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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99화 (99/144)

99화

또다시 언젠가와 같은 장면의 반복이었다.

정기 검진을 핑계로 윤 원장의 병원에 방문한 태주는 제 앞에 도열한 의료진들에게 힐끗 눈길을 던졌다. 윤 원장을 중심으로 하여 부원장과 전문의들이 백색 가운을 입고 나란히 서 있었다. 수개월 전 왔을 때보다 인원이 훨씬 더 늘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이곳은 한국 항공의 제1 협력 병원이고, 자신은 이미 문 회장이 기자 회견을 통해 전국구로 못을 박은 덕분에 명실공히 그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미간을 구긴 태주가 그대로 말없이 나가려는데, 윤 원장이 여느 때처럼 뒤를 따랐다.

“한 기장님. 저랑 같이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이제 외부는 좀 쌀쌀할까요? 원장실보다는 밖을 더 편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끄러미 윤 원장을 돌아본 태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 원장은 두 사람을 뒤쫓아 오던 의사들을 전부 물리고, 혼자서 태주를 건물 바깥으로 안내했다.

중앙 병동 산책로에는 한껏 냉랭해진 공기의 영향으로 거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윤 원장을 알아본 환자와 가족들이 인사를 하면, 그도 귀찮아하는 내색 없이 상냥하게 잘 받아 주었다.

인공 호수가 조성되어 있는 주변은 물기 때문에 온도가 조금 더 낮은 탓인지 산책로 중 가장 고요했다. 주위에 인적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한 윤 원장은 벤치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고는 뒤편의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왔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몸이 안 좋아질 것만 같은 달콤하고도 쓴 커피를 조용히 마셨다. 반쯤 비운 컵을 들고 전방을 주시하던 태주가 순간 어떤 소리를 느끼고 뒤를 확 돌아보았다. 인기척인지, 단순히 바람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눈앞에 사람이 안 보이긴 했으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쪽에 CCTV 없는 거 맞습니까?”

“없다.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

“왜 확신하세요?”

“얼마 전에 점검을 했으니까. 네가 이번 검진 땐 다시 이쪽으로 올 것 같았어.”

납득할 만한 해명에도 태주는 미심쩍어하는 기운을 동공에서 감추지 않았다. 그런 그를 힐끗 관찰한 윤 원장이 부드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태주 너한텐 아직 두려운 게 많구나. 다행이다.”

“기분 나쁘게 에둘러 말하지 마세요.”

“그건 잃을 게 있다는 의미야. 꼭 지켜야 할 것, 소중한 가치. 그런 게 있다는 거지.”

순간 차영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태주는 애써 천천히 지워 냈다. 지금은 최대한 이성을 차리고 냉정하게 판단을 해도 모자란 중차대한 분기점이었다. 괜히 감정적으로 굴게 돼 일을 시작도 하기 전부터 그르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래, 나한테 기회를 줄 마음이 생겼어?”

“윤 원장이 외할아버지 사주받고 절 회유하려는 게 아니란 걸 어떻게 믿죠?”

“아내가 아파.”

그녀는 태주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집안끼리 교류할 때 얼굴을 봤던 적이 있었다. 외동딸이 태생적으로 여러 장기가 부실하게 태어나 줄곧 아팠던 탓에 일도 그만두고 병간호에만 전념하던 게 기억에 남았다. 덕분에 얼굴에 감추지 못한 그늘이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는지 상상이 잘 안 갔다.

“아이 죽고 나서 이혼하지 않으셨어요?”

“했지. 피차 얼굴을 보면 죽은 아이 얼굴이 떠올라서 괴롭기만 하니까. 하지만 그 여자를 보호하고 싶은 의도도 한편으론 있었다. 난 어차피 검은 물에 몸을 담근 사람이고, 살다가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거야. 그래도 연락은 꾸준히 하고 지냈어.”

“얼마나 안 좋으신 건데요.”

“오래 마음을 졸이고 살아서 그런가……. 심장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더라. 그래서 난 이제 다 털어 내고 아내가 있는 나라로 가고 싶다. 남은 생 정도는 같이 살게.”

지금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러 가지 원인이 기폭제가 되어 그가 용기를 낸 이유는 납득이 갔다. 윤 원장의 말마따나 그는 이제 꼭 지켜야 할 것이나 소중한 가치들이 점점 사라지고 두려움이 많이 잦아든 상태이리라. 끝까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윤 원장은 제 딸과 오랜 친구 중 피붙이 쪽을 선택했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지금 마음은 이렇듯 선의로 가득 차 있으나 또 금세 다른 소중한 것을 핑계로 태주의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그걸 우려하게 됐다. 다만 지금의 태주는 이 알량하고 다라운 양심마저 간절한 게 사실이었다.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서, 악역한테 소명할 기회 같은 건 안 줘요. 아저씨가 그때 왜 그러셨는지, 어째서 이제야 마음을 바꾸시게 됐는지 저한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영영 용서하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제가 지금 뭘 가릴 때가 아니라 도움은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우리 아버지 친구였던 아저씨한테 어떤 제안을 드릴 거예요. 듣고 본인 생각 말씀해 주세요.”

“해 봐라.”

“혹시 그 사고에 관한 증거 같은 거 가지고 계세요?”

윤 원장은 대답할 말을 고르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응당 이런 방향에서 출발하리라고 짐작하고 있던 것 같았다.

“아마 너도 짐작하겠지만, 그땐 옛날이고, 스마트폰이나 메신저 같은 것도 없었고. 서신이나 전화 통화 같은 건 증거가 남을 수도 있어서 회장님께서 워낙 미덥지 않아 하셨다. 그래서 안 실장과 실제로 몇 번 밀실에서 만나 대화한 게 다였지. 내가 작성해서 보냈던 소견서는 그게 원본이라 내게 남아 있지 않고, 연구원 분소 같은 데 자료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부분은 인맥 동원해서 한번 알아보마.”

“증거가 남아 있다면 그걸 토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아저씨가 공개 증언을 하시는 거예요.”

“공개 증언?”

“살인 모의가 있었다는 걸 증언하시면 돼요. 그날 저도 본 게 있고 기억하는 게 있으니 그 자리에 당연히 함께할 겁니다. 다만 이제 살인 사건은 공소 시효가 사라져서, 아저씬 처벌받으실 수도 있어요. 본인이 말 꺼내신 거니까 약간의 참작 정도는 되겠지만……. 뭐, 수감이라도 되면 그 안이 목숨 보전하는 데는 더 용이할지도 모르겠네요.”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니고, 살인을 직접 교사한 것도 아니니 검경은 검사 결과의 조작이나 살인 교사를 방조한 혐의 정도만 그에게 물을 터다.

윤 원장도, 태주도 그가 실질적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공권력이 아니라 이 일로 타격을 입게 될 문 회장의 사적 권력이라는 것을 익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 노회한 인사가 어떤 치밀하고 파괴적인 방어전을 펼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 증언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무위로 돌아갈 것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현실은 새하얀 눈의 세상이 아니다. 도리어 그 위를 사람들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서 밟고 지나가서 새카매지고, 질척거리게 된 더러운 거리 쪽에 가까웠다. 그 위에 다시 새하얀 눈을 열심히 뿌려 본대도 다시 처음의 하얀색으로 돌이키는 건 불가능했다.

“외할아버지하고 척지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저 여태까지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본인이 받은 건 어떻게든 되돌려 주는 분이라서요.”

윤 원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다.”

“구더기 안 무서우세요?”

“그래도 장은 담가야지. 나도 두 다리 뻗고 제대로 잠들고 싶다. 일단 연구소에 내 자필 자료가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내가 증언할 문건은 직접 준비하마. 언제까지 마무리하는 게 좋을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언론이 쉽게 이런 예민한 문제 취재 테이블에 나와 줄까?”

“나올 만한 언론을 찾아봐야죠. 그거 때문에 입적 결심한 거기도 하니까요. 지금 생각으론 국내외 언론 도움을 같이 받아 볼까 해요. 그편이 효과적이지 싶네요. 시기는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저씬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세요.”

“그렇겠구나. 알겠다. 그런데 너 아무리 미워도 네 외할아버지인데……. 정말 괜찮겠어?”

“그 사람이 제 외할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날 이후로는’이라는 전제가 빠졌지만 태주는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니까 본인한테나 신경 쓰세요. 당분간은 위험한데 혼자 다니지 마시고요. 십중팔구 지금 우리가 밖에서 대화하고 있는 것도 회장님은 보고받으셨을 거예요. 호락호락한 분 아닌 거 아시잖아요.”

위험의 무게를 감지한 그들은 잠시간 침묵의 실을 짰다.

이제 더 나눌 대화가 없다고 느낀 태주가 먼저 일어섰다. 윤 원장이 따라 일어나려다가, 생각이 많아졌던 모양인지 다시 벤치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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