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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03화 (103/144)

103화

골목은 가로등으로 환했다. 늦은 시간인지라 길 양쪽의 주택들은 저마다 불빛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차영 혼자였다.

어두운 밤, 늦은 시간에 길을 가는 여자들이 종종 느끼곤 한다는 어떤 두려움이 차영의 뇌리에도 파고들었다. 그는 괜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누군가 뒤를 바짝 뒤쫓아 오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 도윤의 집 쪽만 힐끗거리던 차영은 누군가 제 옆을 쑥 지나가는 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다시 보니 이미 사람은 그를 스쳐 간 뒤였다. 조깅을 하는 것 같았다.

“하…….”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정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차영이 마침내 모퉁이를 돌던 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재빠른 물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 숨을 몰아쉬었다.

“헉…….”

어른의 팔뚝만 한 비글이 차영을 보고는 ‘멍’ 하고 짖으며 힘차게 뛰어갔다. 애완견을 산책시키고 있는 듯하던 견주는 당황한 차영을 발견하고 미안하다는 양 눈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강아지를 뒤따라 그를 지나쳐 갔다.

괜히 놀랐네.

아까 주차장에서 헤어질 때 태주가 했던 말들 때문에 괜히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는 건가 싶어졌다. 겨우 정신을 다잡은 차영이 환하게 불이 켜진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손님은 자신뿐이었다. 평소 도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들을 한가득 꺼내 들고, 다른 종류의 주전부리들도 몇 개씩 바구니에 담아 넣었다. 그러고는 계산을 하는데, 바코드를 찍는 아르바이트생의 어깨 너머로 유리창 밖에서 검은색 물체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저게 뭐지?’

고개를 갸웃한 차영은 좀 더 창밖을 자세히 내다보고자 했으나, 어느 틈에 계산을 마친 점원이 봉투를 내미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카드로 결제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차영은 괜히 편의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잘못 본 모양인지 조금 전 스치듯 발견했던 검은 물체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도 공포가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차영은 빵빵한 봉투를 손에 꽉 쥔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빨리 가자. 빨리…….”

그는 혼잣말을 나직이 읊조리며 보폭을 크게 해 한 걸음씩 떼기 시작했다. 골목 어귀를 돌기 직전, 그렇게 멀지 않은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또 사람일까.

설상가상으로 조금씩 소리가 가까워졌다.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등 뒤에 누군가 있었다. 조금 전처럼 조깅을 하거나,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는 주민들일 수도 있었다. 하나 그 두 가지의 경우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인물이 한 사람이 아닌 듯하다는 것이다.

불안이 가중되니 뒤를 돌아볼 용기도 안 났다. 침만 꿀꺽 삼킨 차영은 겁에 질린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여차하면 한태주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납작한 기계를 만지작거렸다. 왜 경찰이나 인근에 있는 도윤이 아니라 그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오직 그가 생각났다.

점점 차영의 걸음이 빨라졌다. 뒤에서 쫓는 듯한 이들의 걸음도 마찬가지였다. 제 것에 비해 소리가 작았으나, 분명하게 존재했다.

안 되겠다.

입술을 질끈 깨문 차영이 이제부터 빠르게 달릴 작정으로 발돋움을 하면서 꼭 쥐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뒤쪽으로 확, 내던졌다.

‘퍼억!’ 누군가의 몸을 맞고 아이스크림 따위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사람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느닷없이 물건을 던졌다고 욕을 하는 게 정상인데 그러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유추가 됐다. 저들은 지금 자신을 쫓는 것이다.

“젠장.”

차영은 미친 듯이 뛰었다. 대관절 어느 쪽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치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윤의 집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순간의 그릇된 판단으로 방향을 잘못 트는 바람에 삽시간에 멀어졌다.

타닥타닥. 뒤쪽에서 세 명, 혹은 네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두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울 시간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달아나야 했다.

굽이굽이 진 골목길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어서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는데 가장 최악의 결말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헉, 허억……!”

막다른 길이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차영은 무척 아연해졌다. 태주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절로 재생됐다.

<그러지 않으려고 이렇게 하자는 거야.>

“허억……. 그러지 않으려고 이렇게 하자는 거라며…….”

턱이 덜덜 떨렸다. 어슴푸레한 가로등이 벽을 비추고 있었다. 차영의 검은 그림자 위로 서너 개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는 그제야 겨우 뒤편을 돌아보았다. 씨근덕대며 헐떡이느라 어깨가 들썩이는 자신과 달리,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세 명의 검은 정장 차림 남자가 자신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당신들 깡패야?”

버럭 소리치는 순간, 또다시 태주의 음성이 제야의 종소리처럼 뇌리에서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말했지. 네가 믿어야 할 건 나라고. 나밖에 없다고.>

나쁜 새끼.

그는 끝까지 거짓말이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니까!”

차영은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다 인근에 가구들이 적지만 있으니 목청을 높여 도와 달라는 구조 요청을 하면 아주 조금이나마 승산이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심호흡을 한 그가 입을 크게 벌렸다.

바로 그때였다.

“제발 살려 주……! 읍! 으읍!”

확, 치타처럼 그에게 달려든 남자가 차영의 입을 틀어막고 마른 몸을 순식간에 덮쳤다.

“아윽……! 읍!”

이윽고 한 사람이 더 달라붙었다. 덩치가 큰 두 남자가 차영을 양쪽에서 결박했다.

“다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얌전히 가시는 게 서로에게 좋습니다.”

양옆 남자의 수장인 듯 보이는 정면의 남자가 차영에게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 음성이 어떤 공포 영화보다 무서웠다.

차영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슬픔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로 눈물샘이 제 기능을 충실히 해 금세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는 어떻게든 더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입이 틀어막혀 있어 쉽지가 않았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몸부림뿐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면서 자신을 제압한 남자들을 팔꿈치로 난타했다. 아울러 다리로 걷어차고, 제 입을 막은 맨살 위를 깨물기도 서슴지 않았다. 다치게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은 진실이었던 모양인지 양쪽 남자로부터 보복성으로 되돌아오는 어떤 폭행도 없었다.

이대로 어쩌면, 정말 천운이 따르면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차영이 신의 가호를 바라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남자들을 뿌리치려던 찰나였다.

끼익. 검은색 세단이 좁은 골목길의 초입을 완전히 가로막듯이 주차하는 게 보였다.

“차가 왔군요. 이제 가시죠.”

“읍, 으읍……! 읍!”

싫다는 양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항하자, 정면에 서 있던 수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부하들에게 턱짓했다. 그 순간 극한의 공포를 느낀 차영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것 같았다. 차영의 오른편 남자가 그의 몸을 완전히 포박했다. 뒤이어 왼편에 있던 남자가 차영의 여며진 코트를 걷어 내더니, 복부를 ‘뻑’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쳤다. 단단한 주먹이 배 위에 꽂힌 순간 차영은 먹히는 비명을 내질렀다.

“우욱!”

그뿐만 아니었다. 급소를 친 남자는 차영을 무력하게 만든 다음 그의 귓불 아래쪽 피부에 뭔가를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끄트머리는 주사기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순간 차영은 이게 아주 익숙한 납치 방식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남자의 행동이 그때처럼 꽤나 일사불란하고 재빨랐다.

안 돼.

안 돼!

다만 차영이 이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게 좋게 가시자니까요.”

“윽, 읏…….”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의 바르작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마침내 차영의 고개가 아래로 축 처졌다. 어설프게 걸치고 있던 머플러가 땅으로 추락했다. 동시에 오른편에 있던 남자가 그를 둘러업자, 통이 큰 코트 주머니에서 차 키와 휴대폰이 떨어졌다. 왼편의 사람이 그것들을 전부 주웠다.

때마침 전화가 오는 모양인지 휴대폰이 진동했으나, 그는 그것을 묵묵히 제 수장에게 넘길 따름이었다. 기계를 챙겨 든 남자가 수고했다는 듯 부하들의 등을 두드렸다.

“괜히 시간을 많이 낭비했어. 어르신이 기다리신다. 이만 가지.”

드르륵. 이윽고 차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음험하게 골목을 울려 퍼졌다. 묵직한 배기음을 내며 검은색 차량이 출발했다.

차영이 사라진 골목 어귀는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었냐는 듯, 다시금 겨울의 쓸쓸한 고요함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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