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흐느끼는 이의 머리 위에서 가볍게 흩날렸다.
“내가 잘못했어.”
가까스로 참회의 말을 내뱉은 태주는 길게 심호흡했다.
“내가 네 앞에 나타난 건 널 좋아하는 날 위해서였던 게 맞아. 이제 안 그럴 거야. 앞으론 내 시간을 널 위해서 쓸게. 제발 기회를 줘. 한 번만, 딱 한 번만.”
거기까지 들었을 때, 차영은 제 눈물이 거의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옛말처럼 모로 가도 서울로 가는 데 성공하기만 해도 되는 거라면 태주는 이 과거 고백이라는 행로로 차영의 눈물 그치기에 성공한 셈이다. 어렵사리 제 몸을 태주에게서 떼어 낸 차영이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뒤늦게 그도 차영에게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얼굴에 흥건한 물기를 닦아 주려 태주가 손을 뻗었으나, 차영이 고개를 돌렸다. 보통 흔해 빠진 드라마 속의 이런 장면에선 씁쓸한 한숨을 삼키면서 물러서는 게 일반적일 테지만 태주는 그러지 않았다. 굳이 차영의 턱을 제 쪽으로 향하게 만들더니 축축한 눈물을 커다란 손으로 끝끝내 꼼꼼히 전부 닦아 주었다. 차영은 당연히 뿌리쳤다.
“필요 없어. 우린 이미 헤어졌고…….”
“정말 미안한데, 난 그렇게 못 해 줘.”
“내가 싫다는데 대체 왜 이래. 이게 날 위해 네 시간을 쓰는 거야?”
차영이 허탈한 마음 반, 어이없는 마음 반을 빼곡하게 음성에 담아 내뱉었다. 그러나 태주는 흘려 넘겼다.
“내가 도와줄게.”
“대체 뭘 어떻게 도와줄 건데.”
“우리가 헤어지는 거 빼고 전부 다.”
“하……. 그냥 헤어지기나 해 줘. 그리고 한 기장 외할아버지한테 가서 나랑 헤어졌다고 말해. 제발 부탁이야. 나 그 음성 꼭 필요해.”
“넌 문 회장한테 아무것도 못 얻어 내. 나 그 사람 잘 알아. 그러니까 나한테 말해. 내가 해 준다잖아. 제발 날 좀 이용해 줘. 부탁이야.”
“…….”
“아버지 사고 당시 음성이라는 게 뭔지부터 설명해. 내가 찾아볼 테니까.”
사실 차영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란 짐작 정도는 이미 넘치게 하고 있었다. 문 회장의 제안대로 어딘가 멀리 떠날 용기도 없었고, 이렇게 무모하고 분별없이 나오는 태주를 문 회장의 입맛에 맞게 행동해 달라 설득할 여력도 안 남았다. 그러나 음성만은 꼭 찾고 싶었다. 태주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움을 받는 게 현명했다.
하아. 무거운 숨을 몰아쉰 차영이 힘겹게 입술을 벌렸다. 음성은 축 가라앉았다.
“사고 당일 경비행기 내부 음성이 그쪽 외할아버지한테 있다고 들었어. 아마 인근 관제소랑 교신했던 음성 녹음본이거나 아니면 잔해에서 발견된 기내 녹취 파일 같아. 그게 필요해.”
차분하게 차영의 대답을 곱씹던 태주가 의아한 듯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그런 게 있다고? 확실해?”
“문 회장이 그렇게 말했어.”
그의 외할아버지가 그렇다니 전말을 모르는 차영으로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단지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인간에겐 누구나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가능한 한 긍정적인 결말을 도출하려는 본능이 있었다. 차영에겐 그게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거라도 있다면 제 슬픔이 아주 조금이나마 희석될 것 같았다.
“일단,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찾으면 연락 줘. 그때까진 우리 얼굴 안 봤으면 좋겠다.”
제 용건을 모두 마친 차영이 일방적으로 먼저 돌아서려 했다. 그러자 태주가 본능적으로 붙잡았다.
“이거 놔.”
태주의 체온이 제게 닿는 게 미칠 듯 가슴 설레고 마냥 떨리던 때도 있었으나, 이젠 순진했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일었다.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 뒤 대체로 그랬듯 차영은 또 다시 그의 손을 밀어냈다.
“차영아.”
“내 생각은 확고해. 우린 헤어졌어.”
“우리 헤어진 적 없어.”
“헤어졌어. 하지만 난 필요한 게 있으면 한 기장 이용할 거야. 이게 싫으면 나 도와주겠다느니 그런 소리 취소하고, 전부 관둬도 돼. 안 말려.”
아직 미세하게 물기가 남아 있는 속눈썹 위를 제 손등으로 씩씩하게 훔친 차영이 아연해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주를 분명하게 직시했다.
“그리고 다신 나 함부로 만지지 마. 메스꺼워.”
태주에게 멀리 떨어지려 한 걸음을 더 물러선 차영은 뒤쪽의 비상구 출입문을 확인하고, 가겠다는 인사조차 없이 빠져나갔다. 태주는 황급히 쫓아나가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어 계단 위쪽을 힐끗 살폈다.
회장실 근방의 비상계단인데 이곳에 폐쇄 회로 카메라가 없을 리가 없었다. 자신은 괜찮지만 늘 외부에 노출되는 문제를 염려하는 차영에겐 크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비열한 수를 쓰기를 서슴지 않는 제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도 눈에 훤했다.
보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내려온 길을 고스란히 거슬러 올라갔다.
* * *
관제탑은 언제나 그렇듯 분주하게 돌아갔다. 이 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고, 또 사라지든 아무런 관계없이 비행기는 저마다의 일정으로 떠오르고, 또 하강해야만 했다.
휴가를 떠나겠다고 했던 날 초췌한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냈던 차영은 약속한 휴식일이 모두 지난 뒤에 그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난감한 몰골로 나타났다. 더 쉬어야 되는 게 아니냐면서 동료들이 그를 만류했으나 그곳이 그나마 안전하고, 또 안정적으로 느껴져서 일할 수 있다고 탑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이륙 직전인 비행기들의 개수를 가늠해 보고, 순서를 매기던 차영은 잠시간 모든 행위를 멈추고 화면만 응시했다.
“차영 선배, 한국 항공 이륙시키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안 하세요? 계속 홀딩 중인데.”
“아 응, 지금 활주로에 새 있어서. 조류 퇴치반 움직이고 있거든. 곧 할 거야.”
그가 대답하는 사이, 망원경으로 탑 너머를 내다보고 있던 탑장이 차영의 옆에 끼어들었다.
“제비 보이면 봄이고, 두루미 눈에 많이 띄면 겨울이고. 철새들도 참 힘들겠어.”
“아직 겨울도 안 왔는데 벌써 새 많이 보이네요.”
“올겨울 추울 건가 보다. 참, 조류 퇴치 전담 팀엔 연락했어?”
“BAT요? 방금 했어요. 드론 띄운다는 것 같던데요.”
차영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모니터에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교신이 들어와서 장비를 고쳐 쥐고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 「타워 들립니까. 한국 항공 901입니다. 계속 이륙 대기 중인데 활주로 정비 아직입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차영은 최대한 덤덤하게 업무적으로 내뱉었다.
「타워입니다. 한국 항공 901. 현재 활주로에 버드 스트라이크가 감지됐습니다. 항공기에 충돌하거나 엔진에 빨려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담당 센터에서 드론 띄워 퇴치 중이니 앞으로 3분만 더 이륙 대기를 명합니다.」
- 「…….」
「한국 항공 901. 들립니까?」
- 「들려. 그냥 듣고 있었어. 듣기 좋아서.」
나지막한 음성을 들은 차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황급히 교신 장비를 내려놓고 옆자리의 후배에게 관제를 이어 해 줄 것을 부탁했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차영을 탑장이 힐끗 보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어딜 가는지, 왜 갑자기 나가려고 하는지 묻지는 않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아마 자신에게 최근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는 모양이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쳐 모퉁이를 돈 차영은 완전한 혼자가 되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태주…….’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되새기며 차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편의점에서 생수와 애완동물용 간식 몇 가지를 사 들고나온 차영은 건물 구석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강아지가 차영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얼쩡거리는 털색이 비슷한 길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너도 이 동네 살아? 처음 보는데.”
고양이는 차영이 육포와 물을 꺼내서 주자 조금 먹는가 싶더니, 그가 털을 조금 만지작거리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배를 까서 내보였다. 이 고양이 역시 강아지처럼 이미 사람 손이 많이 탄 것 같았다. 둘 다 애교가 많았다.
“너희 둘이 눈 맞아서 결혼하면 안 되는 거거든? 이종 교배 뭐…… 그런 거야. 원래 절대 안 되는 사이도 있거든. 아마 짐승이니까 본능적으로 알겠지만…….”
강아지와 고양이가 저들끼리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차영은 문득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올해 겨울은 탑장의 말대로 좀 추울지도 모르겠다. 보통 여름이 더우면 겨울이 춥다고들 하는데 지난여름의 기상 뉴스들을 돌이켜 보면 꽤 무더웠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쪼그려 앉아 있던 그는 고개만 슬쩍 돌려 제집의 건물을 쳐다봤다. 아버지의 음성을 구하게 되면, 저 집에서도 이사를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집주인이 태주인 것도,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될 것도 마음에 걸렸다. 터무니없이 저렴했던 전세는 자신이 운이 무척 좋았던 게 아니라 그저 태주가 기회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씁쓸했다.
“이사 가면 너희랑도 안녕이겠다.”
강아지의 복슬복슬한 털을 만지작거리던 차영은 순간 귓가에 이명처럼 소리가 길게 울려 깜짝 놀랐다.
〈네 옆에 사람 있다.〉
그는 황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오늘 비행기를 타고 프라하로 떠난 이 음성의 주인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괜히 애꿎은 아스팔트 위만 물통으로 툭툭 내려쳤다. 한번 생각난 음성은 엔진이라도 단 양 끊임없이 이어져 떠올랐다.
〈넌 원래 정이 그렇게 많아?〉
〈착하고.〉
〈끌어안는 거 안 되면. 키스는 해도 돼?〉
다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산다.
누구나 자신들만이 특별한 것 같다는 착각에 쉬이 빠지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연애는 안타깝게도 그들만 하는 게 아니며, 태주와 자신이 함께 영위한 시간은 그리 길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모든 기억은 흐려지고, 추억은 빛바래고, 감정은 퇴색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차영은 왠지 그의 근사한 중저음의 목소리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태주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 해씩 자랐다.〉
“어쩌라고.”
그간 잘 크는지 지켜봐 줘서 고맙다고 감동이라도 해야 돼?
“나쁜 새끼.”
태주의 음성이 사방에서 불꽃 터지듯 터져 댔다. 그게 괴로워서 혼자 툴툴거리던 차영은 결국 눈물이 날 것 같아 제 무릎 위에 푹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