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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93화 (93/144)

93화

끼익.

난폭하게 운전을 하던 고급 세단 한 대가 도로변의 갓길에서 급히 멈췄다.

이 차량의 운전자인 태주는 쇼핑백의 안부터 서둘러 뒤져 뭔가를 꺼냈다. 총은 재킷 안주머니에 숨기듯 넣어 두고 제 손 위에 다른 하나를 올려 면밀히 살폈다.

이 물건이 영상 장비인 것은 분명했는데 딱 봐도 요새는 쓰지 않는 캠코더인 데다 너무 옛날 모델이라 어떻게 다루는지를 좀 헤매게 됐다. 무엇보다 전원이 안 들어왔다.

그는 그대로 차를 그곳에 버려두고 내렸다. 이미 본가에서 의미심장한 행동을 한 뒤였으니 최악의 경우 자신의 동선이 읽힐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갈아타는 것이 옳았다. 툭툭. 가볍게 차체를 내려치며 골똘히 방향성을 궁리하던 태주는 급한 대로 선재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목적지는 그가 있는 곳이었다.

- 선배? 일은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됐어요?

“그 사람들 경찰에 넘겼어. 그냥 시도에 그친 거니까 운 좋으면 훈방 조치 될 거고, 운이 나빠서 문 회장이 직접 처벌에 개입하면…… 좀 안 좋을 수도 있다.”

- 감수하고 간 건데요. 한 큐에 그렇게 큰돈 벌기 어렵다는 거 잘 아는 사람들이에요. 수금 전까지 아버지가 돈 묶고 계시니까 조사 중에 쓸데없는 발설은 일절 안 할 거예요.

“해도 상관없어. 그 집에선 이제 용건 끝났거든. 어차피 이런 하찮은 눈속임을 본가 사람들이 모를 리도 없고. 본인 구명은 적당한 선에서 본인들이 하라고 전해.”

- 벌써 끝났다고요? 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되게 스펙터클하게 사시네요.

“헛소리할 시간 없어. 다른 용건이 생겼어. 홍 기장 너희 아버지 가게 인근에 오래된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 있을까? 예전에 그런 뉴스 본 것 같은데.”

- 맞아요. 그 동네에 그런 거 많아요. 골동품점도 많고, 동대문 방향으로 좀 지도를 확장하면 훈장 같은 거나 옛날 전자 기기들 취급하는 데도 꽤 있고요.

태주는 결심한 듯 캠코더를 단단히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도로 앞뒤를 살폈다.

“잠깐 보자, 셋이서.”

- 지금요? 어디서요?

“너희 아버지 업장 주소 찍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차가 견인된다면 추후에 연락이 올 것이다. 급한 대로 지나가던 아무 택시나 붙잡은 그는 재빨리 거기에 올라탔다.

* * *

그가 도착한 곳은 선재의 아버지가 운영한다던 종로 일각의 금은방이었다.

태주가 약속한 시간을 살짝 넘겨서 택시를 타고 업장으로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선재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그를 마중했다.

“선배 오셨어요?”

“아버지는. 어디 계셔?”

“가게 안에 계세요. 선배가 좀 조용히 이야기했으면 하셔서 일찍 문 닫았어요.”

“오늘 손해 본 금액만큼 같이 사례할게.”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뒷문이에요.”

금은방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가게의 안쪽에는 쪽문이 나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있던 중년 남자가 그들을 발견하고 일어섰다.

선재의 수더분한 인상이 그의 안면에서도 고스란히 보였다. 태주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네자, 선재의 부친도 이에 질세라 똑같이 했다. 공손하게 구는 태주의 모습을 본 선재가 깜짝 놀라서 그와 제 아버지를 번갈아 살폈다.

“한태주입니다. 홍 기장 사수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선재가 엄청 따르고 좋아합니다. 지난번에 신세도 크게 졌다고 해서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여긴 제가 일하다 잠깐 쉬는 쪽방이라 한 기장님 모시기에 너무 누추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식사는 제가 대접해야죠. 오늘은 그런 일로 온 거 아닙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선재의 아버지는 태주를 향해 앉으시라 손짓했다. 태주가 앉자마자 그 앞에 본인도 자리를 잡았다. 선재가 두 사람의 사이에 심판처럼 앉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태주의 표정으로 미루어 꽤나 심각한 일임을 짐작하기 때문인 듯했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캠코더를 올려 둔 태주가 맞은편으로 그것을 밀었다.

“뭔지 아시겠습니까?”

선재의 부친이 한번 만져 봐도 되겠냐는 듯 눈짓을 보내고는, 캠코더를 쥐었다. 그는 돋보기를 걸치고 물체를 360도로 돌려 가면서 신중하게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거 진짜 옛날 모델이네. 요새는 이런 거 안 쓰지요.”

“연식이 얼마 정도 된 것 같습니까?”

“나도 기계는 서툴러서…… 정확한 건 모르지만. 보아하니 우리나라 제품이 아니라 일본 내수용 같고, 한 20·30년은 됐지 싶어요. 까마득한 구형인데 크기도 작은 편이고 당시엔 아주 비싸게 구입했겠네요. 음, 가만있자…… 이런 거는 일련번호가 있을 텐데.”

시기는 얼추 일치했다. 태주는 차라리 이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계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선재의 부친에게 차분하게 대꾸했다.

“만약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다면, 그게 뭔지를 알고 싶어요. 혹시 녹화된 영상물 같은 게 있으면 그 복사본을 만들어 주세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복제하는 사람이 영상의 내용은 확인하지 않아야 합니다.”

“글쎄요. 그게 가능한가? 한국말 알면 내용은 다 이해할 텐데.”

“그러면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알아봐 주세요. 어렵겠지만 사례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장담은 못 드립니다만 일단 최선을 다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가 돋보기를 내려놓고 캠코더를 조심스럽게 뒤편의 수납장으로 챙겼다. 태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덧붙여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세요.”

“최대한 빨리 알아보죠. 오늘 밤에 우선 쭉 돌려 보고 진행 상황 선재 통해 알리겠습니다.”

“제가 당부드릴 건 이 일을 반드시 은밀하게 진행해 달라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이건 저를 위해서도, 아버님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선재의 부친은 알겠다는 양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곳을 선재와 함께 빠져나왔다. 그때까지 내내 입을 앙다물고 말을 아끼던 선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게 대체 뭔데요?”

“나도 정확하겐 몰라. 어쨌든 네가 알면 다치는 거.”

“좀 오싹하네요. 기업인들끼리의 암투에 관한 증거, 뭐 그런 건가.”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게 제일 좋고, 뭐가 있다면 그런 내용인 편이 차라리 낫겠다.”

“무서운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재주가 있으세요.”

“너도 나한테 저 캠코더 도로 넘기는 순간 그간 있었던 일 다 잊어버려. 자세하게 알 필요도 없고. 알수록 다칠지도 모른다고 아버지한테도 분명히 말씀드리고. 진짜로 저거랑 연루되면 크게 안 좋을 수도 있다.”

정답이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문제는 던져졌다. 그리고 어쩌면 곧 선재의 부친을 통해 그 해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 회장이 그렇게 은밀하게 침실 안 서재의 금고에 보관을 해 뒀다면 아주 중요한 물품인 것만은 분명했다. 최소한 생전에 제 어머니가 그를 향해 마음을 담아 썼던 편지 정도의 가치는 지니고 있을 터다.

“크게 안 좋은 게 어느 정도일까요?”

“건드리면 패가망신하는 거지.”

선재는 농담을 다 하신다는 양 가볍게 웃었다.

“에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이 말이 농담으로 들리는 네가 부럽다.”

“전 선배가 부러워요.”

“나 고아야. 어머닌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진 열 살 되기 전에 돌아가셨지. 그래도 부러워?”

“그래도 외조부님 계시잖아요, 어마어마한 재벌. 그건 고아가 아니죠.”

“그래, 그렇지. 계속 부러워해라. 그편이 네 정신 건강에도 좋겠지. 나는 불행하지만 누군간 행복해야 하지 않겠냐.”

“무슨 말씀이 그래요.”

대꾸 대신 허탈하게 웃어 보인 태주는 선재의 옆을 지나쳤다. 미리 불러 둔 택시가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재빨리 뛰어온 선재가 뒷문을 열어 주자, 태주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곤 올라탔다.

“선배, 모레 비행 때 봬요. 혹시 그 전에 복제되면 따로 연락드릴게요.”

대충 손을 휘저은 태주는 편안히 자세를 잡고 앉았다. 타악. 선재가 밖에서 문을 닫았다.

* * *

공항 터미널 일각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차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를 할 수가 있었다. 제복을 입은 승무원들 혹은 공항 도처에서 일하는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분류였고, 저마다 다른 크기의 짐을 이끌고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또 다른 한 분류였다. 분명히 사전적 의미대로라면 자신은 전자에 속했는데 왠지 차영은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흐르는 물 위에 부유하는 의미 없는 물체 같았다.

때마침 도윤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서, 차영은 휴대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 그는 그녀가 주겠다던 어떤 물건을 받기 위해 터미널에 와 있었다. 도윤은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자연스럽게 짐작이 갔다. 아마 청첩장일 것이다.

친구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고, 또 그게 실제 제 심정이었으나 차영은 현재 마음속에 그녀를 온 정성 다해 축하해 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남자, 그리고 그와 자신 두 사람을 둘러싼 곤혹스러운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에스컬레이터는 차영을 위층으로 옮겨 주었다. 무심코 익숙한 방향을 따라 발을 내디디고 있는데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예의 남자를 발견하게 됐다.

‘한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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