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깊이 잠든 이가 혹시나 깨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안아 들었다. 어느새 주저앉은 윤 원장이 두 사람을 쳐다보는 기색이 느껴졌다.
최대한 걸을 때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도록 차분하게 걸음을 옮긴 그는, 걷다가 계단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 실장을 마주치게 됐다. 언제 제게 멱살이 잡혀 흐트러졌냐는 듯 한껏 말끔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얼굴이 부어올랐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힘겹게 목구멍을 열어 말을 내뱉는 태주의 음성이 축 가라앉아 음산했다.
“앞으론 나한테 직접 이야기해요. 당신 볼일은 나한테 있는 거니까.”
“외람되지만 회장님 지시였습니다.”
“회장님한테 그렇게 전하란 뜻입니다. 안 실장한테 하는 말 같았어요? 대체 왜 개새끼들은 다들 자기 주제를 모르지?”
“……충고 명심하죠.”
“말 고르지 말고 액면 그대로, 똑똑히 전해. 세 번째엔 나도 내가 무슨 짓 할지 모르겠으니까 나랑 정말로 끝장을 보고 싶으면 또 이런 짓 하시라고. 분명히 경고했어.”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멀리는 안 나갑니다. 살펴 가십시오.”
태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쪽이야말로 어서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진저리 쳐졌다. 걸음을 내딛던 그는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어 멈춰 섰다. 그가 돌아보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던 안 실장이 시선을 느끼곤 태주를 마주 쳐다봤다.
“뭐 더 전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차영이한테 어디까지 말했습니까.”
“회장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하셨는지는 저도 그 자리에 없었던 터라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만 말씀하셨을 겁니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모든 정황이지만 수면 밑의 진실과 괴리가 있을 때도 종종 생겼다. 안 실장은 지금 말장난을 하고 있었다. 대충 어디까지일지 막연하게나마 감이 온 태주는 잇새를 짓이겼다.
그는 두 번은 돌아보지 않았다. 차영을 단단히 품에 안은 채로, 단 한 번도 제게 천국이었던 적 없는 지옥의 문을 뚜벅뚜벅 벗어났다.
* * *
차영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언제나 얼굴을 마주 볼 때면 쉽게 발견할 수 있던 다정하고 총명한 갈색 눈동자가 감은 눈꺼풀 아래로 자취를 감춘 모습이 유독 이질적이었다.
차영이 차분히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팍이 느릿한 속도로 오르내렸다. 호흡과 함께 필연적으로 떨리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은 그가 무의식중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 같아 괴로웠다.
혹여나 눈을 떴을 때 감기 전의 공포 때문에 힘들어할까 봐, 태주는 잠시나마 자리를 뜰 엄두도 못 냈다. 그는 차영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내내 지켰다.
다만 바라보기만 하는 건 생각보다 큰 곤욕이었다. 깊이 잠들어 있다는 것은 알지만,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약 기운이 전부 흐려지기도 전에 깰까 봐 함부로 만지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으면 괜히 제 입술을 달싹여야 했고, 손이 잡아 보고 싶으면 제 손아귀를 쥐어 보는 게 고작이었다. 덕분인지 다행히 아직 차영은 순조롭게 꿈속 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가 헤엄치고 있는 물살이 거센지 잔잔한지까지는 알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당사자와 직접 대화해 보기 전엔 차영이 구체적으로 어느 영역까지를 파악하게 됐는지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안 실장은 때에 따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고, 그것은 모두 제 교활한 책략가인 외할아버지의 지시에서 나왔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생 모르고 살았어도 될 일들에 대해서 어렴풋이 차영이 짐작하게 되었으리라는 점이었다. 문 회장은 그 정도의 목적 달성도 없이 본인의 주둔지인 본가까지 차영을 강제로 데려갔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차영아, 자?”
당연하게도 푹 잠든 차영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전부 먼저 말하려고 했어.”
서서히 모든 것을 고백할 준비를 끝내 가던 참이었다. 이번에 함께 여행을 가서 털어놓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사실 이는 비겁한 수였다. 차영은 비행기를 타는 행위에 두려움을 느끼고, 먼 곳일수록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더라도 당장 도망치지는 않으리라는 얄팍한 수작을 부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자신의 치졸함을 강하게 타박하기 위해 그들을 둘러싼 상황이 이 지경으로 치달은 것 같기도 했다.
‘눈을 뜨면 네가 어떤 눈으로 나를 볼지.’
그게 두려워서 호흡이 떨렸다.
자신과 달리 안정적으로 숨을 내쉬는 차영을 보면서 더욱 괴로워진 태주는 마른세수를 했다. 쓸데없는 욕심이 너무 컸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누군가를 탓할 필요도 없었다.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태주가 일부러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차영은 원래 본인이 지니고 있던 괴로움에서 뭔가를 더 추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차영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쳐다보는 데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끌어안고, 키스하고,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사실 처음에는 집요하리만큼 눈길이 가고, 종일 신경이 쓰이다가, 심지어 가까이하고 싶은 그 치열한 욕망이 그들 가족에 대한 죄책감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일부 맞을지라도, 대부분 틀렸다.
태주는 어느 순간부터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차영이 좋았다.
차영은 모두에게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렀다. 또 그런 반면 때론 분명하게 선을 긋는 냉정한 태도를 보이긴 해도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 모순이 사랑스러웠다.
또한 차영의 내면은 아주 단단했다. 태주는 예의가 바르고, 영리하고, 심성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가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웅덩이를 만들 듯 점점 더 좋아졌다.
잠든 차영에게 닿고 싶은 욕구를 참다 참다못한 태주가 어렵사리 손을 뻗었다. 눈자위를 가볍게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별 반응이 없어서 용기를 더 냈다. 뺨을 가볍게 손등으로 훑으니 차영이 가볍게 뒤척였다.
“응…….”
이윽고 옅은 진달래색 입술을 만지작대던 태주는 제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차영의 보드라운 살결에 닿았던 자리마다 입을 맞췄다. 동시에 납골당에서의 차영을 떠올렸다.
그는 그곳에, 어머니와 함께 매년 1월 중순경이면 나타났다. 두 사람 아버지의 공통 기일이었다. 자연스럽게 태주는 매년 단 하루, 차영을 몰래 지켜볼 기회를 얻었다.
맨 처음 그 장소에서 차영을 봤을 때는 그저 반갑고 애틋했다. 언젠가 사고 현장에서 본 적이 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른의 허리춤에 오던 아이가, 한 해씩 지나갈수록 제 어머니의 어깨에, 눈높이에……. 그러다가 어느 틈에 그녀의 키를 뛰어넘는 모습을 줄곧 눈에 담았다. 초기에는 분명 어른을 의지하기 위해 손을 잡고 나타났던 차영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어른스럽게 제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만 그때까지 단 한 순간도 태주는 차영의 앞에 제 자신을 드러내진 못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 년 전 겨울, 무슨 사연이었는지는 모르나 언제나처럼 제 어머니와 함께가 아니라 차영이 혼자 모습을 드러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아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 덤덤히 마주 웃어 주면서 국화를 내려놓았다.
홀로 제 아버지를 찾아와서 말없이 대화를 나누는 그때의 차영은 의외로 외로워 보이기보다는 무척 강하고 담대해 보였다. 아직까지도 태주는 감춰진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데, 그는 스스로 두 다리를 꼿꼿하게 내디뎌 선 채로 제 안의 슬픔을 무겁게 토해 냈다.
그때 태주가 느꼈던 열패감에 가까운 어떤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가장 유려한 문장력을 지닌 사람도, 빛나도록 날카로운 표현력을 가진 이도, 그 어떤 천재도 구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장면이 적잖게 충격적이었던 태주는 그 뒤로 몇 년간 아버지의 기일 단 하루일지라도 한국에 오기를 꺼렸다.
그러다 외할아버지의 계략에 의해 한국 항공으로 적을 옮기게 되던 바로 그날. 인천 국제공항의 일각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늦은 밤, 계류장의 비행기들과 멀리 밤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들을 두루 눈에 담고 있는 이였다. 그가 차영이라는 건 단박에 알아챘다. 착각할 리도, 못 알아볼 이유도 없었다. 홀린 듯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태주는, 서로가 가시거리에 있을 만큼 접근했을 때라야 차영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영은 그를 주시하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그런 장소에서, 소리도 없이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한순간 쉬지도 않고, 하늘을 보면서 그간 애써 억눌러 왔던 깊은 슬픔들을 뱉어 냈다. 마치 온몸에 고여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토하듯 계속, 계속 울었다.
“그때 울지 말지.”
안아 주고 싶게 만들지 말았다면 좋았을 터다. 결국 자신을 흔든 죄로 아무 죄 없는 차영을 원망하게 됐다.
“아, 안 돼.”
갑자기 험한 꿈의 협곡을 오르게 된 모양인지, 차영이 달뜬 음성으로 내뱉었다. 동시에 눈 옆으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마치 언젠가 비행장에서의 순간처럼 말이다.
당황한 태주는 급하게 차영의 가슴팍 위를 부드럽게 누르면서 그를 안정시켰다.
“괜찮아, 차영아. 괜찮아. 괜찮아…….”
그 투명한 물방울을 제 손등으로 닦아 준 태주는 낮은 한숨을 내쉬면서 눈썹 사이를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