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아니나 다를까.
태주였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그는 언제 어디에서도 늘 눈에 띄었다.
제복을 입은 그는 같이 비행을 하는 부기장으로 짐작되는 젊은 남자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며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입이 간헐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보였으나, 거리가 멀어서 목소리까지는 안 들렸다.
“헉…….”
그가 서서히 제 쪽으로 접근했다. 당황한 차영은 자신도 모르게 카운터와 기둥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태주가 이곳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여태까지 한태주가 만든 억지 우연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공항에서 마주쳤던 일은 없었다. 이 커다란 공항이 그런 우연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차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결국은 없는 일과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다행히 그가 제 쪽을 못 본 모양이었다. 그는 캐리어를 끌고 차영이 선 자리를 그대로 지나쳤다.
“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차영은 그의 근사한 뒷모습을 훔쳐보듯 잠시 지켜보았다. 숨은 건 자신인데, 막상 그의 모습이 조금씩 작아지자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미련을 제대로 털어 내지 못한 자신이 싫었다.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쉰 그는 휴대폰으로 절로 시선을 옮기게 됐다. 메시지에 답장이 없자 도윤이 전화를 걸어 왔기 때문이다.
“응, 도윤아.”
전화를 받으면서, 차영은 태주가 걸어온 반대편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 터미널 도착했어. 보채지 마. 가고 있어.”
그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차영이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도윤의 모습을 찾고 있을 즈음, 그와 정반대 편을 향해 걷고 있던 태주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뚝 멈춰 섰다. 태주를 따르고 있던 선재가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선배, 왜 그러세요? 뭐 놓고 온 거 있으세요?”
태주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먼 곳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의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돌아다니고 있는 분주한 장소였지만 늘 뒤쫓았던 실루엣인지라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차영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미간을 좁혔다.
“선배?”
그제야 그는 대꾸 대신,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는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둡고, 고요한 암실에서 조용히 숨만 쉬고 있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스크린 화면을 켰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태주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화소가 흐리긴 하지만 분명한 색색의 화면을 담은 장면들이 재생되는 것을 보게 됐다.
상상했던 협잡 모의의 테이블을 촬영한 장면이라거나, 누군가의 약점이 될 만한 음험한 상황들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사고 직전의 음성 따위가 재생되는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평화롭고, 따뜻한 풍경이었다. 장소는 태주도 잘 알고 있는 본가의 정원 뜰이었다. 파티를 열고 있었던 모양인지 하얀색 테이블보를 뒤덮은 둥그런 원형의 테이블이 곳곳에 있었고, 그 앞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뒤편 무대 위의 어떤 젊은 여자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어머니?’
여자가 치는 곡은 생일을 축하하는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였다. 테크닉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아주 부족한 솜씨였다. 그러나 기세만큼은 프로가 부럽지 않았다. 신중하게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고 있는 그녀가 제 어머니라는 것을 태주는 한눈에 알아봤다. 추측건대 문 회장, 혹은 그의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 자리 같았다.
이윽고 몸을 살짝 튼 그는 그녀가 어설프게 피아노 치는 장면을 관찰했다.
앵글에 풋풋하고 정성스러운 애정이 가득했다.
살아 움직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다. 젊고, 아름다웠고, 싱그러웠다. 생생한 생동감과 경쾌함이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목소리가 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연주를 마친 그녀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무대 아래로 내려갈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카메라가 있는 위치를 발견한 듯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곤 손을 흔들어 주었다. 화들짝 놀란 상대가 황급히 같이 손을 흔드는 모양인지 잠시 화면이 흔들렸다. 그 순간의 오묘한 두근거림과 설렘이 수십 년 세월을 넘어 전이됐다. 그리고 영상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이걸 찍은 건 누구지?’
태주는 가장 앞으로 영상을 돌렸다. 그러고는 계속 반복 재생할 것을 기기에 주문했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자니 그녀가 열중해서 입술을 살짝 내밀고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몇 번이고 다시 제 눈에 담게 됐다. 그러다가 영상 끄트머리에서 카메라를 빼앗긴 남자의 얼굴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안 실장이었다.
‘설마 안 실장이…….’
그가 침묵한 채로 화면에 모든 주의와 집중을 기울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낮은 한숨을 토해 냈다.
“빌어먹을.”
차영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찾고 싶지 않았다. 제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치밀하고 꼼꼼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서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혹시나 이 안에서 사고에 관한, 뒤로 무를 수 없는 증거들이 나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도 일었다. 그런 물증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자신이 억지로 붙들고 있던 차영과의 관계는 정말로 모두 끝이다. 그게 두려웠다.
모든 긴장과 걱정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태주는 편안하게 드러누웠다. 바짝 독이 오른 상태에서 첩보전이라도 찍듯 훔쳐 오고, 복제한 상황에 비하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라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는 괴롭다는 듯 제 이마를 팔등으로 짚다가, 불현듯 떠오른 물건이 있어 그것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베레타사의 총기였다.
총기의 탄환은 사용자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유통 기한이 결정된다. 이 안에 든 까마득히 오래된 총알은 여전히 사용 가능할 수도, 어쩌면 십수 년 전 진작에 폐기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애써 과거의 공포를 지운 덤덤한 얼굴로 총기의 슬라이드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금이 갈락 말락 하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매우 늦은 시간이었으나 상대는 곧장 음성을 들려주었다. 선재의 아버지였다.
- 네, 한 기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 아닙니다. 원래 새벽에 자거든요. 캠코더 영상은 아까 전에 선재 편에 받으신 걸로 아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실은 다른 용건이 생겨서요. 혹시, 탄환 같은 것도 구할 수 있습니까?”
- 탄환요? 진짜 총알 말씀입니까?
“네, 총기 제조사는 이탈리아 베레타고, 모델은 92F로 꽤 구형입니다. 그리고 만약 구할 수 있으면 이 슬라이드를 교체할 수 있나 여부도 궁금한데요. 좀 아슬아슬해 보여서요.”
- 음, 제가 그런 쪽으로도 문외한이라, 장담은 못 드리고. 일단 수소문은 해 보죠.
“부탁드립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간단한 통화를 마친 그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있는데 드르륵, 하고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재의 아버지인 줄 알았으나 그 위에 떠오른 이름은 제게 직접 전화를 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던 인물이었다.
[윤 원장]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제 외할아버지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원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중차대한 일이었다면 안 실장을 통했으리라는 생각이 2차적으로 들자 그럴 수가 없어졌다. 그는 화면을 종료하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죠?”
- 태주야.
중년 남자의 음성은 푹 잠겨 있었다. 술에 취한 것 같기도, 괴로움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태주가 침묵하는 사이 상대가 간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지금 좀 볼 수 있겠니? 꼭 할 말이 있다.
태주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시간에 전화를 한 데다가 심지어 나와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술주정으로 흘려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여태까지 윤 원장은 제게 이랬던 일이 없었다.
“거기가 어딥니까?”
- 여기가…… 너희 아버지랑 가끔 왔던 술집인데……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더구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