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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89화 (89/144)

89화

“한태주…….”

혼잣말을 하듯 그의 이름을 곱씹는 사이, 태주가 오직 차영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집무실 가장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의 등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딸칵,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이차영, 괜찮아? 내가 여긴…… 혼자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마치 자신을 보호하듯 앞을 막아선 태주 덕분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그가 너무 미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차영은 그를 보게 된 이 순간 무척 안심됐다.

그리고 문 회장은 태주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게 지금까지 차영이 한 그 어떤 말보다도 화가 났는지 물컵을 태주에게 던져 버렸다.

턱! 그의 어깨에 거세게 맞고 떨어진 유리컵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태주의 옷자락은 한쪽이 전부 젖었다. 그런데도 그는 축축해진 부위를 힐끗 쳐다보는 기색조차 없었다. 유리컵의 파편들을 지르밟고 차영의 손목을 붙잡아 자리에서 묵묵히 일으켰다. 그러고는 문 회장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 문젠 저랑 이야기하세요. 분명히 말씀드렸잖습니까.”

“글쎄다. 선후 관계가 틀렸다. 먼저 찾아온 쪽에 책임을 물어야지.”

“회장님은 원인과 결과가 틀리셨습니다. 이차영이 백 번을 먼저 찾아와도 책임은 회장님한테 있어요. 저 제가 아는 거 차영이한테 다 말했어요. 차영이도 다 알아요. 그러니까 입이 뚫려 있어도, 회장님은 이차영이랑 흥정을 하시면 안 돼요.”

제 할 말을 덤덤히 전하는 태주를 지켜보던 문 회장의 눈이 상대를 탐색하듯 가늘어졌다. 지금부터 그가 어떻게 할지를 지켜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자신을 누가 어떤 눈으로 보든, 말든 태주의 시야에는 오직 차영뿐이었다. 그는 버티고 서 있는 차영을 좀 더 제 뒤쪽으로 숨기듯 잡아당겼다.

“넌 따라 나와.”

“이거 놔.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나와!”

그는 버럭 소리쳤다. 여태까지는 들어 본 적 없는 무척 고압적이고 냉정한 음성이었다. 깜짝 놀란 차영이 후속 행동을 못 하고 머뭇대는 사이, 태주가 억지로 차영을 끌어당겼다.

차영의 손목을 붙든 채로 막무가내로 집무실을 빠져나오자, 안 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태주로부터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알 길이 없어 긴장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그런 비서들에게도 시선 한 자락 주는 법이 없었다.

빠르게 비상계단 쪽으로 차영을 밀어붙인 그는 쫓아오지 말라는 듯한 손짓만 안 실장에게 보내고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자칫하면 넘어질 뻔한 차영은 별반 저항도 못 하고 딸려 갔다. 붙들린 손목이 너무 아팠다.

이윽고 한 층가량 아래로 내려왔을 때라야 태주가 내던지듯 차영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타악! 내동댕이쳐진 차영의 상체가 딱딱한 벽에 부딪혔다. 통증을 느낀 차영이 날카롭게 소리쳤으나 태주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꽤 흥분한 듯했는데, 그건 어울리지 않게도 어떤 크고 아득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차영을 내던진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휴대폰을 어깨 위로 난폭하게 던졌다. 툭, 제 몸에 맞고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주머니에 넣은 차영이 그에게 너무 억세게 쥐여 있던 탓에 살짝 붉어진 자신의 손목을 매만졌다.

진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태주가 선물한 시계를 차마 찰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른 걸 차기도 기분이 오묘해서 관뒀다. 마치 맞지 않는 시곗줄이라도 오래 찼다가 뺀 것처럼 그 자리가 고스란히 부어 있었다.

“너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와.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돼? 문 회장 아주 잔인한 사람이야.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여길 혼자 오면 어쩌자는 거야!”

태주는 저 안에서 문 회장과 독대하고 있었던 차영을 본 순간 느꼈던 아찔함을 되새기자 구역질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차영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스토커처럼 쫓아온 한태주 씨가 더 잘 알겠네.”

“이차영 제발……!”

절박하게 내뱉은 그의 음성이 울먹임과 뒤엉킨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여태 여러 가지 그의 모습을 봐 왔지만 당장 울음을 토해 낼 듯 괴로운 표정으로 호흡 조절조차 제대로 못 하는 광경은 처음이다. 덕분에 차영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겁이 없는 거야, 멍청한 거야. 저 사람들이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어려워 보여? 너랑 내 아버지 사건 알면서도 바보같이 굴래? 문 회장한테 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거? 일도 아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여길 올 생각을 왜 해! 안전지대로만 다녀도 모자랄 판에! 누구 속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어?”

“앞으로 한 기장이 어떻게 사는지 나랑 관계없어. 속이 뒤집어지든 말든.”

“그딴 엿 같은 소리 좀 집어치워! 나더러 너까지 잃으라는 거야? 내 뒤에 꽁꽁 숨어 있어도 지켜 주기가 버거운데 왜 자꾸 엇나가, 왜!”

눈을 마주치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계속 제 손목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려 태주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가가 분노와 걱정으로 일렁이는 게 들여다보였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제 얼굴을 보고 뭘 읽어 냈을까.

안전 불감증에 걸려서, 또는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돼서 여기에 혼자 온 게 아니다. 물론 앞뒤를 안 재 보고 달려온 건 맞지만 터무니없는 객기를 부리려던 것도 아니었다.

문 회장 같은 노회한 작자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위험천만한 상황에 몸을 내던지는 것. 그래야 상대도 제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협상에 응해 올 터라는 판단에서 벌인 일이다.

“너 뭔데 나한테 화내? 너한테 그럴 자격 있어?”

“내 감정 내 거니까 멋대로 하라며. 널 좋아하든 말든 네 소관 아니라면서! 난 너 안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할 거야. 어떻게든 너 지킬 거고! 무엇보다 이 연애도 끝까지 지속할 거야. 내 마음 내 거니까. 우리 시작할 때 상호 동의했지. 끝도 마찬가지야.”

막무가내로 나오는 그를 설득할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한 차영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자 태주가 덧붙였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소용없어. 네 어머니한테 어마어마한 슬픔 하나 더 얹어 드릴래? 승산도 없이 문 회장을 쓸데없이 너무 자극하지 마.”

“한 기장은, 안 죽어? 댁이나 잘해. 그쪽 외할아버지 성질 긁어 대는 꼴 보아하니 나보다 한 기장이 먼저 죽을 것 같으니까.”

“문 회장은 본인이 자살하는 한이 있어도 난 안 죽여. 왜? 자기가 평생 몸 바친 회사 남 주긴 아깝거든. 그런 탐욕스럽고 비상식적인 인간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을 해!”

“그럼 나랑 헤어져 줘. 그쪽 외할아버지가 단번에 납득이 갈 정도로 완벽하게 우리를 분리하고, 그 사람 밑에 들어가서 일도 하고, 양자도 돼 줘.”

“뭐?”

시종일관 미간을 찌푸리고 분노를 토해 내던 태주가 순간 무척 황망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든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왜 내가 문 회장 밑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고 양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아버지 사고 당시 음성 넘겨준다잖아!”

“음성?”

아버지의 육성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는 건 태주도 모르는 영역이었던 것 같았다. 그가 의아하게 차영에게 되물었으나, 의미 있는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차영이 불쑥 단전에서부터 억울한 마음이 차올랐는지 그를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소리 질러, 왜 나 윽박질러. 네가 뭔데, 개자식아! 너만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난 이런 거 모르고 그냥 가끔 울고…… 그냥 살았잖아. 그 정돈 다들 울어. 그런데 너 때문에 더 억울하고 분해서 난 매일 울게 생겼어. 그런데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나한텐 없어! 저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이겨!”

대관절 어째서 우리가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쁜 짓을 한 건 문 회장과 그의 주변 사람들이고, 죽어 버린 건 또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인데. 고통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남겨진 두 사람이 죄다 몰아서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하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차영은 그의 외할아버지가 나쁜 짓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무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데 또 함부로 덤비기엔 자신이 너무 볼품없고 나약해서 두려웠다.

무엇보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태주를 생각하면. 그의 말대로 슬픔을 하나 더 얹게 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소한 차영은 평생 그를 잊지 못하게 되리라.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의미로든 말이다.

소리 높여 태주를 비난하던 차영은 결국 가쁘게 호흡을 몰아 내뱉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그걸 느낀 태주가 제 손을 달싹이다가 차영의 어깨 위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차영을 와락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차영이 움찔했다. 벗어나려 몸을 비틀어 대자 태주가 더욱 강한 손아귀 힘으로 차영을 포박하듯 안았다.

“1분만. 좀 안아 주자.”

한참 버둥거리던 차영은 그를 더 밀어내고 싶어도 더는 여력이 없어 엄두가 안 났다. 사실은 조금 전 문 회장의 앞에서 지나치리만큼 긴장하고 있던 터라 지금 자신이 두 다리로 어떻게 땅을 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신 바르작거리던 차영은 결국 온몸에 전류가 도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의 품에 안겨서 서러움을 토해 냈다. 저항이 잦아들었다고 느꼈는지 태주가 차영을 감싼 팔에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마침내 우는 차영을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안고, 마른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위로엔 서툴지만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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