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80화 (80/144)

80화

여기에서 계속 목청을 높여 사람을 불러 보는 게 제 안위에 도움이 되는 일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벗어날 수 있을 만한 기회를 엿보려면 눈앞에 사람이 있어야 했다. 머리를 굴리기 위해 입을 닫고 차영이 한참이나 침묵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바깥에서 분명한 인기척이 들렸다.

“저기요! 이봐요! 안 실장님? 안 실장님!”

밖에 누가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사람들 중 제 쪽에서 이름을 아는 건 안 실장 하나여서, 망망대해 위의 썩은 갑판을 붙잡는 기분으로 그 이름을 외쳤다.

차영이 마치 비명처럼 소리치는데, 미닫이 형식으로 된 중문이 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건너편에 있는 출입문이 뒤이어 아가리를 벌리더니 익숙한 두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 회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차영이 애타게 부르던 안 실장이 성심껏 따랐다.

그들은 차영이 있는 공간을 향해 느리게 걸었다. 차영의 맞은편 소파 형식으로 된 의자에 문 회장이 먼저 앉았다. 그런 그의 뒤에 무표정한 안 실장이 자리를 잡았다.

차영은 움찔했다. 눈도, 귀도, 코도 모두 감각을 느낄 수 있는데 몸만 묶여 있다는 건 그중 한 감각이 통제된 것만큼이나 엄청난 공포심을 몰고 왔다. 모든 극한의 장면을 제 시청각 따위로 습득하게 되지만 결국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을 동반하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차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문 회장이 안 실장에게 턱짓했다.

“넌 잠깐 나가 있어.”

어떤 명령에든 복종하는 충실한 개는 꾸벅 인사하고 자취를 감췄다. 다시금 미닫이 중문과 출입문의 순서로 입구가 봉쇄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두 사람만이 명부전에 남겨졌다. 주변이 무척 고요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최대한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한 차영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일단 눈앞에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원인이 나타나자 제게 이렇게 무례하게 군 데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몰라?”

“제가 지금 이 꼴이 된 정확한 이유를 묻는 거예요.”

“지난번에 우리가 만났던 일은 함구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한태주가 찾아오기라도 했어요? 그거 억울하셔서 저한테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 사직서를 보내왔다. 올해까지만 조종간을 잡고 관두겠다던데.”

차영은 묶인 채로 움찔했다. 그걸 본 문 회장이 지긋이 차영을 관찰하듯 직시했다.

“너도 아는 내용인가 보구나.”

“회장님도 짐작하고 계셨던 부분 아닌가요?”

“하지만 네가 촉진제가 됐다면 너한테 내릴 처분은 달라지지 않겠니?”

“이렇게 몰상식하게 절 납치하시는 게 회장님의 처분입니까?”

“이차영 관제사, 입조심해. 난 세 번까지 기회를 주는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야. 내가 주는 기회는 이 세상에서 태주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단 두 번이지.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어도 두 번부터는 안 되는 법이니까. 넌 지금 그걸 걷어찼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야.”

“…….”

“물론 태주가 사직 의사를 밝힌 건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이제 일을 가르쳐야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차영은 입을 다물었다. 문 회장은 태주에게 바라는 게 명확했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대응책을 펼치든 여하를 막론하고 제 좋을 대로 해석하려 들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도태되고 끝났겠지만 문 회장은 권력과 권위 둘 다 지닌 드문 인사였다. 아마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해 내리라. 그 과정에서 태주는 제 뜻과는 관계없이 희생될지도 모른다.

가끔 태주는 문 회장의 존재 자체가 스트레스 기제인 양 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는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나, 피가 섞인 외할아버지에게 그가 왜 그토록 박했던 것인지 조금이나마 납득하게 됐다. 차영은 미간 사이를 좁히고 문 회장을 쏘아봤다.

“회장님은 본인이 한 기장한테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

“넌 알아?”

“잘 모릅니다.”

다만 그의 농축된 슬픔으로 짐작하고, 또 느낄 뿐이다.

“어쨌든 지금 하신 말씀이 진심이라면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셔야죠. 이렇게 사람 납치해서 묶어 놓고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다치게 할 생각은 전혀 없단다. 넌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그러면 대체 왜 이러시는…….”

“진실을 다 알게 된 뒤에 말이다.”

이 말은 아주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처음 낯선 곳에서 제 몸이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와 필적할 만큼의 아득함을 느낀 차영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이곳에서 내보내 주고 말고는 모두 문 회장의 마음대로라는 듯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저 인지하는 것과 직접 상대의 입으로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른 열패감을 선사했다. 문 회장은 이 적막의 공백을 촘촘하게 메우듯 말을 이어 붙였다.

“그러게 내가 경고했을 때 알아서 떨어져 나갔으면 좋았잖아. 네가 그 애 옆에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 있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거다. 도대체 왜 미련한 것들은 꼭 본인의 불행을 자초하는지.”

문 회장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부자가 대대로 민폐를 잘도 끼치는구나.”

혐오감을 눈 아래 묵직하게 담은 채로 그를 직시하고 있던 차영은 움찔했다. 문 회장이 갑작스럽게 제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도매금으로 묶어 꺼낸 맥락이 이해가 안 됐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네 이름이 이차영이지. 네 아비는 20여 년 전에 한국 항공에 있었던 이정욱 기장이고.”

그가 제 호구 조사나 하겠다고 이 말을 꺼낸 건 아닐 것이다.

“네 아비가 누굴 죽였는지 알고 있어?”

“제 뒷조사 좀 하신 것 같은데 우리 아버지가 누굴 죽이다니,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서 호도하지 마세요. 아버지 마지막 비행은 사고였어요. 아버지 잘못도 아니…….”

“한주혁. 이런 이름 들어는 봤니?”

분명히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차영은 소리 내어 불러 보진 않았으나 제 안에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곱씹어 봤다. 태주의 아버지 이름과 같았다.

“태주 놈 친부 이름이다. 이정욱 기장이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 죽었을 때, 한주혁이도 거기 같이 탑승했었지. 네 아비는 살인자야. 심지어 태주 놈 아비를 죽였다.”

삽시간에 차영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어디서 버러지 같은 게 감히 내 하나뿐인 손자를 건드려. 사내놈 주제에 불결하게…….”

이미 문 회장의 차가운 힐난은 제대로 입력되지도 않고 있었다. 차영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까마득한 부모님 대에서부터 그들의 인연이 있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가 자신보다 앞서 제 존재를 알았으리라고는 그의 가끔 툭 던지는 듯한 말들을 통해 짐작했다. 그러나 고작해야 태주가 공항 등지에서 차영을 몇 번 먼저 목격했던 게 아닐까, 정도로만 자신이 모르는 그들 사이의 인연을 상상해 왔다. 선뜻 믿긴 어렵지만 그가 자신을 짝사랑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런 멀고도 깊은 인연은 두 사람 모두에게 너무 가혹했다.

“한태주…… 하, 한태주도 이거 알아요?”

차영이 제일 먼저 하고자 한 건 놀랍게도 평생을 걸쳐 믿어 왔던 제 아버지를 위한 변론이 아닌 자기변호였다. 그리고 질문을 내뱉으면서 차영은, 이 과정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확인 사살이 될 뿐이리라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그는 태주가 자신을 볼 때 종종 내비치는 애틋한 시선을 다시금 되새기게 됐다. 그걸 느낄 때마다 자신이 지닌 마음의 크기에 비해 태주의 것이 더 크기 때문이리라고 쉽게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그건 틀린 모양이다. 문 회장의 답변보다, 더 진실한 대답이 그곳에 있는 듯했다.

태주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꾸 최대한 감추려 들고, 결국 그러는 게 버거워져 시간을 준다면 언젠간 자신의 슬픔을 반드시 고백하겠다고 제 결심을 밝혔던 것이다. 차영의 뺨으로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결국 그 유족들은 우리 아버지를 원망하겠지? 다른 것보다 그게 너무 억울해. 한 번쯤 만나 보고 싶어. 그 사람 가족들은 뭔가 알고 있을 것도 같은데…….〉

자신이 했던 이 말을 들으면서 태주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그를 만나야 했다. 그런데 현재의 차영은 단단히 묶여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한태주는 대체 뭘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최소한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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