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어떤 동양의 철학자는 말했다.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자는 살고, 하늘의 도리를 어기는 자는 죽는다고 말이다.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의도한 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뜻이나 자연의 섭리 정도의 넓은 의미였을 테지만, 태주는 이것을 액면 그대로 ‘하늘’이 품은 도리라고 여겼다.
하늘은 다소 변덕스럽긴 해도, 마음을 바꿔 먹기 전에 반드시 그 전조를 주었다.
눈이 오면 오겠다, 비가 오면 오겠다, 날이 급작스럽게 개거나 바람이 강해지는 따위의 모든 기후 요소들은 그 일들을 예견하는 어떤 신호를 태주에게 보내곤 했다. 그리고 이 묵시적 규칙은 그의 일상 모든 일에도 통용됐다.
「타워 응답 바랍니다. 한국 항공 882 포인트 통과했습니다.」
조종석의 그는 교신 장비를 만지작거렸다. 기다리는 관제 음성이 있었던 탓이다. 자신이 상해에 도착해서부터 줄곧 통화 대신 메시지로만 제 근황을 알렸던 차영의 것이었다.
- 「타워입니다. 한국 항공 882 34번 좌측 활주로에 착륙 허가합니다. 바람은 310도 방향에서 7노트로 부는 중입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낯선 목소리였다. 고개를 갸웃한 태주는 차분히 대꾸했다.
「34번 좌측 활주로 접근 후 착륙하겠습니다.」
물론 반드시 그러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두 사람은 태주의 비행이 있을 때마다 최대한 일정을 맞췄다. 원래 관제 요청은 부기장이 주로 하는 일이지만, 이착륙 시의 태주는 종종 자신이 직접 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 차영이 탑에서 다정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들의 은밀하고 소소한 놀이 같은 것이다.
의아함을 느낀 태주는 착륙 후 하기하자마자 차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통화가 전혀 안 됐다. 심지어 계속 주고받던 메시지마저 오늘 오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끊겨 있었다.
내일은 두 사람이 함께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이었고, 오늘 차영은 야근 일정이 잡힌 것으로 알았다. 이런 행동반경이 협소한 상황에서 태주가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몇 가지 안 됐다. 그는 일단 관제탑에 연락을 취했다. 언젠가 들은 바 있는 음성이 그를 응대했다. 탑장인 듯했다.
“한국 항공 한태주 기장입니다.”
- 네, 한 기장님. 오랜만입니다. 조금 전에 해당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하신 걸로 압니다만 뭐 혹시 저희 쪽에 따로 궁금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요?
“이차영 관제사 오늘 혹시 연차 썼습니까?”
- 차영이요? 아…….
상대는 곤란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태주에게 어디까지 공개해도 좋을지를 나름대로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성질 급한 태주가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느끼고 그를 닦달하려 하는데, 다행히 탑장이 먼저 말을 이었다.
- 차영이 오늘 미리 언질도 없이 결근이라 저희도 곤란한 참입니다. 여태 얘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던 앤데, 아무리 아파도 일단 출근은 꼭 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못 나오겠다는 메시지만 달랑 한 통이 왔더라고요. 그것도 새벽에 급작스럽게요.
“새벽에 메시지가 왔다고요?”
- 네, 오늘 출근 어렵겠다고 딱 한 줄. 이건 뭐 제 쪽에서 전화를 했더니 받지도 않고요. 한 기장님이랑도 연락이 안 됩니까?
이쯤 되니 절로 그려지는 상황이 있었다. 그는 알겠다고 대충 얼버무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평소 차영의 메시지 말투는 표준어에, 오탈자 하나 없는 데다 띄어쓰기나 온점까지 엄정하게 지키는 스탠다드였다. 게다가 정확한 핵심 사항만 전달했다.
관제할 때 라디오 교신 장비를 통한 음성 말고, 때때로 메시지로 조종석과 탑의 의사를 교환하기도 하는데 그때의 습관이 실생활에서도 일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이상한 점을 못 느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차영이 보낸 메시지들은 본인의 손을 탄 것이 아닐 가능성이 생겼다.
제 짐작이 부디 틀리기를 바라는 태주의 걸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제 차로 향한 태주는 안 실장의 연락처를 찾았다. 화면을 넘기는 그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애꿎은 핸들을 부서뜨릴 듯 꽉 쥐어 본 그는 신호가 계속 걸리기만 하고 음성을 들려주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그 위를 내려쳤다.
그때였다.
차분한 성미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 도련님,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들은 태주는 이를 악물었다. 빗나가길 바랐으나 안타깝게도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던 모양이다. 분노한 음성의 주파수가 끝도 없이 낮아졌다.
“이 개새끼야, 이차영 어디에 숨겼어.”
- 안심하셔도 됩니다. 무사히 쉬고 계십니다.
“안심? 무사히? 이차영 어디에 숨겼냐니까!”
결국 평정을 완전히 잃은 그가 언성을 높이고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고요한 호수의 물 같은 상대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잔하게 흐를 따름이었다.
- 일단 본가로 오시겠습니까?
본가.
태주는 이 짧은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얼핏 들으면 안전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담장 높은 그 집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외부에서 알 수가 없다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었다.
“걔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으면 넌 내 손에 죽어.”
나지막한 경고 끝에 잇새를 짓이긴 그는 휴대폰을 내던지고 난폭하게 주행을 시작했다.
* * *
본가는 지난겨울 찾아왔을 때처럼 근사한 운치가 여전했다. 인공 호수를 감싼 지형의 고요한 정원, 외할머니가 직접 가꾸었던 담벼락 근처의 텃밭, 돌담길을 따라가면 보이는 거대한 저택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제 이곳에 태주의 외할머니는 살고 있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앞으로 웬만해선 올 일이 없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이런 식으로 재방문하게 되는 건 최악 중에 최악인 상황이리라고 생각했다. 태주와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문 회장이라면 여기까지 치달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자신이 그를 너무 몰랐다. 차영과 함께 할 희망적인 미래에 취해 안일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현관은 오랜만의 손님을 두 팔 벌려 환영하듯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중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중을 나와 있는 안 실장이 바로 보였다. 태주는 빠르게 달려가서 그의 멱살을 쥐었다. 뒤이어 거세게 주먹을 날렸다.
퍽!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간 안 실장은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언제나 그랬듯 저항하지 않고 침착한 시선으로 태주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게 태주를 더욱 화나게 만든 것 같았다.
태주는 더욱 힘주어 안 실장의 멱살을 붙든 채로 한 번 더 얼굴을 내려쳤다. 턱주가리에 정통으로 맞아 뻐걱, 하고 뼈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미간을 구긴 안 실장은 꽤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잘 훈련된 개처럼 여전히 그저 감내할 뿐이었다.
“도련님 손에 제 얼굴이 성할 날이 없군요.”
“그 도련님 소리 좀 집어치워. 난 한태주입니다. 문현기 회장님댁 도련님이 아니라, 한태주라고. 이차영 지금 어디 있는지나 바른대로 말해. 어디로 데리고 갔어. 대체 걔한테 무슨 짓 했어! 외할아버지가 나 잡자고 벌인 판인 거 알아.”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안전히 쉬고 계십니다.”
“나한테 계속 차영이 휴대폰으로 메시지 보낸 것도 당신이 꾸민 짓이야?”
“도련님께서는 해외 체류 중이셨으니 안심시켜 드려야 한다는 회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노망이라도 난 노친네가 죽으라면 기꺼이 죽을 건가?”
“물론입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미친 새끼. 당신 제정신 아니야.”
“현재 이차영 관제사는 윤 원장님이 손님용 방에서 돌보고 계십니다.”
차영의 현 위치에 대한 정보가 생긴 태주는 움찔했다. 우선순위를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안 실장의 뻔뻔한 얼굴에 좀 더 흠집을 내 주고는 싶었다. 하나 그는 제 외할아버지의 충직한 개일 뿐, 이 모든 일들은 문 회장이 지시하지 않았다면 벌이지 않았을 사안들이라는 것을 태주는 알았다. 제 화를 푸는 것보단 차영의 안위를 확보하는 일이 더 급했다.
그의 어깨를 거칠게 치고 위층으로 올라간 태주는 긴 복도의 가장 끄트머리에 우뚝 섰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저 반대편 끝의 모퉁이 왼편으로 돌아가면 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유골함을 안치해 둔 명부전이,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손님용 방이 나타날 것이다.
오른쪽으로 뛰어간 태주가 문고리에 손을 얹으려던 때였다. 안에서 누군가 그보다 한발 앞서 같은 목적을 띤 행동을 했다. 조용히 열린 문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한 기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주 오래전엔 아버지의 친구였던, 윤 원장이었다.
“비켜.”
“왜 저희 병원으로 안 오십니까. 최근 정기 검진은 다른 병원 소견서가 제출됐던데요.”
“비키란 말 안 들려?”
“이차영 씨는 괜찮습니다.”
자발적으로 윤 원장이 길을 터 주어서, 태주가 쓸데없는 마찰을 일으킬 이유는 사라졌다. 그가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윤 원장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무시했다.
“차영아.”
커다란 침대 위에 쥐 죽은 듯이 잠든 차영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아주 성급하고 다급했는데, 막상 눈앞에 차영이 있으니 태주의 걸음이 느려졌다.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서 아주 조심스럽게 제 손을 뻗었다. 숨결이 안온한지 느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실체를 만져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공중에서 망설이는 그의 손을 본 건지, 윤 원장이 말을 덧붙였다.
“처음에 모셔 올 때 투약했던 수면 유도제가 좀 과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안정 찾으셨습니다. 신체 반응 모두 정상입니다.”
“단순히 잠들었다는 이야깁니까?”
“네, 그렇습니다. 푹 쉬고 계신 상태입니다. 약 기운이 가시면 깰 겁니다.”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태주가 돌아섰다. 그는 윤 원장을 벽으로 확 밀어붙였다.
“그 수면 유도제 누가 처방해 줬을까? 누구 목구멍 타고 빨려 들어갈지 진짜 몰랐을까?”
그러고는 제 손의 악력과 팔 힘을 이용해서 원장의 목을 졸랐다. 큭, 하고 괴로운 숨을 토해 낸 윤 원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숨통이 조여 오고 목울대에 통증마저 느껴진 덕분에 몸을 조금씩 버둥거렸지만, 태주의 눈에는 동요라곤 없었다. 그는 도리어 점점 더 제 온몸에 힘을 주면서 윤 원장을 극심하게 몰아붙일 따름이었다.
“한 기…… 윽, 한 기장님!”
“가만히, 얌전히 있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 같아? 윤 원장 당신도 외할아버지랑 한패잖아. 이차영 아버지한테 사고 혐의 다 덮어씌울 수 있게 차트 조작한 사람 당신이라는 거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아.”
“크윽…… 으윽!”
“어떻게 그 아들인 이차영한테까지 이럴 수가 있어. 당신이 사람이야? 맨정신에 이러고 있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우리 아버지 친구였으면서. 어떻게 끝까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태, 태주야……!”
“두 다리 뻗고 제대로 잘 수 있나? 그게 돼? 당신도 자식이 있었으면서! 걔들 앞에 아버지로서 부끄럽지도 않아?”
전신을 바들바들 떨어 대던 윤 원장이 죄인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주는 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런 그를 뿌리치듯 놓아주었다. 더 이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역겨웠다. 그는 그대로 차영에게로 제 몸을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