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들이 관람하기로 예정된 열기구 축제 시작일은 10월 첫 번째 주로, 겨우 사흘만이 남아 있었다. 내일은 차영이 야근을 하는 날이라서 짐을 쌀 여유 시간이 부족할 듯했다.
태주는 굳이 여러 가지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면서 현지에서 그때그때 사는 것으로 해결하자 권했으나, 차영의 생각에 곤란한 일이 생긴 다음에 필요한 물건을 찾게 되면 이미 늦을 것 같았다. 이럴 때 성격이 정반대라는 걸 실감하게 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리 캐리어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차영의 표정이 심각했다. 한 번도 이토록 먼 거리로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어서 뭐가 쓸모 있고, 또 그렇지 않을지에 대한 실질적 감각은 흐렸다. 추측할 뿐이었다.
“여권, 신용 카드…… 여권 있는데 내 신분증도 따로 챙겨야 하나?”
도윤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볼까 하다가 지금쯤 잠들어 있을 것 같아서 관뒀다. 그는 제 앞에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커다란 캐리어로 눈을 돌렸다. 이것도 이번에 장만한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구비해 둘 생각도 못 하고 살았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사념이 그를 괴롭혔다.
버틸 수 있을까.
제주도처럼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지근거리가 아니었다. 미국은 꽤 장거리군에 속했다. 그때처럼 태주가 직접 운항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가 제 옆에 있어 주는 쪽이 훨씬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어머니한테는 미리 말씀을 드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설렘 반 두려움 반의 마음을 품고 차영이 다시금 짐을 쌌다.
대충 물건들을 수납하듯이 넣고 보니 가방이 한가득 차 있었다. 분명히 이걸 보면 태주가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전부 쓰임새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뭘 빼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곤란해하던 차영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거실 벽면에 있는 마그넷 판에 눈길이 닿았다.
홀린 듯이 일어나서 그쪽으로 향한 차영은 이제 거의 판 전체를 빼곡하게 채워 가는 마그넷들에 일일이 아낌없이 시선을 주었다.
〈이거 대체 언제까지 줄 건데?〉
〈네가 여권 가지고 비행기 탈 수 있게 될 때까지.〉
이번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면, 그가 제게 이 마그넷들을 선물하는 일도 멈추게 될까. 두 사람만 아는 은밀하고 소소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사실 꽤 재미있고 뿌듯했다. 물건을 살 때마다 제 얼굴을 떠올렸을 태주가 사랑스럽고, 덕분에 자신도 하나씩 늘어 가는 이걸 볼 때마다 그가 더 좋아졌다.
그러고 보면 작년 가을쯤 태주를 처음 만나게 됐다. 곧 그를 알게 된 지 1년 정도가 지나는 셈이다. 시간상으로 길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이 워낙 많아서 무척 친밀한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감정은 후퇴해도 시간은 그렇지 않으니, 그들이 헤어지지 않는 한 이 유대감은 강해질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시간 진짜 빠르네.”
차영은 나지막하게 혼잣말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마그넷을 쥐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지금 그가 있을 상해였다. 그 위에 가볍게 뽀뽀를 쪽 하고는 대충 아무 곳에나 내려놓았다. 짐도 대충 쌌으니 태주의 집으로 올라갈까 싶어 카드 키를 찾고 있는데, 현관에서 작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태주이리라고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님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태주는 지금 한국에 없었다. 호텔에서 씻고 나와 다시 연락을 하겠다던 메시지를 받은 게 아까 자신이 짐을 싸기 전이었다. 그는 내일 귀국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태주에게 제집의 카드 키 같은 것을 준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이 건물의 주인이라고 했으니 얼마든지 필요에 의해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태 한 번도 차영의 동의 없이 그런 비슷한 일조차 행한 적이 없었다. 한태주는 무례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에선 정중했다.
‘누구지 대체.’
갑자기 불안이 엄습한 차영이 현관 쪽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문이 바깥에서부터 열리고 있었다.
식겁한 그가 캐리어에 넣어 두었던 물건 중 상대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게 없는지 눈길을 두는 사이, 사람들이 구둣발을 신고 그의 집 거실을 밟았다.
전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왜 나쁜 놈들은 꼭 검은 옷을 입을까요? 자기들이 저승사잔 줄 아나 봐요.”
수문장처럼 서 있는 남자들의 뒤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안 실장이었다. 차영이 그를 겨냥해 비꼬듯 물었으나, 그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본인과 함께 온 덩치 큰 남자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눈짓했다. 차영은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휴대폰까지 닿기엔 거리가 멀고 제 팔이 짧았다.
“나한테 손대지 마! 억……!”
발소리조차 없이 빠른 속도로 차영에게 다가온 두 명의 남자가, 그의 급소를 순식간에 가격해 차영을 기절시켰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차영의 귓불 아래에 길고 날카로운 주삿바늘을 넣었다. 동시에 그의 온몸이 시체처럼 늘어졌다.
그들은 무척 잘 훈련된 사람들이 분명했다. 모두 일사불란하게 제 역할을 했다.
한 사람이 기절해서 쓰러진 차영을 조심스럽게 둘러멨다. 나머지 사람들은 처음 모습 그대로 거실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캐리어를 얌전히 닫아 짐 싸기 이전에 세워 두었던 거실 문간에 두고, 조금 전 차영이 아무렇게나 얹어 둔 상해라고 적힌 마그넷마저 맨 처음 위치에 고이 붙여 장식했다. 그러고는 차영의 휴대폰을 챙겼다.
꼭 아무도 침범한 적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고 깔끔해진 집 안을, 안 실장이 빙 둘러보았다. 마치 부하 직원이 올린 보고서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듯 눈매가 냉정하고 날카로웠다. 잠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던 그는 마침내 손수건으로 스위치를 덮어 집 안의 불을 모두 소등했다.
그러고는 문을 닫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낯이 익다.
흐린 눈을 깜빡거리던 차영은 점점 선명해지는 제 시야에 어떤 두 여자가 비치는 것을 느꼈다. 한 사람은 아주 젊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했다. 두 사람 모두 낯이 익었다. 물론 실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인 쪽은 얼마 전 뉴스에서 부고 소식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젊은 쪽의 얼굴도 기억이 났다. 자신이 젊은 그녀를 만났던 건 아주 낡은 사진을 통해서였다.
“한태주…….”
그의 어머니가 분명했다. 제 기억에 있는 얼굴이기도 했고, 그게 아니었더라도 태주를 많이 닮아 있어서 의심 정도는 해 봤을 법했다.
태주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 보는 차영의 목소리가 다 갈라져 나왔다. 당연히 목구멍이 따갑고 아팠다. 뒤늦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둘러보게 됐다. 그들의 얼굴은 눈에 익었지만 이 장소는 처음 온 게 분명했다.
조도가 낮은 불빛이 맴돌았고, 쓸데없이 공간은 넓었다. 두 사람의 영정 사진으로 보이는 액자 앞에 분향할 만한 향로가 놓인 것을 보니 명부전쯤 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자신은 고인을 기리는 이 음침한 공간에 묶여 있었다.
“윽……!”
의자에 온몸이 결박되어 있어서 운신이 어려웠다. 두 팔과 다리를 뻗어 봤지만 제 손목과 발목만 더 옥죄어 올 뿐이었다. 현재 정확히 어느 지역쯤에 자신이 있는 것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창문 같은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서울에서 외져 있거나 오래 방치된 장소는 아니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공간에 집기들은 적었지만 매우 깨끗하게 청소가 돼 있었고, 분위기가 정적이긴 했으나 분명히 사람이 자주 다녀가는 듯한 정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단지 사방에 맴도는 희미한 향냄새가 자신의 불운한 미래를 상징하는 후각적 오브제 같아서 마음속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색이 투명한 어항에 물감을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물은 제 색을 모두 잃고 만다. 차영도 애써 침착하려 했으나 한번 무섭다는 생각이 들자 그것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안 좋은데…….’
머릿속에 걱정이 가득해진 차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공포는 또 다른 공포를 낳고, 급기야 사람을 심약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처음에 눈을 떴을 때는 멀쩡하던 차영이 점점 제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의지할 데라곤 죽은 태주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밖에 없어서 사진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들은 야속하게도 말이 없었다.
“젠장…… 아무도 없어요?”
아무리 통속 드라마에 나오는 일은 다 해 보고 있다손 치더라도 납치 감금은 너무 과했다. 차영은 몇 번 몸을 들썩여 봤다. 그러나 의자에 차영을 포박하고 있는 이 위험한 줄은 어찌나 단단하게 매듭이 지어져 있는지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