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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100화 (100/144)

100화

살짝 눈인사한 뒤 가려는 태주의 발목을 윤 원장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붙잡으려 들었다.

“태주야, 이런다고 뭐가 바뀔까?”

“아저씨가 앞으로 두 다리 뻗고 주무실 수 있겠죠.”

“너는?”

“아버지 앞에 떳떳할 수 있어요. 늘 나만 구차하게 살아남은 것 같아서 미안했거든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때 자신이 문 회장에게 했던 그 말과 그 순간의 굴욕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네 아버지가 그 말을 들으면 엄청 화내겠다. 넌 아무 잘못도 없어.”

“그쪽 같은 비겁한 인간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비위 상해요.”

태주의 힐난 섞인 대꾸 후에 이어지는 응답은 없었다. 윤 원장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일에 엄청난 반향은 없을지도 모른다. 전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도 컸다. 도리어 역공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 공론화는 모든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긴 했다. 특히 차영과 그의 어머니에게 약간의 속죄 정도는 될 수 있을 터다. 진실을 알게 되는 일이니 말이다.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특별한 끝맺음 없이 제 갈 길을 갔다.

그리고 태주가 뚜벅뚜벅 걸어 나간 산책로 한 귀퉁이에, 윤 원장은 아주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 *

공항 인근 한 조용한 일식 요리집의 내부에는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이제 난방 장치를 가동하지 않고서는 날씨를 버티기가 쉽지 않은 계절이 본격적으로 도래했다. 안과 밖의 온도 차가 워낙 심해서 커다란 유리창에는 자꾸 김이 서리고 성에가 생겼다.

이곳은 공항 근처에 있는 몇 안 되는 고급 식당이라 기장들이 회포를 풀기 위해 가끔 출입하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제복 차림의 태주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바깥에서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던 인사였다. 태주가 몰래 회동을 요청하자 그쪽도 퍽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가 가진 권위에 억지로 이끌려 온 것일 수도 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태주의 것과 똑같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입성했다.

“한 기장 먼저 와 있었네?”

태주보다 나이는 지긋하게 들었으나, 어깨의 견장은 그보다 한 줄이 모자란 세 줄이었다. 남자는 모자를 벗고 태주의 앞에 우뚝 섰다.

“오셨습니까, 권 기장님.”

“귀하신 분이 나를 이런 식당에는 왜 불렀을까?”

“일단 앉으시죠. 괜히 올려다보게 하지 마시고.”

서로를 못마땅하게 직시하고 있던 그들은 각자 필요에 의해 시선을 옮겼다. 권 부기장이 자리에 앉으면서 제 앞에 이미 풍성하게 차려진 값비싼 회들을 주시했다. 그러면 태주가 따뜻하게 데운 술을 그의 앞에 놓인 잔에 차분히 따랐다. 여태까지 태주가 조종석 안과 밖에서 보였던 권위적인 태도와는 다른 꽤 정중한 손짓이었다.

“징계 이후 처음 뵙나요? 저랑 권 기장님 운항 일정이 잘 안 겹치는군요.”

“운항 팀장도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우릴 같이 붙이려고 하진 않겠지.”

“그런가요?”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아. 칵핏 외부에서도 직급에 따라 존대 써야 하나? 아니면 한 기장이 한국 항공 물려받을 도련님이니까?”

“이래서 꼰대들이 싫다니까. 그냥 쫄리면 쫄린다, 쪽팔리면 쪽팔린다고 말을 하세요. 쓸데없이 센 척하지 말고. 어깨에 힘주면 떡이라도 나옵니까?”

확 열이 오른 권 부기장이 제 어깨를 움찔했다. 태주는 동요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날 왜 불렀어.”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내가 너 때문에 무슨 꼴을 당했는데. 맛이라도 간 거 아니야?”

“‘너 때문에’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제 대응은 원칙하에 이루어졌던 거고, 그 기준이 좀 까다로웠을 뿐이죠. 모든 원인 제공은 권 기장께서 하셨습니다.”

“야, 한태주!”

그가 버럭 소리쳤지만 태주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저도 피차 감정은 안 좋습니다. 괜히 사내 게시판에 유언비어나 퍼트리시고. 저 한국 항공 입장에서 낙하산은 맞는데 경력상 따로 눈탱이 치고 들어온 건 없어요. 민항기 조종사 최소 비행 요구 시간 충족했습니다. 운항에 필요한 면장도 모두 보유하고 있고. 건강 상태도 무척 양호하고요.”

“너 이런 이야기 하자고 불렀냐? 왜, 이번엔 그거 핑계로 감봉으로도 모자라 아주 자르게?”

“겨우 그걸로 직원을 어떻게 잘라요. 그런 거 아닙니다. 권 기장 저 꼴 보기 싫어하시죠. 제 사직서 드리겠습니다. 기장 은퇴하시면 한국 항공 기념 재단에 자리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뭐?”

“권 기장이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요.”

지금 들은 말이 실제가 맞는지가 궁금한 듯했다. 어안이 벙벙한 권 부기장이 태주를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태주는 제가 한 말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잠시간 얌전히 있었다.

그사이 태주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물색할 때 윤 원장이 했던 말을 참고삼아 떠올리게 됐다. 안 실장이 차영의 아버지를 선택했을 때의 기준 말이다. 그가 집중한 것은 첫 번째 화두였다.

평범한 사람일 것.

얼핏 권 부기장은 태주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나쁜 선택지라고 판단할 법도 했으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맨 처음 권 부기장과 크게 갈등을 빚었을 때 다른 승무원의 실수를 알면서도 자신이 다 안고 갔던 일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자신이 한국 항공의 유일한 혈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비토했던 상황들을 아울러 떠올렸다. 진짜 냉정하고 욕심만 득시글득시글한 사람이라면 권 부기장은 그때부터 태주에게 주눅이 들어 지금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는 못했으리라. 그가 쉽게 감정에 이끌리는 부분에 기대자는 판단이었다.

“부탁? 무슨 부탁. 네가 왜 나 같은 사람한테 부탁을 해. 무슨 수작이야?”

태주는 이곳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적은 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에게 거짓을 말할 수 있었다. 속일 수도 있었다. 덕분에 어떤 이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권 부기장의 마음만은 확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싫어하는 게 확실한 권 부기장의 마음만이 태주에게 믿을 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권 기장 같은 아저씨한테 왜 수작을 부립니까?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그런 나한테 부탁을 하는 저의가 뭐냐는 얘기야. 너 문 회장 손자라면서.”

“어려운 일 아니에요. 하지만 문 회장은 할 수 없는 일이고요. 그냥 저 좀 도와주시죠.”

권 부기장이 일순 침묵했다. 차가운 시선이 태주를 향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란 게 뭔데? 들어 보고 널 안 보고 사는 일보다 귀찮은 게 더 클 만큼 복잡하거나, 재단에서 준다던 자리보다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면 거절이야.”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남은 건 설득이었다. 권 부기장이 테이블 아래로 휴대폰을 스윽 내리는 모습을 태주가 꼼꼼히 지켜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 상 아래에 걸린 권 부기장 팔뚝의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마 휴대폰 화면의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녹취 중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했지만 태주는 제지하려 들지는 않았다. 도리어 모른 체했다.

“쉽습니다. 다음 주 주말경에 공항 인근에 은밀하게 두어 시간가량 인터뷰를 응할 만한 장소를 좀 마련해 주세요. 언론사에 중요한 제보를 한 가지 할까 하는데, 제가 지금 어딜 가도 쫓아오거나 감시하는 눈이 있는 것 같아서 장소 마련이 쉽지가 않습니다. 짐작이지만 집이나 차에 감청도 당하고 있을 것 같고요.”

“감청? 너 요즘 뉴스에 종종 나오던데, 기자들?”

“아뇨. 뭐……. 거기까지 아실 건 없고. 어쨌든 매일 소지하는 휴대폰 정도만 겨우 사수하고 있는데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뵙자고 했어요.”

“첩보전 찍냐? 퍼스트 듀티에서도 제 외할아버지랑 아주 영화를 찍더니?”

“가끔은 사람 성격 더러워지게 만드는 가족도 있는 법이거든요.”

“이거 나 엿 먹이려고 테스트하고 그러는 거 진짜 아니겠지? 사주 외손자?”

“이 일로 권 기장이 피해를 입어 봤자 업장 노 쇼로 욕먹는 정도밖에 더 됩니까?”

“너한테 음침한 꿍꿍이속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

그가 이렇게 나오면 태주도 할 말은 있었다.

“솔직히 지난번 일도 그쪽에서 먼저 잘못하신 거 맞잖습니까.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지한 순간 바로 대처를 했어야죠. 말하기 불편하다고 해서 모른 척 버티고 있으면 일만 더 커지는 거 모릅니까?”

“…….”

“난 권 기장 프로라고 여기고 있고, 그걸 모른다고도 생각 안 해요. 어린놈이 덤비는 게 열받으니까 뻗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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