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86화 (86/144)

86화

태주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차영이 네 짐작이 맞아. 우리 외할아버지가 사주한 일일 거야. 아니, 확실해. 아버지가 사고로 죽던 날 밤 외할아버지가 안 실장과 함께 내 침실에 찾아왔었어. 내 목을 졸랐지. 살려 둘지 말지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어. 결국 살려 줬고.”

“…….”

“난 살아남았어.”

그날 이후 외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사는 동안, 그는 하루하루가 공포였다. 밤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언제든 다시 총구를 겨눠 자신마저 죽일지도 모르는 외할아버지가 아래층에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어린 태주를 밤마다 재워 준 게 외할머니였다.

사고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모두 알고 행한 일이었다니 그녀를 향한 원망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이 이럴진대, 차영이 느끼고 있는 배신감은 더한 게 마땅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며칠 뒤 사고 현장에 잔해 수습한대서 거길 찾아갔다가 널 봤어. 그렇게 어린 네가 상복 입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어. 또 현장에서 비 맞으면서 도와줄 사람을 찾는 네 어머니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안쓰럽고…… 꼭 나 같았어. 난 쫓아다닐 사람이 없었다뿐이지 그러고 싶었거든.”

“…….”

“그때부터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 해씩 자랐다.”

사고 직후라는 건 차영에게 너무 오래전 일이다. 너무 어렸던 터라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기도 했다. 안 실장이 아버지를 찾아왔던 날의 기억처럼 무의식에 깊이 묻혀서 아주 어렴풋한 느낌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 실장을 다시 보게 됐을 때처럼 뭔가 계속 마음에 걸리지는 않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때의 자신은 태주를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한참을 태주의 말을 곱씹던 차영이 괴롭게 입을 벌렸다.

“나를 보면서? 내 피 빨아먹고 네가 컸다는 이야기 하는 거야?”

“차영아.”

“결국 이 긴 대화를 한 줄로 정리하면 한 기장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 정말 설마설마했는데…….”

침착한 목소리의 끝이 끝내 조금 떨렸다.

“내 앞에 왜 나타났어?”

“널 오래 지켜봤어. 아주 오래. 언젠가부터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

“동정이야? 아니면 죄책감?”

“네가 좋아서.”

“이게 사랑이라고? 그게 가능해? 착각이나 정신병 아니고?”

“난…….”

“네가 무슨 염치로 날 좋아해?”

그 문제 관한 한 태주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줄은 알았는데 정말 제멋대로다. 네까짓 게 무슨 염치로…… 무슨 자격으로 나 좋아하는데. 그래 봤자 너희 외할아버지고, 네 아버지야. 그 두 사람 사이만 원만했어도. 아니, 애초에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너한테 생명을 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우리 아버진 안 죽을 수 있었던 거네? 네가 이 역겨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나 있어?”

한국에 공항이 수백, 수천 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제 앞에 나타난 것까진 백 번 양보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자신과 사랑에 빠지고자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 번 양보해서 정말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면, 미리 이 모든 사실을 전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경고를 해 줬어야 옳은 일이다. 그를 좋아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 권했어야 맞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 건지 가늠도 안 갔다.

화를 참을 수가 없어진 차영이 제 몸을 똑바로 세우고 태주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얼굴이 눈물로 젖어 흥건해져 있는 상태였다. 참담한 표정으로 그걸 쳐다보고 있는 태주는, 차마 손을 뻗을 수는 없는 모양인지 팔을 움찔했다. 그리고 차영의 눈에 그의 이런 반응마저도 가증스럽게 보였다.

“나 바보 아냐. 한 기장이 무슨 잘못이 있어. 부모도 자식이 고를 수 없는데 하물며 한 다리 건너인 외할아버지가 그쪽 어릴 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게 뭐야. 나도 머리로 알아. 하지만 그건 내가 자의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인정해.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도 가능하면 이러지 않으려고 해 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이 통제가 안 됐어. 너와 가까워진 이후로도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 사이 간극이 손도 못쓸 정도로 벌어지게 될까 봐…… 입이 안 떨어지더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말하려고 했으면 진작 했어야지. 내가 너 이렇게 좋아하게 되기 전에!”

“네 말이 다 맞아. 미안한 게 너무 많아서, 대체 뭐부터 사과해야 할지도…….”

분노한 차영은 그의 말을 불쑥 끊어 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어. 넌 나한테 이런 상황 다 알려 주고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줬어야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한태주 씨가 좋다고 한다면 모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스스로 널 선택할 수 있게 날 기다려 줬어야 했다고. 이게 뭐야. 나 지금 엄마 아빠 볼 면목이 없어서 너무 비참해!”

처음에 차분하게 시작했던 비난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태주는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꼈다. 차영 또한 그가 감수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의 복잡한 가족사 때문에 자신은 소중한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와 평생 괴롭게 살아야만 했다. 적절한 때라는 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시기가 되어 사람이 죽는 것도 슬픈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아침에 소중한 가장을 잃었고, 또 너무나 억울했는데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들어 주지도 않았다. 줄곧 그 주홍 글씨가 낙인처럼 박혔다.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제 일에 성실하게 임하며 살았을 뿐인데. 생명이 위태로운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늦은 밤 제복을 갖춰 입었을 따름인데.

평생을 명예롭게 여기던 조종사로서의 직위는 박탈당하고, 모든 권리도 권한도 행사할 수가 없어지고 말았다. 심지어 아무도 그를 의롭게 기억해 주지 않았다.

“우린 슬퍼할 자격이 없었어. 아버지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다는 생각으로 평생 괴로웠어. 아버질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혹시나…… 혹시나 한 번 실수한 건 아닌가. 아무도 없을 때, 나 혼자 있을 때, 밤하늘에 뜬 소형 비행기를 볼 때마다. 매번, 매번! 아무도 몰래 아버지 의심했어. 그게 너무 미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이런 속내는 제 어머니에게도 솔직히 꺼내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속상해할 것을 알기에 그러지 못했다. 처음으로 태주의 앞에서 털어놓게 됐다. 그리고 이 본심을 입으로 직접 내뱉으면서 너무나 뼈아팠다. 줄곧 찾고 싶었던 유가족은, 이미 이 사고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데 엄청난 배신감이 일었다.

“최소한 너랑 자기 전에는 말을 해 줬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참담하진 않았을 거 아냐. 이래서 너 나한테 조급하게 군 거야? 날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나에 대한 배려가 단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이렇게 이기적인 게 사랑이라고? 자기만족이 아니라?”

“차영아.”

태주가 차영에게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자, 차영이 있는 힘껏 쳐 냈다.

“만지지 마! 이 역겨운 새끼야. 너 진짜 구역질 나.”

태주에게 싸늘한 시선을 내던진 차영은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태주가 황급히 쫓아 나오면서 차영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그가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고는 두 다리를 잠시 멈춰 세웠다.

“나 한 기장 정말 좋아해. 찌꺼기 하나 안 남기고 전부 다 털어 버리고 과거형으로 말하면서 차고 싶은데 아직은 그게 안 되는 게 진짜 열받는다. 나 이거 오래 생각한 건 아닌데. 아마 오래 생각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야. 우리 헤어지자.”

“그렇겐 못 해.”

계속 차영의 말이 모두 맞고 자신이 틀리다는 양 저자세로 나오던 태주도 이 말만큼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럼 넌 혼자 계속해. 난 끝낼 거니까.”

“절대 못 헤어져. 그런 일 없어.”

탁! 차영이 조수석의 문을 난폭하게 닫았다.

“난 내 의사 분명하게 전했어. 그러니까 더는 쫓아오지 마. 잡지도 마.”

“이차영! 잠깐 기다려.”

“더 듣기 싫어.”

“내 말 더 들어 달라는 거 아냐. 여기까지 내가 데려와 놓고 혼자 가는 걸 어떻게 봐.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집까지 데려다주게만 해 줘.”

이 말과 함께 태주가 한 걸음 접근하려 하자, 차영이 두 손으로 앞을 가리듯 척 막아 냈다. 그러고는 쌀쌀맞은 말투로 덧붙였다.

“못 알아들어? 너랑 같이 있기가 싫다고! 경고하는데 이 이상 가까이 오면 이대로 물에 뛰어들 거야. 난 한다면 해. 나 앓아눕게 만들고 싶으면 쫓아와. 그게 네가 말하는 그 엿 같은 사랑이라면 내 기분 좆같이 만드는 걸로 모자라 나까지 죽게 두든지. 네 결정에 따를게. 그러고 싶으면 쫓아와.”

차갑게 경고한 차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주를 냉정하게 거부해 놓고 본인이 더 상처받은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참 뒤편에 서서 차영이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주는 험한 꼴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붙잡으려던 결심을 고쳐먹었다. 그는 차영이 바로 오늘 오전까지 계속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겨우 되새기고, 가까스로 참아 냈다.

조금씩 뒷모습이 작아졌다.

택시를 잡는 모습이 보여서, 겨우 태주도 무너지듯 차체에 기댔다. 그러고는 이미 노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금세 어두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젠장!”

타악! 상체를 들썩여 차체에 등을 부딪친 그는 괴롭다는 양 지그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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