지!”
“두 물건 다 제자리에 돌려놔. 둘 다 내가 죽을 때 물려주마.”
하늘 아래 거칠 것도, 무서운 것도 없는 문 회장이 그 손바닥만 한 기계 따위들을 직접 수거하지 못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아닐 터다. 여의치 않은 경우 태주를 어디 가둬 두고 그의 주변을 샅샅이 뒤지면 한나절, 어쩌면 반나절만 있어도 족히 찾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는 이 거래를 통해서 자신을 가르치고자 하는 게 분명했다. 정확히 무엇을 배우게 하고 싶은 것인지는 태주도 알 수 없었다. 본인이 지닌 권력의 크기를 알려 주려는 심산일 수도 있었고, 그의 말마따나 태주에게 두려움을 새삼 일깨워 주며 동기 부여를 하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태주는 아직 자신이 외할아버지의 손바닥 안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무턱대고 흥분하며 상대를 자극하는 건 지금 이 순간 상책이 아니었다. 최대한 화를 억누른 태주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