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97화 (97/144)

97화

먼저 입을 연 건 태주였다.

“윤 원장이 진실을 밝히는 데 협조하기로 했어. 네 아버지 누명 정도는 풀 수 있을 거야.”

“언론은 한 기장 편 같아?”

“당연히 내 편이 아니지. 윤 원장이나 내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언론이 바로 기사를 실어 줄까? 아니, 나라면 이 일을 보도하기 전에 먼저 한국 항공 회장실에 메시지를 보내겠어.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이걸 얼마에 살 건지 묻기 위해서.”

“…….”

“나 외할아버지 양자로 들어갈 거야. 그러면 언론도 내 편이 되겠지.”

깜짝 놀란 차영이 흠칫했다. 여태까지 태주는 제 외할아버지를 향한 적대감을 극명하게 표시해 왔다. 그의 입으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무리 인생에서 한 가지를 얻기 위해 그에 필적하는 가치의 한 가지를 내려놓아야 한다지만 그가 자신을 위해 평생 증오한 사람의 후계자로 입적하겠다는 결심은 좀 납득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한 기장 제정신이야? 나한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이래도 난 그쪽한테 안 돌아가.”

태주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번번이 까먹는 거 같은데, 말했지, 우리 아버지도 그 경비행기에 타고 있었다고. 문 회장이 원망스러운 건 너뿐만이 아니란 뜻이야.”

“하지만 양자로 들어가는 거 끔찍해했잖아.”

“진실을 밝히는 일은 나한테도 아주 중요해. 어렵게 기회가 왔는데 놓칠 이유 없고, 또 방법이 하나뿐이면 난 얼마든지 그 역겨운 짓을 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너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마. 나한테도 너 아직 내 인생 통째로 날려 버릴 정돈 아니야. 난 너랑 같이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거지, 혼자 죽고 싶은 게 아니라고.”

“…….”

“그냥 이건 너를 향한 내 감정과는 별개로 내가 슬픔을 털어 내는 방식이야. 너를 살리고, 그런 다음 나도 살아야 하니까.”

〈어떻게 해야 슬픔을 전부 털어 낼 수 있는데?〉

그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은 걸까.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차영이 그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진의가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려는 듯 선하고 단정한 얼굴에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그걸 마주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쉰 태주가 덧붙였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올라가 봐. 나도 오후에 비행이 있어서 쉬어야 돼.”

아주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차영은 결국 차에서 조용히 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혼자 남겨진 태주는 조수석 의자에 편안히 기대 누워 가볍게 눈을 내리감았다.

조금 전 차영이 했던 말이 뒤늦게 사무쳤다.

〈이래도 난 그쪽한테 안 돌아가.〉

정말 어떻게 해도 우린 안 되는 건가?

이렇게까지 해도, 넌 날 봐 줄 생각이 없다는 거야?

언젠가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에 약속해 주겠다고 기꺼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던 차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그냥 모르는 척하고 그에게 매달릴걸. 나중에 모든 걸 알게 될 차영이 얼마나 괴로워하게 될지, 힘들어하게 될지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저질러 버릴걸.

그때 그냥 단단히 약속을 받아 내고 그를 가졌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 * *

언제나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 무렵이 되면, 문 회장 안가의 침실에는 그의 아내가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안경을 쓴 채로 그날 조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이 방에는 늘 문 회장 혼자였다.

약간 허전함을 느낀 그가 티 테이블 위에 두툼하게 쌓인 종이 신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마침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기척을 내자,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이른 시간부터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나타난 안 실장이었다.

“안 실장이 이 시간에 안가에는 무슨 일인가? 부른 적 없는 것 같은데.”

“회장님께 따로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이르게 찾아왔습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래. 앉아.”

안 실장은 그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는 충신이었다. 오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나타났다면 그에 상응하는 중요도를 지닌 사안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문 회장이 그를 향해 제 앞에 앉으라는 양 손짓해서, 안 실장도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자리를 잡았다.

“말해 봐. 뭔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무례인 줄 알면서도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지난번에 도련님께서 본가에 방문하셨다는 보고를 드린 바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기억해. 좀도둑이 들어오려고 했었다는 날 말이지?”

“네, 수상쩍은 괴한들의 침입 시도가 있었습니다.”

“경찰에 인계했다면서. 보안 시스템은 다시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무척 외람되지만 그게 도련님이…… 사주한 사람인 것 같다는 의견도 함께 말씀드렸습니다.”

이 지역은 대기업 총수들이 많이 거주하는 부촌 중의 부촌이었다. 방범 기구들이 삼엄할 정도로 착실하게 제 역할을 했고, 각각의 저택에서 보안에 들이는 정성과 비용도 막대했다. 덕분에 이 부근은 절도 범죄율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동네에 속했다. 그래서 안 실장은 이 보고를 하던 당일에도 뭔가 의아한 부분들이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문 회장에게 설명했었다.

“그건 이미 다 했던 이야기잖나. 그래서?”

“회장님께서는 이상한 점을 못 느끼시겠습니까?”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눈을 돌릴 만한 필요가 있었던 거겠지. 이 집에서 나오는 동전 한 닢 가져가기 싫어하는 놈이 찻잎 말고 진짜 원하는 걸 잘 찾아갔는지 모르겠구나.”

“회장님.”

“이 문제를 걸고넘어져서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털어놔 봐. 혹시 이 집에 네가 훤히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나?”

안 실장은 이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 회장이 말을 덧붙였다.

“안 실장, 아니, 진석아. 네가 나한테 보이는 충성을 내가 안다. 그러니 모든 일을 믿고 맡기고 있잖니. 이 안에 네가 모르는 공간은 있지만 그건 네가 몰라도 되니까 만든 영역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호기심은 품지 마. 그게 현명하다.”

벌떡 일어선 안 실장은 문 회장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마.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어. 다만 난 모두에게 단 두 번의 기회만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됐으니까 이만 나가 봐.”

“그리고 회장님, 나가기 전에 한 가지 더 꼭 말씀드려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문 회장이 그를 힐끗 살폈다.

“저…… 윤 원장이 도련님을 따로 만났답니다.”

고급스러운 금테 안경을 천천히 벗어 내려놓은 문 회장이 다시 앉으라는 듯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안 실장은 신중한 태도로 그의 앞에 다시 마주 앉았다.

* * *

한국 항공 본사 빌딩 회장실에 제복 차림의 태주가 찾아왔다. 비서진은 그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으나, 그는 쳐다봐 주지도 않았다. 그들이 안 실장에게 태주의 방문을 보고하기도 전에, 그는 막무가내로 회장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안에서 문 회장은 안 실장의 서면 보고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저 왔어요.”

태주가 한마디 하자 안 실장이 눈치껏 뒤쪽으로 빠져 섰다. 태주는 그가 문을 닫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모양새를 힐끗 살피고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라야 회의용으로 마련된 소파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그는 결이 부드러운 소파를 만지다가, 문 회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노회한 노인은 그런 태주의 행동이 지닌 의미들을 파악하기 위함인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만 볼 따름이었다.

“왜 왔는지 안 물어보세요?”

“제복까지 갖춰 입고 여기에는 어쩐 일이냐?”

“공항으로 가기 전에 드라이브도 할 겸 외곽으로 빠졌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그렇게 운전을 계속 직접 해야 되겠니? 기장들이 너처럼 운전 자주 하는 거 봤어?”

“기사 붙여 주시게요? 뭐 어디까지 감시하고 싶으셔서요.”

못마땅한 듯 태주를 쏘아본 문 회장이 어투를 부드럽게 바꾸고 화제도 변경했다.

“어디 비행이니?”

“멀리 가요. 크로아티아.”

“안전 운항 해야겠구나. 올해까지만 하고 사직하겠다는 의사 전했다면서. 잘 생각했다. 그만두면 곧바로 회사로 들어와.”

“아뇨, 저 계속 하늘 날고 싶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좀 더 일선에 있고 싶어요.”

“좀 더 있고 싶다?”

“회사를 물려받는 건 아직 시기상조 같다는 소립니다. 경영 수업이라곤 받아 본 적도 없고. 그 자린 외할아버지가 좀 더 버텨 주시죠.”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지만, 문 회장의 눈길은 미묘했다. 태주도 그걸 눈치챘으나 그 부분에 관한 한 말을 아꼈다. 어쩌면 지난번 태주가 본가에서 뭔가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마음에 걸리는 것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지난 새벽 윤 원장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문 회장과의 대화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좀 더 버텨 달라. 오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만 하는구나. 마음이 바뀐 거니?”

태주는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고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회한 문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 입적시키는 대신 제 부탁도 한 가지 들어주세요.”

“일단 말을 해 봐.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이러는 꿍꿍이가 뭔지.”

“차영이 문제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올 이름이 아니구나.”

“다시는 건드리지 마세요.”

“건드리지 말아 달라.”

“외할아버지가 차영이한테 손 뻗으신 거, 저 길들이고 싶어서라는 거 압니다. 그러니까 서로 필요한 거 하나씩 주고받죠, 공평하게. 있지도 않은 음성 같은 걸로 걔 흔들지도 마시고. 다신 찾지도 마세요. 그리고 저 차영이랑 안 헤어져요. 구질구질하게 붙잡을 거예요. 그래도 제가 필요하시면, 네, 아들 삼으세요.”

두 팔을 책상 위에 겹치고 턱을 괸 채로 태주를 보던 문 회장이, 천천히 자세를 고쳤다. 그는 내선 인터폰 버튼을 눌러 비서실에 급히 연결했다. 곧바로 안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회장님.

“태주 입양 문제로 꾸려 둔 변호인단들을 당장 사옥으로 불러. 혹시 지금 이 자리에 태주가 필요한가?”

-아뇨, 바로는 인감 정도면 됩니다. 추후에 공증할 때는 계셔야 하고요.

“그래. 그러면 약속을 태주 비행 후로 잡으면 되겠구나. 크로아티아라니까 운항 팀에 이 녀석 일정 내 쪽으로 보고하라고 연락해 둬. 그리고 안 실장 넌 다시 들어와.”

명령을 마친 문 회장이 내선을 종료하자마자 태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노크 후에 문이 열리고 안 실장이 나타났다.

“절차 준비 다 되면 사람 보내지 말고 그냥 전화하세요. 제가 이쪽으로 오죠.”

대답도 듣지 않고 안 실장을 지나친 그는 뭔가 크게 불편한 표정을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수행 비서들이 임원 전용 승강기를 붙잡아 두고 있다가 태주를 안내했다. 딸칵. 그의 뒤편에서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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