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차영은 노크도 없이 열리는 출입문을 힐끗 살폈다. 교대하는 사람이 없는 시간이라 누군가 들어올 이유가 없는 장소였다.
“탑장님?”
침입자가 누군지 제 나름대로 짐작해 보려 했으나,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궁금증이 극대화된 차영이 고개를 뒤편으로 빼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하는데, 정반대인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출입문을 타고 들어와서 한 바퀴 빙 둘러 차영의 캐비닛 쪽으로 걸어온 모양이었다. 왠지 위기의식이 느껴져서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부드럽게 제 입을 손으로 막는 것이 더 빨라 좌절됐다.
“읍……!”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팔꿈치를 이용해 상대를 치려다가,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게 됐다. 입술을 틀어막고 있는 손 위에 차분히 자신의 손을 얹었다. 불거진 뼈마디를 더듬어 봤다. 퍽 익숙한 형태였다. 크고, 단단하고, 긴 손가락의 뼈마디가 무척 곧은 예쁜 손의 형태가 절로 머리에 그려졌다.
게다가 등 뒤에 버티고 선 이의 자신보다 큰 키와 넓은 어깨 따위도 기시감이 크게 이는 요소였다. 무엇보다, 친숙한 향수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결국 웃음을 터트린 차영이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태주였다.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일정에 맞춰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각은 아직 10여 분 남아 있는 상태였다.
“여기 아무나 못 들어오는 덴데 어떻게 들어왔어?”
“어떻게 들어오긴. 너 처음에 나 관제탑에서 만났던 거 잊었어?”
그가 공항 공사 직원들용 출입증을 흔들어 보였다.
“그거 한 기장 거 아니지?”
“국토 교통부에 연줄 있어서 얻었어.”
“뭐야. 진짜?”
“아니면 인천 공항 공사에 지분이 좀 있어서?”
“대체 뭐가 정답이야? 본인은 공항 전방위를 막 나다니질 않나, 외할아버지는 해외 국빈들 올 때 개방하는 공항 귀빈실을 막 쓰질 않나.”
농담처럼 뒷말을 이어 가던 차영이 입을 헙 다물었다. 이 순간의 자신이 태주를 보고 반가워진 마음에 긴장이 풀려 경솔하게 굴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챘다.
“그럴 것 같더라.”
“…….”
“이차영 관제사, 너 아직도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랬을 것 같았는데 넘어갔으면 이번에도 그냥 묻어 주지?”
“네 의사 존중해서 한 번은 넘어갔어. 괜히 외할아버지 긁었다가 부스럼 일어서 불똥 너한테 또 튈 것도 신경 쓰였고. 하지만 네가 방금 딱 걸렸지. 여기에서 어떻게 넘어가. 말해. 뭐라셨어. 나한테 말하면 일이 더 쉽게 풀릴 수도 있잖아.”
“그냥 생각보다 별 대단한 대화는 아니었어. 우리가 친구냐고 물으셨고, 난 부인했고. 그래서 그쪽한테서 떨어지는 대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을 하라길래…….”
“달라고 하지. 한 수천억쯤. 너 그거 받아도 되는데.”
장난인 듯 진심인 듯 받아치는 태주의 음성이 유난히 쓸쓸한 건 기분 탓일까.
“내가 그걸 왜 받아? 단칼에 거절했어. 이건 쓸데없는 걱정 할까 봐 덧붙이는 건데 참고로 나 까마득한 어른 앞인데도 하고 싶은 말 다 했으니까 너무 염려 안 해도 돼. 하, 나 그날 진짜 멋있었는데. 안타깝다, 한 기장은 그거 못 봐서.”
웃으라고 한 말인데, 그걸 알 태주는 웃어 주지 않았다.
“좀 더 날 의지해 주면 안 돼?”
“정말 별일 없었어. 괜히 신경 쓰이게 하기 싫었던 내 마음도 한 기장이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다음부턴 절대 안 그럴 거야. 나도 무서운 거 있어. 회장님 무섭더라.”
“약속할 수 있어?”
“각서도 쓸 수 있어.”
태주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덤덤히 대꾸하는 차영을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는 물끄러미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마지못해 차영의 것에 제 손가락을 걸고는 졌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차영은 미소 지었다. 다만 한편에 불편함은 남아 있었다. 지금 태주가 보이고 있는 반응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길길이 날뛸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꿔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었다. 자신이 신경 쓰고, 또 직접 경고까지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데, 상대가 그것을 혼자 감수하고 몰래 넘기려 했다면 매사에 신사적인 편인 차영도 불같이 화를 냈을 터다.
“그런데 한 기장 생각보다 화 안 내네.”
“그런 일 생기리라고 생각은 했어. 한 번 정도는 네가 잘 넘길 줄도 알고 있었고.”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야.”
“믿을 수가 없네……. 이러니까 더 무서워.”
“실은…….”
그가 살짝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비밀을 털어놓듯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나 곧 사직서 낼까 하고.”
“사직서? 한국 항공?”
“응. 그냥 네가 가까이 있는 이 상태가 좋고 편해서 계속 안주하고 있었어. 그런데 원래 처음 여기 올 때부터 외할머니 돌아가시는 때까지라고 내 안에서 정하고 온 거였거든.”
“아…….”
“새로 사람을 충원하기도 해야 하니까 올해까지만 하기로 운항 관리 팀에 사직 의사 전해 두고 올라오는 길이야.”
자세한 건 모르지만, 왠지 그건 단순한 사직서 한 장이 아니라 외할아버지와의 결별을 암시하는 매개체처럼 들렸다. 태주 또한 맥락에서 살짝 벗어난 듯한 그 이야기를 꺼낸 건 그런 의도이자 의미였으리라. 앞으로 차영에게 이런 일이 없도록 아예 관계를 손절하려는 것이다.
그답지 않게도 장황하게 대꾸한 태주는 의아해하는 차영이 뭔가 되묻기도 전에 와락 끌어안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를 꾀했다.
“아, 좋다…….”
“이거 놔,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탈의실에 CCTV 있으면 인권 침해 아니야? 인권위에 제소해.”
“갑자기 사람 들어올 수도 있잖아.”
“만에 하나 문 열리는 소리 들리면 바로 놓아줄게.”
논리에 허점이 없어서 더 딴죽을 걸지는 못했다. 결국 포기하고 태주를 마주 안은 차영이 나지막하게 꾸짖었다.
“늘 나만 걱정해. 이렇게 말하면 한 기장은 ‘네가 나 대신 하니까 됐다’ 그러겠지?”
“그러겠지.”
“제복 입고 겁도 없다.”
“매일 공항 왔다 갔다 하는 운항 승무원이 관제탑 좀 올 수도 있지 되게 몸 사리네. 넓게 보면 우린 모두 한 가족이야. 잊었어?”
“난 그쪽이 너무 안 사리는 거라고 보거든.”
“그래도 스릴 있지? 롤러코스터를 탄다고 생각해.”
“가르칠 게 산더미야.”
이미 알고 있다는 양 태주가 차영의 몸을 더욱 빠듯하게 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캐비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긴 채로 그가 움직이는 통에 차영도 필연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게 됐다. 마침내 제 뒤통수가 캐비닛 문에 가볍게 닿았다. 차영은 그를 올려다봤다.
태주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꽤나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늘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근사하다. 그리고 아주 사적인 영역에서 그가 보였던 눈물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게 됐다. 차영은 태주의 귓불을 어루만졌다.
“한태주 너 진짜 잘생겼다.”
“알아.”
“본인 잘난 걸 본인이 너무 잘 알아서 되게 재수 없어.”
“그것도 알아.”
“한 기장 한국 항공 그만두면 뭐 하는데? 국내 항공사들이 한 기장 받아 줄까?”
“하, 나 비행 잘해.”
“그 사람들은 비행 잘하는 개인인 한 기장보다 항공사를 소유하고 있는 그쪽 외할아버지의 권위가 훨씬 더 무서울걸? 뉴스도 안 봐? 대영에서 후계자로 아주 도장 찍었던데. 본인 밑으로 들어올 때까지 앞길 계속 막으시면 어떻게 해?”
사실 그것 때문에 요사이 태주의 비행은 꽤나 불편했던 차였다. 아무리 회사 차원에서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언론의 사진 요청에도 폐쇄적으로 굴고 있다고는 하나, 이미 이름과 해당 항공사의 기장이라는 정보를 노출한 뒤였으니 알음알음 그를 향해 알은체를 하는 외부인들이 생겼던 터다. 기장 방송을 동승하는 부기장들에게 전부 일임한 지도 꽤 됐다.
“너 생각보다 현실적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좀 더 무모해져.”
“말했잖아. 나도 한태주 씨와의 관계에 대해 아주 진지하다고.”
“음, 다만 무모할 수 없는 이유는 바람직하고.”
“관두면 외항사로 갈 생각인 거지?”
차영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주는 제 고개를 숙였다.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춘 그가 입을 달싹이는가 싶더니 살짝 벌렸다.
“나랑 같이 미국 갈래? 아니면 캐나다. 관제 업무 환경도 여기보다 더 잘 마련돼 있다던데.”
“거기에서 나 받아 준대?”
“넌 뭐든 할 수 있어. 모든 지원은 내가 할게.”
“그쪽은 생각보다 긍정적이란 말이야. 진담이야, 그냥 하는 말이야?”
“당연히 진담인데 네가 그냥 하는 말로 듣고 싶은 것 같아서 그게 아쉬워.”
“아무 준비가 안 된 건 사실이야. 사귀는 사람이 멀리 간다고 해서 따라갈 용기도 없어. 나한텐 내 생활과 내가 구축한 환경이 있고, 한 기장 말처럼 안주하는 건 좋고 편하잖아.”
“…….”
“한 기장도 위기가 느껴지니까 관둘 의지도 생긴 거겠지. 나한테도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의지가 들게 만들어. 앞으로 내 행보는 그쪽의 매력 여하에 달렸어.”
“성적 매력도 포함돼?”
“방금 그 말로 전체적인 매력 수치의 1점 정도를 깎아 먹었어.”
픽 웃음을 터트린 태주가 본격적으로 차영에게 다가왔다. 그가 차영의 두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끼워 넣더니, 뺨을 두 손으로 지탱하듯 받쳐서 입을 맞췄다. 조심스럽게 입술 사이를 가를 때까지는 느긋했는데, 마치 선악과처럼 아슬아슬한 장소에 탐스럽게 숨겨져 있던 차영의 혀끝을 만난 뒤로 난폭해졌다. 두 개의 뜨거운 살덩이가 조화롭게 엉켜들었다.
“아…….”
별일 아닌 양 쉽게 말했지만 태주가 사직서를 제출한다는 건 원래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말과 다르지가 않을 것 같아 차영은 내심 불안했다.
물론 서로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장거리에서도 교류는 이어 갈 수 있었다. 다만 비행기를 타는 것도 어려워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해외를 드나들 정도로 각종 여유가 많지도 않은 자신 때문에 십중팔구 태주는 두 배로 힘들어질 터다.
“읏…….”
이제 와서 놓아주기엔 그가 너무 좋다.
태주의 목을 끌어안은 차영은 흔들리는 제 마음을 애써 달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