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태주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느 허름한 외관을 지닌 한 가게 앞이었다. 술집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엔 다소 부족했다. 반주를 즐길 수 있는 밥집 정도라고 표현하는 편이 보다 나을 것 같았다.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태주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새벽인 데다 시간대가 애매해서인지 손님이라곤 그가 찾아온 윤 원장이 다여서 찾기 어렵지 않았다.
가장 구석에 있는 자리로 향한 그는 테이블 위에 상체를 늘어뜨리고 있는 윤 원장의 앞으로 가 앉았다. 평소 바르게 쓰고 있던 안경이 반쯤 흘러내려 콧잔등 위에 있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태주가 수저 함에서 젓가락을 하나 꺼내 슬쩍 눈 위로 올려 주자, 제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낀 윤 원장이 몸을 일으켰다.
“태주 왔구나.”
“이런 시간에 절 왜 부르신 거예요.”
“내가…… 꼭 할 말이 있어서.”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만큼 제정신이긴 한 겁니까?”
“어, 물론이지. 기다리고 있었다. 한잔할래? 네 아버지가 생전에 여길 아주 좋아했었어.”
“됐습니다. 차 가지고 왔어요. 하시겠다던 말씀이나 하세요.”
“그러지 말고.”
주인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윤 원장은 아주 오랜만에 들렀음에도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찬장을 열어 잔과 소주 한 병을 꺼내 왔다. 조그마한 잔을 태주의 앞에 놓아주고, 차가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 투명한 소주를 그의 잔에 따라 주었다. 미간을 구긴 태주가 짜증스럽게 그 모양을 지켜보다가, 한 수 물러서겠다는 양 잔을 비웠다.
“너 네 아버지랑 어머니를 반반씩 닮았다. 알고 있지?”
“저 서두 긴 거 싫어합니다.”
“내 딸아이가 많이 아팠어. 너도 기억할 거야. 죽은 우리…….”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태주는 그의 손아귀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비어 있는 제 잔에 술이 흐를 정도로 가득 따라서 또 단번에 전부 제 입 속으로 털어 냈다. 대충 그랬으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모든 악인에게도 저마다의 핑계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했고, 악인은 죄로 인해 취득한 이익이 있을 테고, 바뀌는 건 없었다.
“어쩌라고요. 같이 울어 드려요? 무슨 염치로 저 앉혀 놓고 그딴 소리 하는 겁니까?”
“그래서 내가 그 일에 가담했다.”
다시금 술병에 손을 대던 태주가 멈칫했다.
“안 실장은 당시 네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지만…… 나는 짐작했지.”
아주 오래 고민하고 내뱉는 듯한 윤 원장의 말투에는 결연한 의지까지 조금 엿보였다. 조금 의외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스무 해가 넘도록 꽁꽁 숨기고, 감춰 왔던 비밀을 털어놓고자 할 때 그만한 결의가 있는 게 당연하게도 느껴졌다. 문제는 결심을 한 계기다.
“갑자기 이거 무슨 꿍꿍입니까? 외할아버지가 시켰어요?”
“그런 거 아니야.”
“지금 저 앉혀 놓고 뭐 하자는 건데요, 그럼.”
“네 말대로 죽은 내 자식 보기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다. 제대로 두 발 뻗고 잤던 적, 당연히 없었어. 그때 내가 했던 선택으로 딸아이가 몇 개월 더 연명하긴 했다만 결국 죽었지. 그게 꼭…… 내 죗값 같아서 여태 내 입으로 그 일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
“그 경비행기 조종을 한 이정욱 기장의 시신 부검 소견서를 내가 썼다. 안 실장은 그걸 당시 과학 연구소 분소에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제출하도록 했고…… 거기까지가 내가 관련된 부분이야. 이 기장에게도 슬하에 내 딸아이만 한 아이가 있었다는데.”
이번엔 태주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윤 원장이 했던 대로 업소용 냉장고로 향했다. 거기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술병을 꺼내 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타악! 그가 한 손에 쥔 수 개의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까랑까랑한 마찰음이 침묵하는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차영입니다.”
“뭐라고?”
“이름이 이차영이라고요. 그 애 이름.”
“그랬구나. 차영이. 예쁜 이름이네. 지난번 본가에서 내가 진찰한 그 친구지? 그날 네가 차영이라고 불렀던 게 기억이 난다.”
“…….”
“그 친구 아버지가 오래전에 너희 항공사에서 일하던 이정욱 기장이라고, 이달의 우수 기장인가…… 그런 걸 자주 하는 재원이었다고 들었다. 충성심도, 애사심도 많았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안 실장에게 그런 사람 명예를 실추시키기보다는 좀 더 품행이 불량한 조종사도 있지 않겠냐고 되물었더니, 그 사람이 네 가지 근거를 들더구나.”
윤 원장이 제 왼손을 펼쳐서 태주에게 훤히 내보였다. 그러고는 개수를 세듯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평범한 사람일 것, 항공기 운항 능력이 출중할 것, 정치력이 부족할 것, 사건이 벌어졌을 때 도와줄 유력한 주변 인물이 없을 것. 그런 나약한 개인은 꼬리 자르기를 하면 그만이니 한국 항공도 큰 부담은 아니었을 거야.”
“힘없고 좋은 사람이었나 보네요.”
“그랬겠지. 네 아버지처럼.”
시종일관 덤덤하게 듣고 있던 태주는 가볍게 숨을 삼켰다.
“왜 이제 와서 이러시는 겁니까?”
“그때 안 실장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 같은 개들은 본인에게 주어진 임무나 충실히 하면 된다. 그러면 주인이 꼬박꼬박 밥을 준다……. 덕분에 난 굶지 않고 밥을 먹고 살지만 죽은 내 아이에게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태주야, 내가 뭘 하면 되겠니. 어마어마하게 늦은 건 알지만 이제라도 속죄하고 싶다.”
“뭘 하든 최악의 경우 아저씬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라요. 외할아버진 기회 두 번 주는 분이 아니거든요. 또 아주 잔인하시죠. 그래도 뭐라도 하실 건가요?”
“나쁜 놈도 살면서 한 번 정도는 자기반성이라는 걸 하기도 해.”
짐작건대 얼마 전 본가에서 차영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됐던 일이 윤 원장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 같았다. 애써 당시의 일을 모른 척하며 살아왔으나 자신이 일부 가담한 죄의 희생양이 20년 후에도 문 회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으니 동요하지 않으면 인두겁을 썼다고 할 수는 없을 터다.
그러나 여태까지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던 그의 성향으로 미루어 단 한 순간의 충동이나 열정일지도 모른다. 뭐가 정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주는 술잔이 비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런 그에게 윤 원장이 덧붙였다.
“태주 너한테도…… 정말 미안하다.”
협력은 할 수 있어도 용서해 줄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는 그는 이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 * *
새벽녘 야외 주차장에 얄팍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예정보다 무척 이른 첫눈이었다. 밖의 날씨는 쌀쌀하긴 했지만 눈이 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수준은 아니었다. 아마 시간이 조금만 지나 해가 떠오르면 기온을 감당하지 못하고 삽시간에 녹아내릴 듯했다. 이미 조짐이 보였다.
아름다운 사계절은 이미 옛말이었다. 최근 한국의 기후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연의 섭리에 거스를 수는 없으니 맞춰 살아야 했다.
이른 시각 잠에서 깨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차영은 올겨울이 얼마나 추울까를 상상하며 제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야외 주차장의 비어 있는 태주의 자리에 눈길을 주었다. 실은 처음에 창가에 설 때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너무 의식한 나머지 주변을 전부 둘러본 다음 겨우 시선을 던지게 됐다.
현재 시각은 새벽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어서 그런지 밝은 기운이라곤 하나 없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주광색 가로등이 없었다면 퍽 위험해 보이는 풍경이었을 듯했다.
커튼을 도로 치고 들어가려던 차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전화가 올 일이라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건은 아닐 것이다. 태주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어서 몸이 굳은 상태로 잠시 보고만 있게 됐다.
제게 얼마나 급한 이야기를 전해야 했기에 굳이 새벽에 연락을 한 것일까.
힘겹게 심호흡한 차영이 차분히 눈을 감았다 뜨곤 전화를 받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너무 노력한 나머지 필연적으로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 이차영 깨어 있었네. 나 술을 좀 마셨는데,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어서 걸었어.
바짝 긴장하고 있던 차영이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아버지 사고에 관한 중요한 용건이 아니라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리 불러. 뭐가 문제야?”
- 올 때까지 기다릴게.
“미친 거 아니야? 아직도 내가 한 기장 운전기사 같아?”
- 기다릴게.
“한태주 씨.”
- 차영아 기다릴게. 기다릴게. 기다릴게. 너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는 꼭 취한 사람처럼 같은 말을 아주 느리게 반복했다. 덕분에 같은 자리에서 계속 돌고 도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렇게 조르면 자신이 와 줄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차영은 그의 뜻대로 따라 줄 생각이 없었다.
“기다리든지 말든지 이제 나랑 상관없어. 끊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 내는데 한태주의 입에서는 나와선 안 되는 말들이 귓전을 울리는 바람에 멈칫했다.
- 넌 왜…… 내 생각은 안 해? 너희 아버지 일 내가 그런 거 아니잖아.
그의 뻔뻔한 말에 음성이 히스테릭하게 터져 나왔다.
“하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 나는 너랑 똑같은 피해잔데. 너한테 그런 건 안 보여? 내가 누구 외손자인 건 보이고, 누구 아들인 건…… 안 보여? 연좌제 같은 건 요새 세상에 없다고 말한 건 너잖아.
“…….”
- 대체 어째서 네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도, 너를 제일 힘들게 하는 사람도 나인 건데.
여태 살면서 화가 난다고 뭔가를 집어 던져 본 적은 없었는데, 난생처음으로 차영은 그런 충동을 느꼈다. 휴대폰을 던져 버리고, 한태주도 날려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주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것은 술에 취한 그를 상대해 주고 있는 머저리 같은 자신이었다.
차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힐난했다.
“몰라서 물어? 정말 너같이 이기적인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날 속였잖아. 나 등신같이 원수 외손자랑 눈 맞아서 자는 머저리 만들었잖아. 심지어 내가 대 줬어. 이제 내가 아빠 얼굴을 어떻게 봐? 나 지금 너 죽여도 시원찮아.”
- 그러니까 와 줘. 기다릴게.
“아무런 논리도 없어. 그냥 해 달래. 내가 그걸 왜 해 줘야 돼?”
- 기다릴게…… 기다릴게.
기다린다는 말만 몇 번을 하는 거야.
입술을 달싹이던 차영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안 가.”
- 기다릴게.
“분명히 말했어. 안 가. 알아서 정신 차리고 귀가하는 게 좋을 거야.”
뚝. 제 할 말만 마치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한 차영은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받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재차 걸어 오는 그의 집요함이 두려웠고, 또 한편으론 차마 휴대폰을 끄지는 못하고 있는 자신 때문에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