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한태주 만나게 해 주세요.”
“네가 무슨 염치로?”
“회장님은 아시는 거죠. 그 사고가 어떻게 된 사연인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회장님 같은 분이 본인 사위가 죽은 사건 전말을 까맣게 모를 리가 없어요. 기체 문제죠, 맞죠. 아니면 뭐 다른 문제였어요? 아시는 게 있으면 제발 알려 주세요!”
“기체 문제가 아니라 운항 전 음주로 인한 사고라는 건 이미 네 아버지 시신이 증명했다.”
“우리 아버지 음주하고 비행기 운항하실 만큼 책임감 없는 분 아니에요.”
“네가 까마득하게 어릴 때 사망한 걸로 아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사람은 누구나 어두운 면이 있어. 아무리 진실을 믿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건 해야 하지 않겠니?”
“함부로 말하지 마! 사실을 말해.”
“그날 조종간을 잡은 건 이정욱 기장이고, 넌 그 아들이라는 사실. 우연히 비상식적인 조종사와 함께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운 나쁘게 사망하게 된 사람이 태주의 친부라는 사실. 그게 내가 아는 사실 관계의 전부다.”
문 회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가 몸을 일으켜 차영이 있는 쪽으로 서서히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주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와서, 소리도 없이 눈물을 쏟아 내고 있는 차영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뭔가 크게 못마땅해하는 기색으로 차영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꼬리 옆으로 눈물 길이라도 난 듯 물줄기가 줄줄 흘렀다.
“태주한테서 떨어져. 너희 둘이 완벽하게 분리됐다는 확신이 들면 나도 그날 경비행기 안의 상황 녹취록을 넘겨주마.”
질린 듯한 차영의 눈이 문 회장을 향했다.
“그런 게 있는데 왜 경찰이나 언론한테는 제공 안 하셨어요. 뭐 감추고 싶은 거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그걸로는 아무것도 증명 못 해. 사고 직전 음성이고, 우리도 겨우 일부분만 복원했다. 그저 단 몇 마디에 불과해. 넌 네 아버지 살아생전 육성과 태주를 바꾼다고 생각하면 돼.”
사람의 마음과 유품을 바꾸다니, 이토록 비열한 거래 조건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분노한 차영이 그를 향해 침을 뱉었다. 살짝 숙인 상체 위에 어설프게 타액이 튀자, 문 회장은 손수건으로 그것을 아주 천천히 닦아 냈다. 뒤이어 차영의 턱을 다시금 들어 올려 있는 힘껏 갈겼다.
철썩! 차영의 고개가 땅으로 추락하듯 휙 돌아갔다.
“윽……!”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문 회장의 얼굴에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았으나 그가 크게 진노했다는 것은 그의 행동이 명확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차영의 머리채를 무자비하게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폭력적으로 땅을 겨냥해 내동댕이쳤다. 털썩! 의자에 묶인 차영이 결박된 채로 바닥으로 굴렀다.
80 노인의 힘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악력이었다. 무너져 내린 차영은 그의 구두코와 시선을 맞추게 됐다. 마치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듯한 자세여서, 더욱 굴욕적이었다.
“잘 생각해. 답변 기다리마. 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면, 그때 내보내 주지. 이건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태주도, 안 실장도.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내 말 알아듣겠어?”
“…….”
“내가 기회를 결코 세 번은 주지 않는다는 것도 잘 기억해 두길 바란다.”
차영은 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면 서러운 울음소리가 토해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침묵을 보편적 뉘앙스인 긍정의 답변으로 이해했던지, 문 회장이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밖의 사람을 부르는 모양이었다.
역시나 다시금 미닫이 중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도 차영의 뺨은 여전히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 위로 눈물 길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들이 떨어져 촉촉하게 젖어 갔다.
“회장님, 지시하시겠습니까.”
“이차영 이 친구, 정중하게…….”
“네, 회장님.”
“가둬 놔. 아마 어디 사는 성질 급한 놈이 곧 제 물건 찾으러 오지 싶구나.”
“알겠습니다.”
“쯧, 제 가치에 알맞은 물건을 구비해서 써야 하는 법이라고 누누이 가르쳤건만. 어디서 저런 쓰레기 같은 걸 주워 와서.”
간단한 대화 후에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낮은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차영은 온몸에 기력이라곤 죄다 빠져 옴짝달싹할 엄두도 못 냈다. 엄청난 폭행을 당한 것도 아닌데, 누가 온몸을 두들겨 대기라도 한 듯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안 실장이리라.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차영이 그를 쳐다보기 위해서 고개를 애써 돌렸다. 의자에 묶여 불편하게 쓰러진 채로 안 실장을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싸늘한 눈매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낯이 익었다. 차영은 좀 더 선명하게 그를 보기 위해 눈물이 흥건한 눈을 깜빡깜빡 해 봤다.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차영의 눈가에 눈물이 끊임없이 차올랐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자신이 누워 있고,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 구도가 묘할 정도로 기시감이 들었다. 차영은 꼭 정신은 온전한데 몸이 쉽사리 말을 듣지 않는 환자처럼 눈만 열심히 깜빡여 보였다. 그러자 안 실장이 제 쪽에 할 말이 있다고 여겼는지 몸을 숙여 귀를 기울이는 액션을 취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일단 심신 안정을 위해 방을 옮기고 회장님 주치의께 간단한 진료를 부탁드릴 예정입니다.”
차영은 힘겹게 고개만 저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주 어렴풋하게, 오래전 어떤 사람의 음성이 차영의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이 애가 차영이군요.〉
죽기 전 아버지 또래 어떤 남자의 음성이었다.
차영이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의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날 들었던 문장들이 유화 물감 덧입혀지듯 하나씩 입력됐다. 그땐 너무 어려서였는지, 어쩌면 줄곧 꺼내어 놓기 두려운 기억이어서였는지 여태까지 까맣게 지우고 살았던 날의 장면이었다. 이윽고 무차별적으로 떠오른 억눌린 기억의 편린들이 그를 괴롭혔다.
〈아드님이 아주 똘똘하고 예쁘게 생겼네요. 전 슬하에 아직 아이가 없어서…….〉
〈아, 안 실장님 아직 자녀가 없으시군요.〉
〈네, 결혼한 지는 꽤 됐습니다만. 제가 워낙 바쁘기도 하고요.〉
〈아이는…… 신이 준 선물이죠. 저도 우리 차영이 때문에 버팁니다.〉
그날은 어머니가 당직을 서는 날 밤이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제집에 밤늦게 누군가 찾아왔다. 어린 차영은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생택쥐페리의 「야간 비행」을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선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수마와의 투쟁에 열심히 임하고 있는 제 머리카락 위를 불쑥 나타난 어른 남자의 손길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눈꺼풀과의 사투에서는 끝내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느껴서 어설프게 정신이 남아 있었는데도 눈은 계속 감고 있었다. 덕분에 방문자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부디 꼭 좀 부탁드립니다. 회장님께서도 간곡하게 청하신 일입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궁금해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남자를 몇 번 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남자의 마른 손, 그때 입고 있었던 검은색 코트, 그렇게 천천히 몸을 타고 올라가면 보였던 차가운 눈매, 거기까지 정도만 겨우 인지할 수 있었다.
곁눈질하듯 살피던 어린 차영은 다시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에 취한 아이의 귓전에 아득한 두 개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니 별장까지 이 기장님께서 운항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동승자는 한주혁 선생님이라고, 아주 전도유망한 의사분입니다. 현재 환자분께 두 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금 응급 처치가 없다면 목숨까지 위태롭습니다.〉
〈정말 큰일이네요. 많이 위독하신가요?〉
〈그렇습니다. 한 사람 목숨 살리시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당연히 도와야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비행으로 아버지가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긴커녕 자신을 포함한 두 사람의 목숨이 한꺼번에 날아가고 말았다. 이튿날부터 차영은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려주는 「야간 비행」의 유려한 문장들을 영영 감상할 수 없게 됐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이 책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면서 투정을 부리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해 본들 이미 늦은 일이었다.
20여 년 전의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난 차영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안 실장을 쏘아보았다. 차영의 눈앞에 그때의 젊은 남자가 아닌 지긋하게 나이가 든 그가 보였다.
“이차영 관제사.”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진실을 알게 되는 일은 언제나 가혹하다.
그런 악취 나는 사건에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전말을 꽁꽁 숨겨 놓은 찜찜한 이유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제가 직접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전신을 부들부들 떨던 차영은 자신을 부축하는 안 실장의 손등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읏,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예기치 못한 반격에 안 실장이 차영을 세게 뿌리쳤다. 그 바람에 어설프게 치켜 올려져 있던 차영의 머리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퍼억! 차영의 옆통수가 제 눈물이 흥건한 바닥을 향해 수직 낙하했다.
“아윽……!”
차영은 그대로 땅에 고개를 처박고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