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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88화 (88/144)

88화

대영 한국 항공의 본사 사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일부러 목적을 가지고 위용 넘치게 지어 놓은 것인지 건물이 무척 높고 외관이 화려해서 들어가기도 전부터 방문자의 기를 죽일 듯했다. 그러나 두어 번 문 회장과 독대를 해 본 차영은 그의 앞에서 어깨가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는 순간 승부를 걸어 볼 틈도 없이 무너지게 되리라는 것을 배웠다.

어깨를 펴고 로비로 들어선 그는 상냥한 미소를 보이는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저 문현기 회장님 출근하셨나요? 면담 요청하러 왔는데요.”

“미리 약속하셨습니까?”

“약속한 건 아닌데, 제가 누군지 설명하면 아마 만나 주실 거예요.”

“아……. 실례지만 소속이 어디십니까?”

“저 소속은 따로 없고, 이차영이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서실에 먼저 문의드리겠습니다.”

사실 퇴근 시간에 맞춰 문 회장의 자택으로 찾아가는 편이 자신이 꺼낼 이야기의 은밀함을 고려한다면 더 적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며칠 전 본의 아니게 감금되어 있었던 곳이 태주의 본가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어서 그쪽으로는 발걸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차영이 비서실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이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프런트 직원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임원진 전용 승강기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걸 타고 올라오시랍니다.”

특권을 누리고 살아온 사람들은 저게 당연한 것인 줄 알지만, 평범한 사람인 차영은 특정 집단을 위한 전용 승강기라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더 자신이 모르는 그들만을 위한 권리들이 차고 넘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마 저층부터 29층까지에 해당하는 층수 버튼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위부터를 임원들이 사용하는 것 같았다. 차영을 홀로 태운 승강기가 서서히 상승 기류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계기판의 숫자도 함께 하나씩 올라가는 동안, 그는 훤히 뚫린 유리 너머를 내다봤다. 빌딩 근방의 풍경들이 내려다보였다. 건물 정문 바로 앞은 도로변인 데다 주변에 삭막한 빌딩들이 밀집해 있긴 하지만, 또 그리 멀지 않은 근처에 숲이 보이고 강도 흘러서 시야는 퍽 장관이었다.

어느 틈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무심코 계기판을 봤는데 이곳에는 층이 없었다. 천천히 내리니 비서실이 웬만한 팀의 사무실보다 훨씬 커 보였다. 일일이 센 건 아니지만 눈대중으로도 직원만 벌써 열 명이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안 실장이 꾸벅 인사해 보이며 차영을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다른 직원들도 일어서서 차영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비서들이 제자리에 앉아 있었던 터였다. 그들의 서열 판단 기준은 안 실장이 취하는 태도인 것 같았다.

“이차영 관제사님, 오셨습니까.”

차영은 움찔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들을 때마다 계속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기만 하더니, 한 번 과거를 인지하고 나니까 어릴 때 들어 본 목소리란 것을 알 것 같았다.

“회장님 안에 계신가요?”

“네, 방문 의사 전해 드렸더니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천히 차영 쪽으로 다가온 안 실장은 이곳이 마치 공항의 수색대라도 되는 것처럼 차영의 몸을 점검했다. 그러고는 차영에게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이 없다고 여겼는지 휴대폰만을 반납하게 하고 그제야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기척이 들렸다. 그가 기민하게 그것을 알아채고 문을 열었다. 이윽고 묵례해 보인 그가 차영을 앞세웠다. 동시에 뒤편에서 도로 문을 닫았다.

정면의 상석에 문 회장이 버티고 있는 게 바로 보였다. 구도가 익숙해서인지 명부전에서 저 노인을 마주 봤던 일이 떠올랐다. 문 회장도 그 일을 의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안 실장을 내보낸 상황까지 똑같았다.

차영은 사념과 공포를 함께 털어 내기 위해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저벅저벅 걸어 그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의외로 꽤 흥미롭다는 눈길로 차영을 주시했다.

“날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겁이 없구나.”

“이제 회장님이 절 해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전에는 나한테 그런 의사가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네 오해란다.”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은 차영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오늘 날 찾은 이유는?”

“헤어졌습니다, 한 기장이랑.”

“태주 놈 생각이 그러니?”

“제 의사가 중요하죠.”

“아니야. 태주 의사가 훨씬 더 중요하지. 내가 좋아하는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동물이 평등해도, 어떤 동물은 그보다 훨씬 평등하다고.”

“요즘 같은 시대에 계급주의자신지는 몰랐는데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있기 마련이지.”

“사리 분별 못 하고 시대착오적이시라는 말을 돌려 한 건데, 말귀가 좀 어두우신 것 같네요.”

시종일관 너그럽고 유연한 태도를 고수하던 문 회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은은하게 입매에 걸려 있던 미소는 사라졌다. 차영이 이곳에 싸우고자 왔음을 인정해 주고, 또 자신의 방식대로 받아 주겠다는 의사 표현 같았다.

그의 눈빛이 변하자, 애써 되바라진 흉내를 내고 있던 차영은 내심 맨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부디 눈앞의 상대에게 제 긴장이 전이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일단 말을 해 봐. 판단은 듣고 하마.”

“한태주한테서 떨어져 나가 드렸어요. 그러니까 이제 저희 아버지 육성 넘겨주세요.”

“그건 당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이었고. 너희 두 사람이 분리됐다는 확신은 어떻게 줄 거지?”

이는 무척 무책임한 발언이다. 차영은 발끈했다.

“결국은 그냥 말장난 같은 거잖아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회장님이 확신이 안 선다고 말하면 끝인 거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치사해 보이니? 그래서야 이만한 규모의 기업체 수장이라고 어디 가서 말 못 하지. 난 신의로 일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 일에 앞장서고 본을 보이니까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그다지 너그럽지 못할 수 있는 거야.”

“제가 뭘 하면 믿으실 건데요?”

“이쪽 생활 정리하고 어디 멀리 가서 숨을래?”

진짜 별 이야기를 다 듣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오래된 통속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제 일상이 흘러가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구태의연하고 촌스러웠다.

한태주만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지루하고, 때론 외롭기도 했겠지만 최소한 이런 추잡한 꼴을 보지 않아도 됐다.

제 아버지의 사고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됐는데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비참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권력의 크기를 가늠하지도 못할 권위자에게 기절한 채 끌려가거나 하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을 일이었다. 무엇보다 하필이면 가장 최악의 선택지와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을 자책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오직 그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달콤함은 짧고 씁쓸함은…… 얼마나 길어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래가 아득했다.

“제 일은 어쩌고요.”

“돈이 필요하면 주마. 네 아버지가 우리 항공사 기장이었으니, 직원 복지 한다고 생각하마.”

“필요해지면 말씀드리죠. 지금은 입에 풀칠할 정도론 법니다.”

“관제사를 관둘 생각이 없단 말이구나.”

“없습니다. 시험 보고 정정당당히 합격했어요. 철 밥통을 왜 걷어찹니까. 회장님이 뭐 얼마나 떼어 주실 줄 알고요. 한 수천억 주실 건가요? 한태주는 제가 그걸 받을 자격이 있다던데요.”

문 회장은 가볍게 웃었다.

“너 대체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굴 닮았니? 아주 건방진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문 회장이 일부러 제 부모님을 입에 올린 것이라는 부분은 너무나 잘 알겠다. 몹시 모욕적이었다. 차영은 착하지만 순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문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기를 불사했다.

“원래 아버지 없이 큰 아이들이 쉽게 이렇게 됩니다. 보호막이 없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거든요. 한태주 기장도 못 배워 먹고 꽤 건방지던데. 그건 회장님이 더 잘 아시겠죠.”

“어느 안전이라고 계속 그 이름을 입에 올려!”

“저도 회장님 앞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요. 음성이나 주세요. 헤어졌다잖아요.”

“태주를 설득해.”

“제가 왜 이미 헤어진 상대를 설득하기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태주한테 바라는 건 단순히 너와 헤어지는 게 아니다. 네까짓 거? 얼마든지 데리고 놀 수 있어. 그놈이 너 같은 아이 수백 수천 명을 데려와도 난 눈 하나 깜빡 안 한다. 그 애가 전부 내려놓고 내 밑으로 들어와서 양자가 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어쩐지. 뭔가 미묘하다고는 줄곧 느꼈다. 자신 같은 민간인 하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문 회장이 직접 공항으로 찾아와 만남의 자리를 갖고, 또 제 수족들을 써서 눈앞에 대령하게 만든 데다가, 태주가 자신을 찾아 모셔 갈 때까지 치료와 함께 방치해 뒀다는 건 이상하게 보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이상했다. 마치 그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듯했다. 자신을 매개체로 태주를 자극해 그를 설득하는 데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회장님께 납치 감금으로도 모자라 폭행까지 당했다고 경찰서에 가서 진술하겠습니다. 법리로 다투길 바라세요?”

“네가 강단은 봐 줄 만한데 세상 물정은 아직 잘 모르는구나. 뭘로 다투든 넌 지게 돼 있다.”

물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저 회장님이 우리 아버지한테 무슨 몹쓸 짓 했는지 다 알아요. 그래도 하라는 대로 굴욕적으로 기어들어 와서, 우리 아버지 마지막 음성 그거 하나 달라는데……! 그걸 대체 당신이 왜 가지고 있는 건데! 더러운 사람 손에 쥐어져 있으면 아무리 깨끗한 물건에도 더러운 게 묻어. 당장 돌려줘.”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는 하극상에 분노한 문 회장이 제 손아귀에 잡힌 물컵을 꽉 쥐었다. 시종일관 냉정한 태도로 평정을 유지하던 그가 표정에 화를 내비치자 차영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윽고 문 회장이 컵을 차영에게 던지려고 손을 뻗는데, 동시에 뒤편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잠시 비서실의 업무 환경을 살펴본 게 다였지만 문 회장의 집무실은 어떤 불가침 구역 같았다. 반드시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고, 여기에서 내리는 지시는 바깥의 모두에게 절대적인 그런 신전 같은 장소 말이다. 그런데 노크 하나 없이 무례하고 뚫고 들어오고자 하는 이가 있었다.

“이거 놔.”

문이 반쯤 열리자 매우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신이 사랑에 빠지는 데 크게 공헌한 아주 낮고 근사한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은 차영이 묘한 불안으로 괜히 주먹을 꽉 쥐어 봤다.

아니나 다를까. 만류하는 비서들을 강하게 뿌리치고 어떤 키가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눈매의 그는 숨을 몰아쉬며 거침없이 들어와선 차영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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