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소리만 무음으로 하고 전시물처럼 소파 위에 그것을 올려 둔 차영은 계속 불을 밝히는 휴대폰 화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위에 뜬 태주의 이름이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기계가 꺼지는 것처럼 제 마음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가 수천 번의 부재중 전화를 남긴다손 치더라도 자신은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침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게 안 되니 문제였다.
“하……. 제발 그만 좀 걸고 빨리 집에 가.”
시간은 강물처럼 빠르게 흘렀다. 1분은 5분이 되고, 그 5분은 금세 10분이 됐다. 마침내 통화를 마친 지 30분이 넘어갈 때까지 태주는 한숨도 쉬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어 댔다. 덕분에 배터리도 통화 전에 비해 훨씬 닳아 있는 상태였다.
결국 그도 포기한 모양인지 화면이 차츰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두움으로 점철된 그 위를 직시하던 차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다시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 그의 이름이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태주 진짜.”
이대로 두면 동이 틀 때까지 같은 행동이 반복될 것 같았다. 신경 끄면 그만이었으나, 그가 전화를 거는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휴대폰만 쳐다보던 자신의 상태로 미루어 그게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차영이 하는 수 없이 도로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연결됐다는 걸 인지한 태주가 차영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 차영아…….
“미치겠다, 진짜. 이 개새끼야, 지금 어딘데!”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고정한 차영은 겉옷과 차 키를 챙겨 들고는 신발을 구겨 신었다.
* * *
집까지 오는 길에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정말 안전하게 모셔다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 태주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에게 익숙한 지상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6시가 넘어 있는 시각이었다. 아직 아침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는데 간밤에 살포시 대지 위를 덮고 있던 눈은 거의 녹은 상태였다.
차영이 그대로 태주를 두고 내리려고 하자, 그가 손목을 붙들었다.
“놔. 나 출근 준비해야 돼. 모시러 가고, 여기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으면 됐잖아.”
“널 돕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지금 그 사람 만나고 오는 길이야.”
뿌리치고 나가려던 차영이 멈칫했다. 그제야 태주는 제 몸을 제대로 일으켜 세워 똑바로 앉았다. 술을 꽤 마신 게 분명했으나, 그의 눈은 조금도 흐리멍덩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본인을 둘러싼 제반 상황 일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혀 취하지 않은 것이다.
“한 기장 안 취한 거였어?”
“안됐지만 나 술 세. 말술이야.”
“뭐 이런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 새끼가…….”
“취했다고 한 적 없어. 데리러 와 달라고 했지.”
그는 꼭 이런 교활한 방식으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어디가 편해? 밖은 좀 위험하고.”
그러면 안은 안전한가? 차영은 순간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멀쩡히 자신의 집에 있다가 느닷없는 불청객들이 제 사적 공간에 침입해 차영을 끌고 갔던 게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그냥 여기서 해. 그게 누군데?”
“네 집에 나 들어가는 거 싫어? 그럼 내 집도 괜찮아.”
“둘 다 싫으니까 그냥 여기서 하라고.”
그가 지그시 차영을 직시했다. 큰 슬픔 속에 원망이 일부 담겨 있어서 차영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쪽에서 별말 덧붙이지 않고 용건을 이어 가기에 차영도 애써 덮었다.
“윤정훈 원장이라고, 의사야.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람이 너희 아버지 부검 소견서를 작성했어.”
태주가 말한 한 글자, 한 글자를 귀담아듣는 차영의 손이 떨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진실에 접근하게 된 느낌이었다.
마치 뇌 안을 반으로 가르고 그 틈으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최대한 덤덤하게 대꾸하는 목소리 끄트머리가 조금 흔들렸다.
“국과수 직원이야?”
“그건 아냐. 어쨌든 작성을 그 사람이 했고, 그걸 과학 연구소 중 한 분소에서 올린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서…… 중간에 그만한 힘을 가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개입했겠지.”
“그게 한 기장 외할아버지겠네.”
이 물음에 태주는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차영의 앞에서 문 회장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듯했다. 둘 모두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결국은 너희 아버지 시신에서 알코올 성분이 나왔다는 소견서를 경찰청에서 증거로 받아들였어.”
“그 사람이 뭘, 뭘 도와줄 수 있는데.”
“글쎄. 나도 아직 구체적인 건 생각 중이야. 양심선언 정도겠지. 시간도 너무 흘렀고.”
차영은 발끈했다. 조바심이 인 나머지 목소리의 데시벨과 주파수가 한꺼번에 높아졌다.
“사람 바보 취급 하지 마. 그것만으론 아무것도 안 변해. 그러다 문 회장이 그 선언을 뒤집으려고 심한 짓이라도 하면? 죽은 아버지는 더한 수렁에 빠지게 만들고, 나랑 엄만 지금보다 더 끔찍한 지옥으로 처박히게 될 수도 있어. 한 기장, 내가 바라는 건 그냥 아버지 육성이야. 거기서부턴 그걸 지지든 볶든 내가 알아서 할게. 그거나 구해다 주고 우리 관계도 끝내.”
“이차영, 정신 차려. 그런 건 없어.”
절박하게 애원하다시피 하던 차영은 뻣뻣한 고개를 겨우 돌려 태주를 쳐다봤다. 그의 말투가 예외나 이변이라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양 너무나도 단호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차영도 머리로는 그가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욱 인정하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차영의 이런 심사를 이해한 건지, 태주가 설득하듯 차분하게 덧붙였다.
“넌 우리 외할아버질 잘 몰라. 언제 자기 목을 졸라 올지 모르는 그런 찜찜한 물건 세상에 남겨 두실 분이 절대 아니야.”
“하지만 본인 입으로 나한테 있다고 말했어. 허튼소리를 할 사람으로도 안 보였어.”
“속지 마. 멍청하게 굴지도 마. 네가 믿을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야. 문 회장은 얼마든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네 앞에서 너 벗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이야. 아직도 모르겠어?”
“아, 네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날 속인 것처럼?”
“차영아! 제발…… 이 문제를 조금만 더 냉정하게 봐.”
태주는 어울리지 않게도 정말 간절한 음성으로 애원했다.
“확실한 건 아니잖아. 존재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바짝 약이 오른 차영은 애써 단호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속눈썹은 육안으로 훤히 보일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호흡은 서서히 거칠어졌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감기라도 걸린 양 목 넘김마저 아프고 썼다. 가능한 의연하게 이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데, 자꾸 분한 마음이 감춰지질 않고 이곳저곳에서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듯 조금씩 흘러나왔다.
“없어. 내 판단을 믿어. 그리고 만에 하나 네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존재한다고 하면 넌 그걸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경찰에 알린다? 안 실장 꼬리 정도나 잘려서 처벌되겠지. 그 사람은 그냥 끄나풀이야. 그냥 개야. 본인 의사라는 게 없다고. 네가 잡고 싶은 게 안 실장이야?”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아 주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라도 사람들이 알게 되고, 자신과 어머니도 편해지는 길을 도모하고 싶었다. 운이 좋으면 아버지가 생전에 원했던 공항장으로 다시 장례를 치러 줘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의 단면에 얼마나 부조리한 부분들이 많은지 아는 차영은 이게 제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납득하고 있기도 했다. 또 용기가 없기도 했다. 천만다행으로 하늘이 도와서 재수사라도 할 수 있게 된다 한들 수사 기관이 선량한 시민들의 편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자신은 한 사람의 개인이고, 상대는 대기업 총수와 그 수하들이었다.
차영은 겨우겨우 제 마음을 다잡았다. 숨을 몇 번 차분하게 내쉬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진 알아듣겠어. 그게 세상에 없으면…… 나도 더는 한 기장이랑 볼 일 없어.”
“기다려.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무슨 이야기. 대체 나더러 이 마당에 뭘 어떡하라고! 그냥 좀 나랑 끝내 주면 안 돼?”
버럭 소리친 차영의 눈가에 순식간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울컥 치민 화를 더는 억누를 길이 없었다. 가뜩이나 이 문제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괴로운데 태주까지 계속 자신을 들쑤시며 못살게 굴어 힘들었다. 그런데 그 고통을 어디에다 토로하지도 못했다.
대체 누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것인가.
처음 태주에게서 시신의 소견서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한껏 토해 내고 싶었던 눈물을 줄곧 참았더니, 한꺼번에 급박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한번 터진 둑은 물을 내보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태주가 서럽게 우는 차영을 빠르게 알아채고 달래 주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동시에 차영이 필요 없다는 양 태주의 손을 야멸치게 밀어냈다.
“다신 나한테 손대지 말랬지. 너 역겹고 끔찍하다고 했잖아. 내 말이 우스워?”
그는 원망스럽게 태주를 쏘아봤다. 그러나 태주도 참다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나랑 같이 최선의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 왜 네 머릿속엔 날 버리는 것밖에 없어?”
“이 마당에 우리가 계속 사귀고 머리 맞대서 아이디어 쥐어짜는 게 정상이야?”
“나한테 정상 비정상 따질 정신 있었으면 네 앞에 안 나타났어. 너 나 외로워 보인다 그랬지. 슬픔이 많아 보인다고! 나도 널 보면 같은 걸 느껴. 대체 왜! 넌 내가 적이라고만 생각해? 내가 외할아버지 손자라서? 네가 아버지한테 일어난 일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할 때부터, 난 일평생 그 사람을 원망하고 증오해 왔어. 우리 아버지도 그 경비행기에 타고 있었으니까!”
순간 가슴이 철렁한 차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 전 통화를 할 때도 그가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었고, 차영은 계속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하면 될 걸 이 시간에 그를 찾아 꽤 먼 길을 떠났다 돌아왔던 터다.
“이차영, 대답해 봐. 어째서 네가 제일 먼저 버리는 게 자존심이나 네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아니라 같은 피해자인 나야? 내 주위에 너 말곤 아무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전부 되어 주겠다고 했던 건 너잖아!”
“그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의 말은 본인의 입장만 생각한 너무나 불합리한 논리다. 물론 자신의 미움이 그 사고에 관한 한 결백한 태주를 가장 크게 겨냥하는 건 그에게 부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차영은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애초에 사랑한 적 없던 사람과 적용하는 죄의 기준이 다른 게 합당했다. 자신이 태주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를 가장 냉정하게 처벌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하…….”
태주는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실선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들의 어깨 위를 날카로운 침묵이 에워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