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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01화 (101/144)

101화

“결국 탑승교에서 주먹다짐은 네가 먼저 시작했고, 네가 훨씬 더 때렸어.”

“그건 같은 조건에서 싸웠지만 제 완력이 권 기장보다 더 세서 그런 거고요.”

“넌 맞는 말을 하는데 왜 항상 이렇게 기분이 나쁘냐?”

〈맞는 소릴 해도 한 기장처럼 싸가지 없이 하면 들어주기 싫어.〉

그럴지도 모른다.

태주가 차영의 음성을 떠올리며 픽 웃자 권 부기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 쪼개. 어?”

“전 남 인생에 크게 관심 없습니다. 권 기장이 기장 승급을 하든 나중에 인천 공항장이 되든. 잘되시면 그런가 보다 하고 못 되셔도 저랑은 상관없고요. 꿍꿍이 같은 거 품을 만큼 그쪽 삶에 애정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대답이나 하세요. 어쩔 겁니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밥 먹으러 왔는데 계속 남자 둘이 머리 맞대고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요.”

“진짜 보복 인사 같은 건 없는 거지?”

“없습니다. 녹취하셔도 됩니다.”

태주가 힐끗 테이블 아래 휴대폰을 턱짓했다.

“이미 했다. 주말이라고? 시간은 점심쯤이 좋겠네.”

그러자 권 부기장이 감춰 두었던 휴대폰을 태주를 향해 들어 보였다. 너무나 예상 그대로라 그는 픽 웃었다. 속이 너무 어두컴컴한 나머지 아무것도 안 들여다보이는 사람에 비해 이쪽이 훨씬 편하고, 신뢰가 갔다. 우스운 일이었다.

태주가 계약금이라는 듯 본인의 한국 항공 사직서를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권 부기장은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 힐끗 확인하고는 제복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와 동시에 태주는 상다리가 휠 정도로 빼곡하게 차려진 차림을 전부 뒤로하고 일어섰다. 가볍게 묵례한 그는 권 부기장을 두고 그대로 객실을 빠져나왔다.

* * *

매일 밤, 혼자 거실의 벽에 서게 되면 으레 드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더 이상 개수가 채워지지 않고 있는 이 마그넷 판을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다.

‘스무 개가 넘네.’

괜히 마그넷 위를 손으로 더듬어 보던 차영은, 역시 이번에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게 됐다.

모니터 전원을 켜 놓은 텔레비전에선 오늘의 주요 기사들을 전달해 주고 있어서,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째 태주의 관한 이야기도 종종 들렸다. 다른 매개체도 아니고 공중파 저녁 뉴스를 통해 그의 소식을 이따금 전해 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했던 일이었다.

태주와 사귀면서 알게 됐던 것들보다, 요사이 알게 된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했다. 그가 앞으로 상속받게 될 대영 그룹의 계열사 지분은 그 총액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부터, 여태 무슨 학교를 얼마 만에 졸업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조종사로서의 평판은 어떤지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기본 정보들을 꽤나 많이 습득하게 됐다.

[……뒤늦게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대영 한국 항공 측은…….]

차영은 장례식장에서 찍힌 태주의 사진이 자료 화면으로 등장하자마자 텔레비전 화면을 꺼 버렸다. 그의 소식이 자꾸만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꽤 오래전에 기내에서 승객을 묶어 두었던 사건의 책임 기장이 그라는 사실도 다시금 회자되고 있는 것 같았다.

승객 쪽에서 먼저 승무원과 다른 승객들을 폭행했던 분명한 현장 증거가 남아 있던 터라, 그가 기내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는 의견과 그래도 대응이 너무 감정적이고 과했다는 의견들로 갈리는 듯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태주가 한 기업을 이끌 수장으로서 적합한지 자질 논란이 연일 불거졌다.

머릿속에서 태주를 비우고자 노력했지만 너무 가까이에 그가 있어서 쉽지 않았다. 무심코 그를 생각하던 차영은 거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쌀쌀한 겨울의 바람이 전신을 단단히 휘감았다. 그럼에도 차영은 테라스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저 안에 태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7층은 잠잠했다. 뒤를 돌아보니 주차장의 차량들도 얌전히 주차되어 있었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차영은 창가 문단속을 하고 겉옷과 차 키를 챙겨 들었다. 마음속이 스산해서 가까운 곳을 차로 한 바퀴 돌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제 차 키 옆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태주의 집 카드 키를 눈에 담게 됐다. 이것도 매일 출퇴근길에 보게 될 때마다 언제쯤 돌려주어야 하나, 갈등에 빠지게 만드는 물건이었다. 거실 한편의 마그넷들처럼 말이다.

〈내 주위에 너 말곤 아무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전부 되어 주겠다고 했던 건 너잖아!〉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위로부터 내려온 악연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전우였다. 자신이 나약해서 문 회장에게 차마 갚아 줄 수 없는 울분을 그에게 풀고 있다는 것도 맞았다. 차영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점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태도가 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차영은 빠르게 문을 닫고 집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데 때마침 승강기가 아가리를 벌려 사람을 토해 냈다. 계속 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던 태주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태주는 제복 차림이 아닌 데다 캐리어도 없었다. 아무래도 운항 일정으로 외출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조금 전 저녁 뉴스를 본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던 차영이 침묵한 채로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묘하게 안색이 핏기 없이 파리해져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응당 지칠 만도 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앞으로는 도처에 이보다 더 그를 지치게 할 일들투성이일 터다.

누군가에게는 매일이 크리스마스라던데, 한태주에겐 매일이 악몽일지도 모른다.

“저기, 한 기장.”

망설임 끝에 차영이 어렵사리 그를 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태주 쪽에서 차영을 먼저 무시하고 지나치려 들었다. 왜였는지는 모르겠다. 한 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는데도 차영은 재차 그를 황급히 불러 세웠다.

“한 기장, 내 목소리 안 들려? 이 시간에 어딜 가는데.”

빠르게 걷던 태주가 우뚝 멈춰 섰다.

“신경 끄고 너 갈 길이나 가.”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려고 하기에, 차영이 빠르게 걸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왜 갑자기 나한테 차가워? 뭘 잘했다고?”

“너도 하루아침에 나한테 차가워졌어.”

“진짜 적반하장도…… 나랑 같아?”

“달라. 그런데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나 원래 제멋대로인 거 잊었어? 비켜.”

“카드 키 가져가.”

그때까지 차영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던 태주가, 그제야 시선을 끌어 내렸다.

“왜 그걸 내가 가져가?”

“원래 한 기장 거니까.”

“난 너 준 거야. 그 순간부터 내 손 떠났어. 네가 안 쓸 거면 버려.”

“못 버리겠으니까 그렇지.”

“날 못 버리겠는 거겠지. 좀 솔직해지는 편이 낫지 않아?”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괜히 붙잡았다. 카드 키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대로 주차장으로 빠져나간 차영이 제 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러나 뒤쫓아 온 태주가 강제로 문을 닫고 차영의 어깨를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우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아직 늦은 밤이 아닌 터라 주차장 입구 쪽에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멀리서 보면 대화 소리는 안 들리고 다투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차영이 뿌리치려 했는데, 그는 완강하게 버텼다. 어깻죽지를 꽉 붙들고 있는 악력이 지나치리만큼 너무 세서 상체가 죄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저기 사람들 있는 거 안 보여? 놔.”

“이차영, 내가 빌어도 나는 안 돼? 다 포기하고 너랑 있겠다고 해도 안 돼? 평생 그 집 문턱은 드나들지도 않을 거야. 그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꼭 날 버려야 속이 시원해?”

“놓고 얘기해. 아파!”

억눌린 분노로 흔들리던 태주의 눈동자가 천천히 제 색을 되찾았다. 차영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압통을 호소하자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았다. 그가 깊은숨을 몰아쉬다가, 차영을 놓아주었다. 차영이 제 팔을 살짝 움직여 가면서 통증을 완화시키는 동안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태주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벗어 허전한 목에 둘러 주었다.

“이런 거 필요 없어. 차로 갈 거야.”

“집에서 차까지 이렇게 짧은 거리라도 맨살 드러내고 왔다 갔다 하면 추워. 감기 걸려. 이것도 난 너 준 거야. 필요 없으면 이따 집에 가서 버려.”

“한 기장.”

“갈 길 가라. 나도 갈 데 있어.”

차에 타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양 그가 한 걸음을 물러섰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 오는 모양이었다. 태주는 바로 옆에 세워 둔 제 차 쪽으로 향했다. 차영은 태주가 자신을 등진 사이 그가 둘러 준 채도가 낮은 회색 머플러를 도로 풀어내려 했다.

그에게 그것을 돌려주고 차에 탑승하려고 했으나 강제로 다시 붙들리는 바람에 어떤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고 실패했다. 심각한 표정의 태주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차영에게로 다가와 손목을 단단히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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