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회장님이 아무리 꼼꼼하셔도 결국은 나 같은 옛날 사람이잖니.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것들은 보통 네다섯 차례 시도를 넘기면 도리어 단단히 문을 잠가 버린다. 기회가 얼마 없는 셈이다. 최대 다섯 번 내에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노회한 문 회장이 사람들이 흔히 쓰는 주민 번호나 본인의 생일, 혹은 창립 기념일 또는 이런 것들을 조합한 단순한 번호로 안전을 도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드 키라는 다른 보안 장치가 있으니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기 어려워도 본인에게는 접근성이 좋아서 결코 까먹지 않을, 그런 수준의 쉬운 번호일 터다.
신중하게 제 손을 뻗은 태주는 카드로 먼저 잠금을 해제했다. 번호를 입력하는 판에 불이 들어왔다. 여섯 개를 누르면 되는 듯했다.
제일 먼저 항공의 날을 눌러 봤다. 삑. 장치는 문을 열기를 거부했다.
그다음엔 한국 항공의 첫 해외 취항일을 눌러 봤다. 역시나 삑, 하고 기계음이 들렸다.
기회도 얼마 안 남은 데다, 다시 직원들이 안채까지 올라올 때까지 시간도 거의 없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태주가 ‘설마 이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제 아버지의 기일을 눌러 봤다. 삑. 불행인지 다행인지 틀렸던 모양이다.
‘남은 건 두 번.’
손아귀를 한번 꽉 쥐어 본 태주가 빨간불이 반짝이면서 빛을 발하는 번호판 위를 응시했다.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 주기적으로 비밀번호를 바꿀 가능성도 있어. 그러면 이렇게 예전 일이 아니라 최근에 인상적이었던 날짜일 수도…….’
잠시 망설이던 그는 손가락을 달싹이다가 자신에게는 익숙하지만 어쩌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법한 날짜를 입력했다. 태주가 한국 항공 조종간을 잡고 첫 비행에 올랐던 날이었다.
띠릭. 덜컹거리는 개방음을 낸 금고가 아가리를 활짝 벌렸다.
“하…….”
망할.
어이가 없는 태주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겨우 황망한 정신을 수습한 그는 안을 뒤졌다. 옛날 사람답게 수기로 작성한 종이들이 더러 있었고, 외할머니의 전언대로 금전적 값어치를 할 만한 물건들은 안 보였다. 아마 누군가에겐 그것보다 더한 가치일지 모르지만, 실제 별반 돈은 안 되는 것들이리라.
그 안엔 납작한 상자도 하나 있었다. 거기에 든 낡은 편지 봉투는 어머니가 직접 수기로 쓴 듯한 필체들이 귀엽게 적혀 있었다. ‘아빠께’라는 단어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가 직접 써서 제 아버지에게 드렸던 것을 여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의 사진 몇 장도 보였다. 개중 하나는 그의 눈에도 낯이 익었다.
가장 행복하게 웃고 있는 이걸 영정 사진으로 쓴 모양이었다.
애써 고개를 저은 그가 더 안쪽으로 손을 더듬어 보는데, 뭔가 묵직한 물건이 두 개가 잡혔다. 윤곽을 매만져 보던 태주는 흠칫했다.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니 둘 다 검은색 물체였다. 하나는 오래전에 사용했던 영상 장비 기기 같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제 총기였다. 태주의 눈에도 꽤나 익었다. 이탈리아 베레타사의 자동 권총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여전히 실탄이 담겨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급작스럽게 떠오르는 오래전 기억으로 그는 숨이 턱 막혔다.
이것은 아버지가 사망하던 날, 태주의 침실에 무단으로 침입했던 문 회장이 그의 이마에 겨누었던 총기와 같은 모델이기도 했다. 어릴 땐 이것의 정체를 명확하게는 몰랐으나,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기억을 더듬으며 집요하게 여러 가지 총기들을 찾아다니다가 자연스럽게 베레타의 가장 유명한 모델인 92 시리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것들이 차영에게 어떤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가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듯했다. 기척은 아주 멀고, 또 희미했지만 워낙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느껴졌다.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었고, 그랬으면 하고 태주도 간절히 바랐으나 인간의 직감은 때로 제 능력 이상의 일을 거뜬히 해내곤 한다.
황급히 판단을 내린 태주는 그것들을 챙겨서 재킷 안쪽에 숨기고 재빨리 금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른 건드린 물건이 있는지를 침착하게 확인한 뒤 간이 서재를 빠져나왔다.
침실을 벗어난 그가 복도를 거닐어 나오니 정원 관리사들과 상주 도우미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이 뜬금없이 복도에서 튀어나오는 태주를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했다.
정황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의혹의 당사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뻔뻔함과 당당함이다. 그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이 사실을 직접 체득해 왔던 터라 그 누구보다 잘 깨우치고 있었다. 태주가 그들 중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콕 찍어 요구했다.
“아주머니 저 차 한잔 주시죠.”
“어, 네 도련님. 뭘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아니, 회장님이 자주 드시는 걸로 주세요.”
“이렇게 쌀쌀하고 흐린 날엔 끝 맛이 쓴 쑥 차를 자주 드세요.”
“그럼 그걸로 할게요.”
재킷 안쪽에 툭 튀어나온 부분이 너무 눈에 띄었다. 오늘 소동이 있던 터라 이곳의 보안 장치들을 안 실장이 반드시 돌려 볼 것이다. 그나마 안채는 그런 기계 감시의 눈에서 안전했으니 정원 땅을 밟기 전에 여기에서 무조건 수습을 하고 나가야 했다.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내던 도우미들이 태주가 주문한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라며 황급히 보낸 수행 비서와, 경호 팀장이 안채로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태주의 앞에 나란히 서서 꾸벅 인사했다.
“뭐였습니까?”
태주가 묻자, 수행 비서가 경호 팀장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자리를 좀 비켜 달라는 의미 같았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서의 입이 열렸다.
“좀도둑이었습니다.”
“좀도둑? 이 동네에 그런 게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네요. 간덩이가 부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경찰에 넘겼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 언짢게 듣지는 마십시오. 제가 조금 전에 이 일을 안 실장님께 바로 보고드렸더니 안 실장께서 도련님께 이렇게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사람들 눈 돌려서 안채에서 뭘 찾으시려던 겁니까?”
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군대처럼 위계 서열이 확실한 그들은 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이 집의 관리인 중 총 책임자 격인 안 실장에게 제일 먼저 보고가 들어가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엄연히 주인인 제 외할아버지가 따로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예리한 안 실장은 오늘의 이 사건이 아주 조악한 냄새를 띤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으리라.
“궁금하면 직접 알아내면 되겠네요.”
“도련님.”
“아마 당신은 절대 못 찾을 겁니다. 외할아버지가 안 실장한테도 꽁꽁 숨긴 거거든요.”
“…….”
“……라고 안 실장한테 전하세요. 개는 그냥 개의 일이나 하면 됩니다. 냄새 맡았으니 본인 할 일은 끝난 것 같다고요.”
아마 안 실장이 이 말을 전해 들으면 무척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태주가 찾고자 한 그게 무엇일지 무척 궁금하지만, 제 외할아버지에게 대놓고 물을 수는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안 실장이 절대 못 찾을 무언가’라거나 ‘안 실장에게도 숨긴 어떤 것’이라는 둥의 언급을 하는 순간부터 문 회장은 안 실장이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는지를 추궁하기 시작할 테고, 또 그는 안 실장에 대한 신뢰를 일부 무너뜨릴 터다. 문 회장은 그런 냉정하고 혹독한 사람이다. 그러니 태주가 방금 한 대답은 안 실장에게 양날의 검이었다.
물론 그도 여태까지 문 회장과 함께해 온 세월이 있으니 침실 안쪽 서재에 뭔가 있으리라는 짐작 정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때론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죄인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지 태주도 궁금했다. 어차피 안 실장에게 제 몸을 수색할 권리 따윈 없었다.
“그렇게만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태주가 끄덕였다. 그사이 도우미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왔다.
“난 이 차 한 잔만 마저 마시고 출발할게요.”
“그러시죠.”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비서가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떨어져 묵묵히 대기했다. 태주는 품에서 차 키를 꺼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휙 던졌다. 반사 신경이 좋은 비서가 가까스로 팔을 뻗어 작은 물체를 낚아채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은 먼저 내려가서 차 열선 좀 올려 두세요. 날이 쌀쌀하네.”
그러고는 비서가 나가자마자 차를 조용히 음미하면서 동시에 도우미를 불렀다.
“아주머니, 전 이 찻잎 좀 챙겨 주시죠. 향이 아주 좋네요.”
“그거요. 역시 회장님이랑 입맛이 비슷하시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도련님.”
상냥하고 손이 빠른 아주머니가 고급스러운 쇼핑백에 찻잎을 챙겨 주었다. 태주는 굳이 불편해하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향이 그윽하고 맛은 씁쓸한 차를 입에 대면서 튼튼한 쇼핑백의 안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캠코더와 총기를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