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프라하의 한 호텔 침대 위에 편안히 누운 태주는 심각한 궁리에 골몰하고 있었다.
“사고 음성이라…….”
〈사고 당일 경비행기 내부 음성이 그쪽 외할아버지한테 있다고 들었어. 아마 인근 관제소랑 교신했던 음성 녹음본이거나 아니면 잔해에서 발견된 기내 녹취 파일 같아. 그게 필요해.〉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여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외할아버지나 안 실장도 그런 내색을 보인 적 없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그들의 입이 무겁고, 이런 죽음에 관한 사안은 다른 문제들보다 더욱 신중하게 해결해야 했으니 일부러 말을 아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러나 태주는 이런 단순한 접근은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제 외할아버지가 매우 치밀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몹시 결벽적인 성격을 지닌 데다, 또 오만하고 독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었다.
‘녹취 파일…….’
태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좁은 경비행기 조종석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상상도는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 갔다.
사고 당시, 급박해진 이정욱 기장과 제 아버지는 짧은 시간 내에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누구도 그렇다고 증명해 주진 않았지만, 그 사고에 대해 나름대로 뒷조사를 해 본 태주의 짐작으로 해당 사고는 기체에 미리 뭔가 조작을 해 두었던 것일 듯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계기판에 이상이 있다거나 하는 등의 상황에 걸맞은 긴박한 말들이 오갔을 테고, 그건 운이 따른다면 이정욱 기장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도 되어 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음성을 문 회장이 차영에게 건넨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만약 편집해서 의미 없는 부분만 건넨다손 치더라도 차영이 복원을 시도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벌써 20년이 넘게 지난 일이고, 그때의 관제 환경은 지금에 비해 첨단화돼 있지 않아 훨씬 열악했다. 만에 하나 당시에 교신했던 음성이 남아 있었다 한들 추후에 문제가 될 수 있는 모든 불씨는 이미 무조건 없앴으리라. 경비행기의 잔해에서 그게 발견됐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기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항공 측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불가능했고, 있었대도 결국 어떻게든 파기했을 것이란 데 생각이 미쳤다.
태주는 눈을 번쩍 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려지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자신은 문 회장을 잘 알았다.
‘애초에 그런 건…….’
없는 것이다.
차영을 통해 뭔가 얻어 내기 위해 그를 속이고,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문 회장의 뚜렷한 의도가 안 보였다.
그리고 100만분의 일의 확률로 그게 세상에 있다면, 대체 어디에 있을 것이냐는 의문이 함께 스멀스멀 그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금융 기관의 금고는 결코 아닐 듯했다. 여차할 경우 공권력의 눈길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치명적인 증거를 남의 손이 함부로 닿는 곳에 두지도 않았을 게 자명했다. 물론 그 남이라는 범주에 죽기 전까지 한 이불 덮고 산 아내나, 평생을 자신에게 충성한 수족마저 들어가 있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오직 스스로만 믿는 문 회장에게 예외는 없었다.
“하, 뭐야 대체…….”
태주는 초조하게 잇새를 곱씹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워 있던 그는 제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무심코 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자신을 은밀히 따로 불러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됐다. 어째서 여태까지 그날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쓰는 부부 침실 안쪽에 회장님이 개인적으로 쓰시는 간이 서재가 작게 만들어져 있다는 건 알고 있니?〉
〈그리고 그건 안 실장도 수행 비서들도 아무도 모르는 금고야.〉
그녀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문 회장의 입장에서 꽤나 중요한 물건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어떤 의미로든 말이다. 외할머니도 자신의 부군이 줄곧 그 공간을 비밀스럽게 여기는 것을 봐 왔기에 혹여나 손자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카드 키를 넘긴 것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음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곳이 가장 유력했다.
태주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몇 개 안 되는 저장된 이름들 사이에서 상단부쯤에 있는 성명을 바로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 네, 태주 선배.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말씀만 하세요. 저 지금 숙소라서 바로 갖다 드릴 수 있어요.
“홍선재, 너희 아버지 종로에서 일하신다고 그랬지.”
- 맞아요. 그랬는데…… 선배 그쪽에 가실 일 있으세요?
“오래 일해서 발도 넓으시고.”
- 뭐 비슷한데…….
“너희 아버지 도움을 좀 받고 싶어.”
- 도움요? 무슨 도움요?
“일단 사람이 필요해. 입 무겁고, 돈이면 아무 일이나 다 하청받아서 하는 사람.”
- 그런 건 솔직히 찾기 그렇게 어렵진 않을걸요? 우리 아버지 주변 사람들은 알부자 아니면 죄다 가난뱅이들이라.
“잘됐네. 전화로 할 이야긴 아니고, 너 일단 지금 좀 내 방으로 와 줘야겠다.”
다행히 선재의 도움으로 첫 단추는 잘 꿸 수 있을 듯했다. 태주는 일방적으로 명령한 뒤 전화를 끊었다.
* * *
오랜만에 본가 명부전에 들른 태주의 눈앞에 한 사람의 영정 사진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외할머니의 것이었다. 나란히 놓여 있는 어머니와 나이 차는 많이 나지만 꽤 비슷하게 생겼다.
부모 자식지간에는 핏줄이기에 닮고, 부부는 결혼을 하면 차츰 닮아 가기에 일가족이 결국 비슷비슷한 인상을 풍기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자신도 그 논리를 일부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언젠가 차영이 이 혈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게 생각났다.
불가능함을 태주는 알았다.
분향을 한 그는 뒤편의 수행 비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현재 외할아버지와 안 실장은 본사 빌딩에서 회의에 매진하고 있었다. 비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이쪽으로 향하겠다는 연락을 넣었더니 자신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태주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 전부 쳇바퀴처럼 잘만 돌아가 준다면 이 싸움에 승산이 꽤나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상대가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야 대응도 적절하게 할 수가 있는 법이나, 그들은 오늘 태주가 이곳에 왜 방문하고자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기 어려울 터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한 태주가 돌아서려고 하는데 때마침 이곳에서 들릴 일이 거의 없었던 사이렌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태주가 의아한 듯 비서를 쳐다보자, 그가 초소형 무전기를 들고 보안 업체의 직원과 무선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명부전의 중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태주에게 나가라는 듯 손짓하는 것이었다.
“도련님, 일단 여기서 나가시죠. 외부에서 저택 별채에 무단으로 가택 침입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울리는 건 그 경보음입니다.”
비서를 뒤로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거실의 넓게 난 창문 바깥을 둘러보았다.
타운 하우스처럼 조성되어 있는 본가 건물은 각각의 별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한쪽에서 구멍이 생기면 이곳 안채까지도 쉽게 침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일부러 본가 살림 예산 중 꽤 많은 비중의 액수를 투자해 건물 외부에서 두 겹, 세 겹으로 두꺼운 보안 체제를 유지했다. 워낙 보호막이 튼튼해서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경계선이 뚫린 적은 없었다.
무전기를 든 상주 경호 팀장이 보안 업체의 사람들과 저택의 경호원들을 소집했다. 그들에게 혹시나 경비 체계에 이상이 있는지 꼼꼼하게 점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상주 도우미들과 관리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계단 위에 서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던 태주의 눈엔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경호 팀장이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보였다.
“도련님께선 안전한 안채에 잠깐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 오늘 일 보고서를 올려야 해서, 나머지 별채들을 직접 확인한 뒤에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네, 뭐. 저한테 어디 가는지 보고하실 거 없어요. 난 대충 알아서 돌아가겠습니다.”
그의 뒤편에 있던 수행 비서가 경호 팀장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태주는 비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면서 완전히 거실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집 안 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고요한 복도를 거닐었다. 외할아버지 내외의 침실은 현관에서 가장 가깝고, 여러 개의 방을 터서 제일 큰 곳이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태주는 가장 안쪽으로 거침없이 뚜벅뚜벅 걸었다. 역시나, 간이 서재일 법한 침실 안의 출입문이 보였다. 제 외할머니가 남겨 준 하나의 카드 키로 그 안에 들어가는 데까지는 무척 쉬웠다. 그리고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이쪽 서재는 업무용으로만 겸해 둔 공간인 모양인지 별채 서재에 비해 책이 많지는 않았다. 주변을 쓱 둘러본 태주는 나머지 하나의 카드 키를 만지작거리면서 더욱 안쪽으로 진입했다.
고급스러운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 그리고 그 아래에 납작한 금고가 있었다. 역시나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대로 카드 키와 비밀번호 두 가지의 이중 보안 시스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