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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85화 (85/144)

85화

관제탑을 벗어난 차영은 새로 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태주의 집에서 내려가 자신의 보금자리로 들어왔을 때 침대 옆 협탁에 원래 쓰던 휴대폰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양새를 보고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올랐다. 너무 꺼림칙해서 바로 당장 인근 대리점으로 가 새 번호로 개통을 하고 원래의 것은 흐르는 강물에 던져 버렸다.

무단으로 결근을 한 셈이니 일단 탑장과 동료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야 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이끌고 공항으로 간 그는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휴가를 떠났어야 하는 날짜에 차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들 적잖게 놀란 얼굴을 했지만 탑장이 무슨 말을 해 두었던 건지 꼬치꼬치 캐물으려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제 안색이 너무 나빠서일 수도 있었다.

휴가계를 전부 반납하고 다시 일에 매진해서 머리를 정리해 볼까도 싶었으나, 한 번 실수하면 모든 항공기의 동선이 꼬이는 관제탑 업무의 특성상 나사 하나가 빠져 있는 자신의 존재는 득은커녕 실일 게 뻔해서 포기했다.

집으로 가면 태주의 생각이 날 것 같았는데, 또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가는 길도, 주변 풍경도 익숙한 방향을 따라 질주하게 됐다.

결국 제집 앞 야외 주차장으로 진입한 차영의 차량이 전용 위치에 멈췄다. 그가 차에서 내리는데,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저 사람이 누군지는 명확히 알았다. 태주였다.

“어디 다녀와.”

“알 거 없어.”

무시하고 가려는 차영의 손목을 태주가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이차영, 기다려.”

차영은 꽤 거칠게 뿌리쳤다. 그런데도 태주는 다시 붙잡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 마찰이 거북해서 짜증스럽게 돌아보니, 몹시 절박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할 시간 달라고 했잖아. 나 아무 정리도 안 됐어. 너 이러는 거 피차 도움 안 돼.”

“정리하기 전에 내 이야기도 들어. 다 듣고 다시 정리해. 그날 일에 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있어야 너도 뭘 정리를 하든 수납을 하든 할 거 아냐. 지금 나 꼴 보기 싫다고 그걸로 끝이야? 그러면 너한테 진실은 누가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문 회장? 안 실장? 네 엄마?”

“그걸 다 알면서 사람 기만한 개새끼가 뚫린 입으로 말은 잘한다.”

“이제 감출 생각 없어졌다잖아.”

“이제? 여태껏 네가 날 속였다는 사실은 안 변해.”

“말을 안 한 거야. 아니, 못 한 거야! 네가 너무 좋아서!”

“…….”

“차영이 너 이럴 거 뻔하니까.”

늘 단호하던 태주의 음성 끄트머리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차영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그 때문에 피해자인 자신이 어떤 의미로는 가해자가 된 기분마저 들어 그게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네가 잘했다는 거야? 아니면 나를 많이 좋아해 줬으니까 넌 할 만큼 했다는 건가?”

“그렇게 말 안 했어. 얘기 좀 하자고 했지.”

“한태주!”

“나 속 편하자고 말하겠다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된 이상 너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정확히 알아야! ……뭐가 뭔진 알아야 될 거 아냐.”

차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미 내부에선 넘치고도 한참이었는데 당최 이걸 어떻게 외부로 토해 내야 맞는 건지 몰라서 그저 계속 들끓게 둘 뿐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던 차영이 태주를 냉랭하게 직시했다.

“그걸 그렇게 잘 아시면 왜 진작 말해 줄 생각은 못 했을까?”

“그러니까 이제라도 얘기 좀 해.”

“한태주 네가 이렇게 비겁한 인간인 줄 알았더라면……!”

거짓말은 안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있다고 하더니, 어쩌면 그때 그 말은 이런 상황에서 뱀처럼 빠져나가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몰랐다.

울컥한 차영이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쏘아보자, 태주가 다시 차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조금 전보다 더욱 난폭하게 그를 밀어낸 차영은 태주의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퍽 치고 그의 차량이 주차된 방향으로 앞서갔다. 그러고는 그가 자신을 뒤쫓는 걸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 사건에 대해 알려 줄 사람이란 한태주뿐이었다. 이윽고 태주가 제 차량으로 가까이 가서 조수석에 태우기에, 올라탔다.

뒤이어 운전석에 탑승한 태주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차영은 그저 언젠간 차를 세우겠거니 여기면서 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그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 * *

태주가 선택한 진실을 마주할 장소는 인근의 바다가 보이는 둔치였다. 방파제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데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마저 물씬 풍기는 기가 막힌 장소에 주차를 해 두고, 주변 경치를 잠시간 감상했다. 물에 비친 불빛들이 일렁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런 일로 오는 게 아니라, 좀 더 명랑한 기분으로 왔다면 좋았을 법했다. 여느 때였다면 홀린 듯이 관찰했을 물 위로 노을이 지는 근사한 풍경마저 눈에 제대로 안 들어왔다. 그럼에도 차영은 꿋꿋하게 경치를 눈에 담으려 애썼다. 여전히 옆의 태주를 보기 싫었다. 그쪽도 자신을 굳이 쳐다봐야 한다면 옆모습만 봤으면 했다.

“이 마당에 난 또 기다려야 돼?”

차영이 창문을 더 아래로 바짝 내리면서 낮게 힐난했다. 태주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말리는 대신 그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차영은 그것을 뿌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태주가 그것을 주우려고 하자, 차영이 보란 듯이 그것을 발로 짓밟았다. 그 순간 정확히 타이밍이 맞아 서로를 쳐다본 덕분에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쉽게 시선이 부딪칠 줄은 몰랐던 터라,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눈동자로 태주를 보던 차영이 고개를 창밖으로 다시 돌려 버렸다.

“차영아.”

“말이나 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들 사이엔 유례없이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좋지 않았던 첫 만남에서조차 없었던 기류였다. 놀랍게도 다정다감한 차영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씁쓸한 숨을 삼킨 태주가 카 시트에 등을 기대어 전방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

“상관없어. 네가 아는 건 다 말해.”

힐끗 차영을 살핀 태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머닌 의대생이었어. 우연히 학회에서 학교 선배인 아버지를 만났는데…… 뭐. 사랑에 빠졌겠지? 그 증거로 내가 태어났으니까.”

마침내 그가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한태주의 고해성사가 시작된 것이다. 묵묵히 듣게 됐다.

“외할아버지는 가뜩이나 어머니가 경영 말고 다른 공부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 같아. 다만 어머니가 너무 강경하게 나오니까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셨겠지. 그런 상황에서 혼처까지 성에 안 차니까 화를 많이 내셨대. 당연히 두 분 관계 허락은 안 해 주셨고…….”

“…….”

“우리 아버진 친부모, 양부모 두 쪽 다 죽고 없는 입양아였는데, 줄곧 그게 콤플렉스였나 봐. 어머니 쪽 가족들이 축복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자고 해서 결혼은 미루고, 의사에 의사 지망생 커플이면서 피임은 제대로 안 했던 건지 내가 태어났어. 그런데 어머니가 날 낳다가 돌아가시게 된 거야. 그리고 그때 아버진 어머니와 나 중에…… 날 선택하셨어.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둘 다 구하긴 너무 때가 늦었겠지.”

태주는 잠시 숨을 고르듯 침묵했다. 차영은 조금도 보채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 버거운 만큼 듣는 자신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서두에 불과한 벌써부터 이런데, 앞으로의 이야기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가 아득할 따름이었다.

“아버진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를 해 주고 싶었대. 미국 생활은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날 데리고 본가 근처에서 살았어. 부모님 삼아서 그러고 싶기도 했을 거야. 그런데 외할아버지 눈엔 그런 아버지가 몹시 거슬렸던 것 같아. 나한텐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을 아버지 앞에선 한 번 열어 주셨던 적이 없었어.”

“…….”

“그리고 어느 날……. 어느 날 밤에 급한 환자가 있다면서 외할아버지 명령을 받은 안 실장이 아버질 데려갔어. 그 뒤로 난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그 이후부터는 네가 아는 대로야.”

평이한 어조에 차분한 음성은 큰 서러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태주는 침착했는데, 정작 차영의 눈가가 일렁였다. 눈을 가볍게 떴다 뜨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어났다는 것 외에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이 죄를 다 감내하고 있는 한태주가 불쌍했고, 하필이면 그를 좋아하게 된 자신은 더욱더 불쌍했다. 차영은 울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괜히 몸을 뒤척였다. 활짝 열어 둔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그의 젖은 온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으나 큰 위로가 되진 못했다.

“나도 그날 안 실장을 봤어.”

어렵사리 꺼낸 차영의 음성도 태주의 것처럼 덤덤했다. 그러나 심해에 잠시 몸을 담그고 나온 것처럼 축축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정면만 영혼 없이 향하고 있던 태주의 시선이 겨우 허락을 받은 사람처럼 측면만 보여 주고 있는 차영에게로 향했다.

“그땐 너무 어려서 어른들이 대화한 내용까진 잘 기억 안 나지만…….”

“차영아.”

“적어도 우리 아버지 그날 술은 안 마셨어. 진짜야. 나는 알아. 나만 그걸 증명할 수 있었는데, 여태까지 멍청하게 기억도 못 했어. 죽어서도 얼마나 혼자 억울하셨을까.”

어깨가 살짝 들썩이는 모양새가 울고 있는 것 같은데, 닦아 줄 수가 없었다. 만지면 뿌리치고, 그래도 억지로 만지면 결국 달아나 버릴 것 같아서 선뜻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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