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차영은 제 몸을 살짝 들썩여 봤다. 다행히 온몸을 압박하듯 묶고 있던 끈은 풀어 준 듯했다. 팔다리의 움직임이 무겁긴 했지만, 움직일 자유는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명부전이 아닌 푹신한 침대 위였다.
최소한 죽진 않은 것이다.
고개를 힐끗 돌려 보니 태주의 집이었다. 자신의 옆에 제 손을 꼭 잡은 채로 이 집의 주인이 몸을 구기고 잠들어 있었다. 차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제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 감촉을 느낀 태주가 번뜩 눈을 떴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교환하고 있는 시선에서 말 못 할 괴로움과 아픔이 상대에게 전이됐다.
먼저 입을 연 건 태주였다.
“일어났구나. 좀 괜찮아? 치료는 대충 했다고 듣긴 했는데.”
“나 왜 여기 있어? 한 기장이 데려왔어?”
자연스럽게 차영이 대꾸했다. 피차 나지막한 음성은 끝이 죄다 갈라졌다.
“응, 본가에서 내가 데려왔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태주가 제 손목시계를 눈으로 살폈다. 차영과 나누어 낀 것이다.
“출국 시간 다 돼 간다. 아침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넌 일단 씻고 나와.”
태주가 일어나려는 찰나, 차영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평소 웬만하면 흔들리는 법이 없는 그의 깊은 눈동자가 크나큰 동요를 담고 자신을 향했을 때. 차영은 지금 둘 사이의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으며 태주가 이 사실을 자신보다도 훨씬 먼저 깨쳤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이미 처음부터 전부 알고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차영은 그가 설명해 주기 전까진 굳이 그런 상상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이야기부터 해.”
“차영아.”
태주가 이러지 말아 달라는 양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으나, 차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실을 직면하는 건 정말 힘겨운 과정일 테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능선이기도 했다.
“한태주, 너 나 언제부터 알았어?”
이 물음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차영은 일단 기다렸다. 그 시간이 너무 초조해서 자꾸 손톱을 뜯자, 태주가 그 위에 제 커다란 손을 부드럽게 얹어 이를 저지했다. 그 촉감이 부드럽고 체온이 따뜻해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창백해진 얼굴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쏟아지는 것만큼은 참아 내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 얘긴 다음에. 비행 시간 늦겠어.”
“말해. 다음에 싫어. 난 지금 해야겠어.”
“차영아, 우리 일단.”
“묻잖아. 나 언제부터 알았는지. 한 기장은 나 누구 아들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줄곧 이상하다 싶었어!”
어울리지 않게 자꾸 회피하려는 태주 때문에 차영은 조금씩 침착성을 잃어 갔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음성은 떨렸다. 그가 감추고 있는 거대한 진실의 이면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기로 대영 그룹은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이었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을 정보망은 그 규모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런 기업체의 유일한 상속자가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몰랐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전제를 입력하고 나면 여러 가지 앞뒤의 아귀가 전부 맞아 들었다.
갑자기 잦아진 우연한 마주침들, 급작스러운 그의 접근, 자신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슬퍼졌던 그의 눈동자 따위들이 머릿속에 열기구처럼 느릿하게 떠올랐다.
태주는 교제한 지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차영에게 정확한 생년월일도, 그 이상의 어떤 구체적인 신상 명세도 캐묻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게 됐으니 묻지 않는다고 여태 여겨 왔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는 아주 오래전 과거인 ‘그날’ 일에 관해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문 회장이 얼마나 능란하게 어렸던 태주를 속일 수 있었을지 차영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차라리 그도 철저하게 기만당한 것이었으면 싶었다. 아주 간절히 말이다. 그런다면 적어도 서로를 위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윽고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태주가 힘겹게 입을 벌렸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늦어서 미안해.”
“말? 무슨 말? 한 기장 혹시 나한테 복수하려고 접근했어? 그쪽 외할아버지 말대로 한주혁 선생님을 우리 아버지가……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서?”
“차영아,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면!”
흥분한 차영을 진정시키려는 듯 태주가 그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그러나 차영은 이미 모든 일을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뿌리쳤다. 손이 덜덜 떨리고 호흡이 불안정했다. 균형을 자꾸 잃게 될 것 같아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태주의 손길로 버티고 싶지는 않았다.
“이거 놔. 미안한데 나 별로 그 문제로는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요즘 세상에 연좌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평생 차영은 아버지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의심한 적도 있었지만 금세 다시 본연의 신뢰를 되찾았다. 아무리 사람 속은 열 길 물속보다도 모른다고 해도 어머니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 같은 대쪽 같은 사람이 평생에 걸쳐 못 잊고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애통해하는 남자가 그렇게 경솔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제 짓눌려 있던 그날의 기억이 흐리지만 되살아났으니 제 머릿속에서만큼은 이 주장을 입증할 타당한 근거도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어도, 최소한 그날 아버진 술 같은 건 마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제 기절하기 직전, 짧게 떠올랐던 잔상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의 사고 전날 자신의 집에 찾아왔던 안 실장의 존재였다. 그는 문 회장이 지시한 온갖 불편한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다. 그런 대기업 총수의 심복이 계열사의 일개 소속 기장인 아버지를 따로, 그것도 은밀히 찾아올 일이란 게 있을 리 없었다.
이 께름칙한 사고엔 분명히 뭔가 있다.
“우리 대체 왜 사귀고 있는 거야?”
“내가 차영이 널 좋아하니까.”
차영은 바로 그 점이 무엇보다 이해가 안 갔다.
“나도 한태주 기장 좋아해.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게 전부 가짜 같은 기분이 들어. 내 마음까지 모두 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그쪽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네가 날 좋아할 수가 있어?”
“그건…….”
“너 뭐 아는 거지.”
“차영아.”
애타는 음성으로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결국 차영은 폭발했다.
“이 개자식아, 너 다 아는 거지! 우리 아버지 죽음에 너희 외할아버지가 추잡하게 끼어 있다는 거! 이제 뭐가 뭔지 좀 알겠어. 그래서 항상 나한테 불안해했던 거야!”
태주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차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배려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왜 그가 전말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머니와의 관계에 참견을 했는지도,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는 자신의 오랜 트라우마를 극복하길 유달리 적극적으로 도왔는지도, 무엇보다 본인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욕망과 충동에 늘 솔직한 그가 어째서 와 달라는 말을 잠시 머뭇거렸는지도. 단 한 가지의 전제를 그 앞에 세워 놓으면 맥락이 다 이해됐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아니라고 해야지. 넌 그런 게 아니라고, 추리 소설 쓰는 거냐고, 거기까진 너무 갔다고 대답해야지! 그냥 내가 좋아진 거라고 말을 해야 맞는 거잖아…….”
여전히 그의 입은 꾹 다물려 있었다. 때론 대답 없음이 그 자체로 대답의 기능을 수행했다.
“대체…… 한태주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차영아, 제발.”
“넌 경솔하게 그럴 수 있어. 네 마음이니까 네 멋대로 해도 상관없어. 그래도 최소한 나한텐 진작 말을 했어야지. 어떻게 나까지 너 좋아하게 만들어!”
자신이 봐 왔던 그 어느 때보다도, 태주는 괴로워 보였다. 애써 늘 감춰 왔던 슬픔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부 밖으로 터진 둑처럼 이리저리 새어 나왔다. 더는 숨기거나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차영은 언제나처럼 그를 위로해 주고, 곁을 지켜 주고 싶지 않았다. 일단 당장은 제일 중요한 부분이 정리가 제대로 안 되는 느낌이라,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여태 자신을 속여 온 태주는 제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나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 지금 너무 어지럽고 복잡해.”
“차영아, 가겠다고만 하지 마. 제발 내 옆에 있어 줘.”
“아니, 난 딱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가겠다고 말할 거야.”
벌떡 일어선 차영이 어지럼증으로 휘청거렸다. 태주가 본능적으로 팔을 내뻗어 붙들었으나 그 손마저 야멸치게 뿌리쳤다.
“이거 놔.”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는 듯 태주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차영은 이윽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태주가 더는 잡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열기구 축제는 다음……. 아니, 우리 거기 가지 말자.”
앞으로 우리 사이에 다음이라는 명사가 끼어들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