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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87화 (87/144)

87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제 하루는 지금까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것에 관한 사실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정신없이 보냈는데 한번 냉정함을 되찾자 그때부터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났다. 자신은 아직 태주의 외할아버지와 끝내지 못한 중요한 용건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육성을 구하는 일이다.

거기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모른다. 직접 들어 보고 판단하면 될 일이다. 애초에 별로 중요한 내용이 녹취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고, 있었대도 아마 문 회장이라면 핵심적인 부분은 다 쳐 내고 넘겨주리라.

아마 앞으로도 거창하게 복수 같은 건 하지 못할 것이다. 차영은 사리 판단이 빠르고 현실적인 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한 기업체를 이끌어 가는 그를 상대하기에 자신은 너무 작고,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필요했다. 죽기 전 마지막 음성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사고의 판을 짠 문 회장 쪽에서 지니고 있다는 건 용납이 안 됐다.

퉁퉁 부은 얼굴로 집 밖으로 나온 차영은 차에 시동부터 걸었다. 뭔가를 마음 깊이 결심한 듯 분연히 걸어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가 제 뒤를 급히 쫓는 것을 느꼈다. 순간 지난번에 제집에 무단으로 침입했던 문 회장의 수하들은 아닐까 마음을 졸였으나, 몸이 먼저 그들이 아님을 알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

“이차영, 너 지금 어디 가는데.”

“상관 마. 난 내가 해야 할 이야기 다 했어.”

“잠깐 기다려.”

“나 또 내 안전 문제 걸고 협박해야 돼? 그래야 관둘래?”

차갑게 등을 보이며 차에 타려는 차영의 앞을 태주가 막아섰다. 그는 운전석을 향해 뻗은 차영의 손을 강제로 밀어내더니, 반쯤 연 차 문마저 거칠게 닫았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막아서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끝났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주어야 그가 납득할지도 아직까진 흐렸다.

“한 기장, 본인 외할아버지 닮았구나. 기질이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 거. 이제 보니 똑같다.”

“기대를 망쳐 미안하지만 나 외할아버지, 안 닮았어.”

태주의 음성이 어울리지 않게 쓸쓸했다. 그러나 차영은 그에게 상처 주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기꺼이 헤어짐 외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여태 네가 나한테 함부로 했던 모든 짓이나 되돌아보고 말해.”

“꼭 해야 될 말이야. 어제는 예전 일 이야기하느라 미처 설명을 못 했어. 듣고 가.”

“못 하신 분 혼자 해. 난 들을 의무 이제 없어.”

“너 대체 지금 어디 가는데. 문현기 회장 만나러? 거긴 혼자 가면 안 된다는 거 몰라?”

다신 그에게 웃는 얼굴 같은 건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 말도 한 적 없으나 이미 그가 제 행선지를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너 내 집에 도청기 같은 거라도 심었어?”

“그런 짓 안 해. 나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안 할 거 알잖아.”

“아니, 나 전혀 모르겠는데. 우리 사이의 신뢰를 먼저 깬 게 누군지, 잊은 건 아니지?”

“물론 나야. 회피할 생각 없어. 하지만…….”

이 대답의 말허리를 잔혹하게 끊어 낸 차영이 코웃음 쳤다.

“하지만? 내가 단순히 사실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아서 이래? 넌 내 자존심과 엄마 아버지에 대한 의리, 사랑 다 짓밟았어. 뭐 나라를 구한다거나 정의를 수호한다는 대단한 이유도 아니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런 거였지. 그래 놓고, 하지만? 그 뒤에 무슨 말씀을 하실 건데?”

“나라를 구하는 일이나 정의 수호보다 나한텐 훨씬 납득되고 충분한 이유였어.”

“와, 너 진짜 개새끼다. 이건 쓰레기장에서 소각도 안 되겠네.”

“내가 억지 쓰고 있는 거 알아. 나 얼마든지 함부로 대해도 돼. 그래도 난 앞으로 계속 너 좋아할 거야.”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차영이 버럭 소리치자, 계속 침착하게 응수하던 태주도 조금 울컥해서 언성을 높였다.

“왜 말이 안 돼? 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이 짓 계속할 거라고. 난 자신 있어. ‘아! 지겨워서 그냥 계속 사귀어 줘야겠다’ 소리 네 입에서 나올 때까지 질척거릴 거야. 그런 각오도 없이 네 앞에 나타났을까 봐?”

태주가 제발 자신을 좀 쳐다봐 달라는 양 차영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여 눈을 분명하게 마주치려고 들었다.

어제도 그에게 직접 말했다시피 아직 차영은 그가 좋았다. 치달아 있던 감정을 하루아침에 두부 자르듯 잘라 내는 건 불가능했다. 단지 본능적으로 여기서 더 가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밀어내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그래서 눈을 보면 설레고, 한편으론 흔들렸다. 이렇게 휘둘리는 일분일초가 죄스러워지는 순간이 오리라곤 상상 못 했다. 아랫입술을 힘껏 깨문 차영이 그를 뿌리치기 위해 제 몸을 비틀었다. 쉽지 않았다.

“이거 좀 놔!”

“차영아, 나한테 이러지 마. 이해해 달라는 거 아니야. 미워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야. 단지 조금만…… 나를 참아 줘. 응?”

“적반하장도 이 정도면 병이다. 이러지 말라는 소린 내가 그쪽한테 해야 맞는 거 아냐?”

차갑게 태주를 쏘아보는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았다. 분명히 연민과 사랑이 깃들어 있었으나, 그 기저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 적대감들이 마치 어둠처럼 도사렸다.

“제발 그냥 나는 나로 봐 주면 안 돼? 나는 그냥 한태주고…….”

“한태주 씨, 내가 그냥 이차영이었으면 그쪽이 나 좋아했을까? 너랑 난 서로가 같은 남자에 생활 습관도 활동 범위도 너무 달라. 나 같은 거 안중에도 없고 어디에 사는지, 뭘 먹고 입는지 관심도 안 줬을 거란 생각 안 들어? 아마 평생 안 마주치고 살았을 거야, 우린. 너 그냥 평범하게 여자 만나 연애하고, 결혼도 했겠지.”

“그랬을지도 몰라. 그래도 널 어떻게든 알게 됐다면 난 반드시 널 좋아했을 거야.”

“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정신 승리 하는 건 네 소관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래도 우린 부모님 문제를 분리해서 존재할 수도, 서로를 볼 수도 없어. 왜냐하면 나한테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

“나도 그냥 한태주일 때는 너 좋아했어. 그런데 내 부모님 원수 외손자는…… 네가 나 대신 그 사람을 죽여 주지 않는 이상 나 평범한 사람이라 도저히 그렇게 못 하겠어. 이제 진짜 비켜.”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상대에게 없어 보였는지, 차영이 그를 직접 완력으로 밀어냈다. 실제로 순순히 밀려나 줄 생각이 전혀 없던 태주가 좀 더 오래 차영을 붙들어 두려고 했다.

그러자 차영이 갑작스럽게 태주의 멱살을 확, 잡아챘다. 그는 태주가 제 상체를 방어하는 데 집중하게 만들더니 뒤이어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억, 하면서 허리를 숙인 태주의 빈틈을 공략해 그를 밀어내고 결국은 탑승에 성공했다. 그 바람에 겉옷 대용으로 손에 쥐고 있던 얇은 회색 셔츠가 툭 떨어졌다. 그러나 문을 열어 그걸 줍는다면 또다시 태주에게 붙잡힐 게 자명했다. 완력 차이가 있어 편법을 쓰지 않는다면 그를 이기는 게 어려웠다. 그렇다면 저걸 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벨트를 매면서 차량의 문을 단단히 잠그자, 창밖에서 태주가 창문을 두드렸다. 차영은 쳐다봐 주지 않았다. 그저 후면을 보면서 후진을 시도했다.

“차영아, 차영아! 문 회장 보러 가지 마. 그 사람 절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아니야. 그 문젠 내가 부딪쳐서 해결하게…… 이차영!”

태주가 절박하게 붙잡아 봤으나, 이윽고 야외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영의 차는 뒤꽁무니마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제 차에 시동을 걸던 태주는 차영이 서 있던 자리에 떨어진 얇은 셔츠를 주워 들었다. 희미하게 그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당장 차영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제 침대 위에 눕히고 싶은 파괴적인 욕망과 이렇게 냉랭하게 나오는 그가 이해가 되고 마는 정반대의 감정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하…….”

그는 낮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제 차영은 본인에게 직접 선택할 시간을 주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태주를 좋아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에 기댄 너무 단편적인 시각이다. 비명에 죽은 아버지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던 차영에게 제 외할아버지가 그분을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가족에게 애틋했던 그는 자신을 쳐다봐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함께 있고 싶었고, 그가 울 때 곁에서 안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비겁했던 건 맞지만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그걸 골랐을 터다. 자신이 무슨 마음으로 그의 앞에 정체를 드러냈던 건지 그 심경만은 헤아려 주길 바란다면 너무 욕심이 많은 것일까.

“차영아, 제발…….”

아련하게 코끝에 맴도는 차영의 향기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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