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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02화 (102/144)

102화

“왜 이래?”

순간 차영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으나 그는 어떤 의미 있는 반응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을 하고 전화를 받을 따름이었다.

“네, 한태주입니다.”

- 태주니? 나 윤정훈 원장 와이프인데, 기억하지? 우리 한 20년 만인가? 더 됐나…….

나지막하게 숨을 내쉰 그는 차영의 손목을 붙잡은 제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절박한 촉감에서 뜻 모를 불안이 전이됐다. 그래서 차영은 억지로 뿌리치는 대신 일단 얌전히 있었다. 그사이 태주는 침착하게 통화를 이어 나갔다.

“어쩐 일이세요?”

- 저기 지금 좀 중요한 통화 괜찮을까?

“혹시 윤 원장 때문이에요? 지금 연락이 계속 안 돼서 집으로 찾아갈까 했거든요.”

- 응. 맞아. 얼마 전에 그이가 이게 태주 네 번호라면서 뜬금없이 알려 주더니 본인이 일러 준 시간마다 규칙적으로 연락이 없으면 너한테 꼭 전화하라고 했었어. 혹시 거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너무 걱정돼서…….

“아주머니, 제가 3분 뒤에 이 번호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태주가 상대에게 일방적인 양해를 구하곤 통화를 종료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차영과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야?”

“너 이 집 말고, 지금 당장 어디 다른 데 묵을 곳 없어?”

“무슨 일이냐니까? 방금 한 기장이 윤 원장 어쩌고 했잖아.”

“정 없으면. 구도윤 씨한테 며칠 신세 좀 지겠다고 해.”

“내가 왜…….”

“설명할 시간 없어. 제발 알았다고 해!”

버럭 소리치는 태주의 눈빛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신경질적인 표정과 짜증스러운 태도였으나 지금의 그가 무척 절박하고, 또 필사적이라는 것은 차영에게도 너무나 잘 전달됐다.

차영이 말을 잃은 사이, 태주는 그의 차 키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제 손아귀에 쥐고 있던 것과 교환하듯 바꿔 주었다.

“갈 때 내 차 타고 가.”

“내 차 두고 왜 이래야 되는데?”

“만에 하나 네 차가 위험할 수도 있어서.”

“한 기장 건 안전하고?”

태주가 체념이 섞인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별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래도 최소한 불에 태우거나 교통사고로 위장하려고 차체를 들이받진 않겠지. 무엇보다 당장은 내가 타 있는 줄 알 테니까. 이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몇 시간 눈속임 정돈 될 거야.”

그의 말대로라면 예의 그 눈속임을 위해 제 차를 타고 갈 한태주는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정확히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차영은 등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 한태주. 잠깐만. 나 좀 이해가…….”

“잠깐 같은 거 없어. 나만 말할 거야. 잘 들어 이차영. 지금부터 넌 한눈팔지 말고 구도윤 씨 집에 최대한 빨리 도착해. 그런 다음 내가 허락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마.”

아주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 때문에 차영은 현실감이 없었다.

“나 그냥 택시 탈게. 한 기장이 본인 차 타.”

“안 돼. 택시 안은 내 통제 구역이 아니잖아. 택시도 불안해. 이거 타.”

“하……. 왜 이러는지, 이러는 원인이 뭔지. 그 설명은 안 해 줄 거야? 나 불안해!”

“미안한데 그건 나중에. 시간이 없어. 여기서 구도윤 씨 집까지 얼마나 걸려? 한 시간? 두 시간?”

“싫다니까!”

“차영아, 제발! 내 말 들어. 얼마나 걸려. 그거나 대답해.”

한태주, 하고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던 차영은 엄정하게 판결을 내리듯 자신을 직시하는 태주와 눈을 마주치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멀어. 걔 쉴 땐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본가로 내려가서.”

“도착해서 전화해, 기다릴 테니까. 그리고 너 가는 길에 연락은 전화보단 메시지로 하고, 통화할 필요가 있으면 차에서 내려서 해. 무조건, 반드시 사람들 많은 곳에서. 내가 왜 이런 말 하는지 이해하지?”

“그래서 넌 내 차 타고 내 대신 들이받히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러지 않으려고 이렇게 하자는 거야. 너랑 달리 난 문 회장을 잘 아니까. 알아야 싸워서 이기지. 나 너무 불안하게 하지 마. 꼭 전화해.”

“한태주. 그래도…….”

“걱정 마. 난 절대 안 다쳐. 말했지. 네가 믿어야 할 건 나라고. 나밖에 없다고.”

“한태주!”

“타.”

숙지해야 할 경고 사항을 한꺼번에 쏟아 내듯 내뱉은 태주는, 억지로 제 차에 차영을 태웠다. 운전석에 앉은 그가 창밖의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안전벨트를 하라는 양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핸들을 붙잡은 차영은 그를 뒤로하고 운전했다.

다른 때였다면 차영도 말을 듣지 않겠다고 억지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태주의 저 반응으로 미루어 뭔가 무서운 일이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기에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가 제 차를 타고 가게 두는 게 맞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에게 전권을 주고 상황을 타개하게 만드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건 알았다. 자신은 걸리적거리는 대신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그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룸미러를 확인한 차영은, 통화를 하고 있는 태주의 모습을 힐끗 살폈다. 불안하지만 그를 보면 한편으로는 안도가 됐는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의 모습이 사라지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급한 대로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도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시간에 갑자기 연락해서 신세를 지겠다는 건 사실 무척 곤란한 부탁이지만 그녀라면 들어줄 것이다.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운전을 하던 차영은 순간 제 턱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진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머플러를 돌려주질 못했다.

차영은 태주가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지게 되자 머플러의 위에 입술과 코를 묻었다. 그의 향기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키스를 못 했더라.

그런 생각을 무심코 하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입을 열면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완전한 겨울이 됐으니 다가올 봄이 기다려져야 했는데, 차영은 미래를 기대하긴커녕 당장 이 살얼음판 위를 어떻게 거닐어야 하는지 하루하루가 벅차기만 했다.

겨우 도착한 도윤의 집 근처 골목에 차를 주차한 차영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자신은 안전하게 도윤의 동네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제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을 한태주가 어떻게 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전화를 할까, 메시지를 보낼까 양단간에 고민을 하고 있다가 완전히 집에 들어간 뒤에 하는 편이 낫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가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도로 밀어 넣으려 하는 순간, 때마침 도윤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뜬 익숙한 이름을 내려다보면서 힐끗 앞쪽의 주택을 살폈다. 늦은 시간인데도 거실에 불이 켜진 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땅에서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이사를 전전할 때도 낮은 층만 고집했던 그인지라, 평범한 단층 전원주택이 참 좋아 보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뱉은 차영이 전화를 받았다.

“응, 도윤아. 나 도착하긴 했는데.”

- 그래? 어딘지 정확히 모를 것 같아서 걸었다. 마중 나가?

“아냐. 골목 어귀야. 방금 주차했어. 너희 집도 보여. 거실 불 켜진 데 맞지?”

- 응, 맞아. 그럼 얼른 들어와! 현관 열어 놨어.

“그런데 진짜 들어가도 돼? 부모님은 뭐라셔? 네 남자 친구한테도 나 오늘 자고 가는 거 미리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가 심각하게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려 하자 도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 야, 방 남아서 내준다는 건데 뭘 그렇게 몸을 사려. 집에 엄마 아빠도 계시고, 다 허락하셨고. 우리 사이에 성별 남녀라고 내외하면 그게 더 웃기지 않냐?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살짝 높아져 있었다. 먼저 도움을 요청한 차영 덕분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차영은 이런 데 인색했다. 신세 같은 건 웬만해선 안 지려 들었다. 곁을 주는 것 같아도 중요한 순간마다 칼같이 굴어서 도윤이 평소에 섭섭해한다는 건 이미 본인과 제 어머니를 통해 여러 번 듣고, 또 눈치도 채고 있던 터였다.

“뭐 먹을 거라도 사 갈까?”

- 치킨 시켜 먹자. 올라올 때 아이스크림만 사 와. 네가 찬 건 겨울에 먹는 게 최고라며. 너 지금 어디에 차 댔는지 모르겠는데 골목 끝에 편의점 있거든?

“아, 나 방금 들어오면서 봤어.”

- 거기에서 사면 돼. 난 방 청소해 놓고 있을게!

“알겠어.”

간단히 통화를 끝낸 차영은 이제야말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다가 안에서 만져지는 차 키를 괜히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태주가 여러 번 만졌던 물건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긴장한 기색으로 제 목을 두른 머플러까지 매만져 보던 차영은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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