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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98화 (98/144)

98화

그리고 그가 빠져나간 내부에서는 태주가 있는 동안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문 회장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안 실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태주 출국한 사이에 집이랑, 보유하고 있는 차에 전반적으로 감청기 설치하고. 앞으로 누굴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사람 붙여서 꼼꼼하게 감시하게 해라. 크로아티아면 며칠은 거기서 머물 거야. 그동안에는 태주 그놈이 누구랑 통화하는지, 국내에선 윤 원장 동선 꼼꼼히 살피고. 무엇보다 이차영이…… 그 아이 계속 눈여겨보고 있어.”

“그러겠습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뻔해. 내 외손자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자발적으로 내 밑에 들어올 놈이 아냐. 지금 분명히 사고 칠 준비하는 거야. 말 바꾸기 전에 입양은 최대한 빨리 진행해.”

“알겠습니다. 기자 회견도 공증하시는 날로 함께 준비할까요?”

“저놈이 그런 거 하려고 들겠어? 최대한 빨리 자리만 마련해. 내가 하는 편이 나을 거다.”

테이블 위의 달력에 고정됐던 그의 시선이 금세 집무실 블라인드를 쳐 놓은 창 쪽으로 향했다. 눈치껏 안 실장이 블라인드를 한껏 올리자 주변 빌딩과 멀리 겨울을 맞이한 숲, 그리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 따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 태주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때가 됐다. 여태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녀석이 뭐가 진짜 무서운 건지를 잘 모르지.”

겨울은 문 회장에게 소중한 딸을 빼앗아 간 참혹한 계절이었다. 부디 올겨울이 태주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고 다만 많은 것들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문 회장은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으며 혀를 쯧, 하고 찼다.

* * *

공항 인근의 한식당이 여느 때와 같이 공항 직원들로 붐볐다. 드문드문 아는 얼굴들과 눈인사를 하면서, 관제탑의 직원들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탑장이 충동적으로 식사를 사겠다며 마련한 자리라 예약을 하지 못하고 왔더니, 안쪽 객실은 이미 만석이어서 외부의 테이블 좌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을 수밖에 없었다.

각각의 테이블들의 정중앙은 길게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화면이 엄청나게 큰 모니터가 마치 조각상처럼 위용을 자랑하며 위치했다. 각자 메뉴들을 주문하고 밑반찬들을 한 입씩 맛보고 있는데 예의 모니터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와 시선이 집중됐다.

점심 뉴스에 대영 그룹의 문현기 회장이 긴급 기자 회견을 한다는 소식이 송출되고 있었다. 찰칵찰칵. 셔터가 사방에서 미친 듯이 터지는 게 눈으로도 보였고, 귀로도 전해졌다. 문 회장의 얼굴이 잠시 번쩍거리더니, 이내 좌중의 취재진들을 진행 요원들이 자중시켰던 모양인지 온전한 본인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는 국민 앞에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보통 저런 기자 회견은 준비된 메시지를 전부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미리 문서로 할 말을 정리해 오기 마련이었으나, 그는 종이 한 장 없이 단상에 올랐다.

[저한테 요절한 여식이 있다는 건 많이들 아실 겁니다.]

마치 죽은 딸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최대한 표정을 정리하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제게는 그 딸아이가 남기고 간 귀한 손자가 하나 있습니다. 여태까지는 제 외조부모가 뭘 하는 사람들인지, 부담 느끼지 말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라는 뜻에서 조용히 키웠습니다만 아내마저 먼저 보내고 나니 노욕을 부리게 됩니다. 다행히 손주 아이가 동의해 주어서 정식으로 입양 절차를 밟으려고 합니다.]

그게 태주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 식당 안의 사람들이 죄다 웅성거렸다.

[몇 차례 언론에서 보도했다시피 우리 한국 항공에서 조종간을 잡고 있는 한태주 기장이 제 외손주가 맞습니다.]

화면 속의 노인은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본인이 항공사에서 직접 일하며 직원들의 애로 사항은 무엇인지, 승객들의 요구 지점을 우리들이 얼마나 맞춰 갈 수 있을 것인지 몸으로 부딪쳐 가며 하나하나 배워 가는 중입니다. 이제 정식으로 입적을 시켜서 일을 더 자세히 가르쳐 볼까 합니다. 앞서간 아내의 유언에 따라 한국 항공 기념 재단에 이름을 가장 먼저 올릴 예정입니다. 부족하겠지만 차근차근 공부하게 해서, 제가 책임지고 반드시 이 사회의 밀알이 될 요긴한 인재로 만들겠습니다. 부디 어릴 때 부모를 여읜 그 아이를 예쁘게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한 말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본사 차원에서 미리 언론사에 자료를 제공했던 모양인지 문 회장과 태주가 장례식장에 같이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화면에 이어졌다. 여태까지 철저하게 얼굴만큼은 감춰 왔으나, 이제는 드러내 놓고 태주의 증명사진까지 함께 전파를 탄 지경이었다. 서늘한 인상의 몹시 유려한 얼굴이 차가운 눈길로 모니터 너머를 직시하고 있었다.

해당 뉴스 꼭지가 지나가고, 사건 사고에 관한 기사들이 이어지자 관제탑의 직원들도 테이블 위로 다시 머리를 맞댔다. 그간 공항 사람들 사이에서는 파다하게 돌던 소문이지만 실제로 뉴스와 같은 공신력 있는 매체를 통해 접하는 것은 현실감에서 차이가 있었다.

“어우, 저 영악한 노인네 너무한다. 그래 봤자 평생을 금수저인데 어릴 때 부모 여의고 이런 이야기는 굳이 왜 해? 불쌍해 보이고 싶나?”

“심리전 아니에요? 어르신들은 부모 어릴 때 여의었다 그러면 안타까워하잖아요. 갑자기 어린놈이 툭 튀어나와서 경영 전선에 뛰어든다는데 반발 잠재우기죠, 뭐. 말투도 공식적인 자리인데 시종일관 엄청 불쌍한 척하고 수가 너무 보인다.”

“먹히니까 그 수 쓰는 거지. 그런데 그냥 데려다 밀알인지 일꾼인지로 쓰면 되지 징그럽게 입양은 왜 해? 자기 입으로도 노욕이라고 인정했으면서.”

“아무래도 성씨 때문 같지 않아요? 하나뿐인 손자한테 문 씨 주고 싶어서?”

“일리 있네.”

직원들이 한마디씩 보태는 동안, 차영은 묵묵히 입을 닫고 있었다.

저들에겐 일상 속에 약간의 충격적인 사건일 뿐이지만 차영에게는 달랐다. 지옥 같은 현실이었다. 덕분에 그는 멍하니 앉아 문 회장의 음성을 듣는 내내 마치 땅속으로 꺼져 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몸은 갯벌에 빠진 듯 자꾸만 지상에서 사라져 가는데, 그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 갈 길만 열심히 가는 듯한 극한의 외로움이 바람처럼 불어왔다.

아무리 ‘구해 줘’라고 목구멍이 찢어져라 소리쳐도, 전혀 들어 주지 않는다.

아마 지금쯤 자신과 같은 기분을 실감하고 있을 법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슬픈 일이지만 태주를 생각하니 필연적으로 문 회장의 기자 회견 발언이 귓전에 재생됐다.

‘다행히 손주 아이가 동의해 주어서 입양 절차를 밟으려고 한다’라고?

한태주를 절벽으로 몰고 간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건지 차영은 알 길이 없었다.

노회한 문 회장의 얼굴을 곱씹듯 되새기던 그는 순간적으로 목구멍을 타고 역한 기운이 역류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탑장을 비롯한 동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모아졌지만 어떤 해명을 할 겨를도 없었다.

입을 틀어막았는데도 이미 터져 나온 기침이 잦아들질 않았다.

“차영 선배!”

“차영 씨!”

결국 차영은 뒤편으로 들리는 동료들의 음성을 무시하고 빠르게 화장실 방향으로 뛰어갔다.

“욱……!”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빈 칸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속을 게워 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뒤쫓아 온 듯한 누군가가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누구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금세 탑장이 음성을 들려주었다.

“왜 이래, 이차영. 괜찮냐? 한 술도 못 뜨더니 구토까지 하고. 어제 술 마셨어?”

“식사 중에 죄송…… 윽……!”

“야, 차영아!”

“탑장님 저 죄송한데…… 그냥 혼자 있을게요. 욱! 우욱……!”

아침 식사를 걸렀던 터라 나오는 건 별반 없었다. 끊임없이 시큼한 위액만을 게워 내게 됐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토해 내고 싶은 것인지 계속 위가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험한 꼴을 보이는 게 싫어서 탑장을 밀어내고 문을 닫은 그는 한참이나 괴로워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탑장이 차영의 의사를 배려해 걸어 나가는 소리까지는 인지할 수 있었다.

헛구역질까지 수차례 거듭한 뒤라야 겨우 그의 입도 목도 쉴 틈을 벌었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쳐 보니 이 날씨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지친 차영은 변기 뚜껑을 닫고 걸터앉았다.

“하, 으……. 미치겠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제복을 입고 있는 증명사진 속 태주의 모습과, 장례식장에서 외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슬픔에 잠겨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지워지질 않았다.

별도리가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해하는 사람과 결탁하려 하는 그가 불쌍했다.

그러기에 왜 그런 인간 외손자로 태어나서 위로해 줄 수도 없게 만들어.

여전히 차마 그를 안아 줄 엄두가 안 나, 차영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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