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한 기장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내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가장 먼저 배웠던 건 최대한 내 슬픔을 빨리, 솔직하게 다 털어 내야 한다는 거였어.”
뒤늦게 태주가 차영을 응시했지만, 이번엔 차영 쪽에서 시선을 강에 오롯이 던진 채였다.
“난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어떤 누명을 썼던 건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도 꽤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됐어. 아무래도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엄마가 나한테 제대로 알려 주려고 하질 않으셨거든.”
“…….”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몇 년 뒤라야 나는 아주 뒤늦게 많은 걸 깨닫게 됐는데, 엄마는 그사이 분명히 극복할 시간이 많이 있었을 텐데도 자기 슬픔을 다 털어 내질 못했던 것 같아. 애써 겨우겨우 잊고만 살다가 내가 조금씩 진실을 알게 되니까…… 내 슬픔에 같이 매몰됐어.”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그때 그녀가 종종 복용했던 것은 우울증 약이었던 듯했다. 차영에게만 간단하게 식사를 차려 주고 제 끼니는 걸렀고, 때론 무기력하게 앉아 있기도 했었다. 당연히 어린 차영은 그게 마음에 걸렸고, 자연스럽게 철이 빨리 들게 됐다.
“그때 내가 엄말 더 슬프게 만들었던 걸까, 아니면 엄마가 날 더 슬프게 만들었던 걸까.”
입술을 달싹이던 태주가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슬픔을 전부 털어 낼 수 있는데?”
“잘 모르겠어. 한 기장 건 너무 많이 쌓여 있고, 또 내가 그 양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어쨌든 한 기장이 지금 극복하지 않으면 그쪽은 우리 엄마처럼 날 슬프게 만들게 될 거야.”
“그럴 일 절대 없어.”
“그쪽은 안 그럴 수 있어. 스스로 강한 사람이고. 당연히 버틸 수 있겠지. 그런데 내가 그런 한 기장을 너무 좋아해서 나 몰래 괴로워할 때마다 같이 무너지게 될 것 같아. 우리 엄마도 내 앞에선 눈물 한 방울 보인 적 없어. 그래도 난 같이 슬펐지. 나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차영아.”
나직이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차분한 음성은 지나치리만큼 덤덤해서 도리어 슬펐다. 차영은 무심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제 눈엔 저 아름답고 무한한 광경보다 옆자리의 태주가 훨씬 빛난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했잖아. 나 너 때문에 다치기 싫다고. 아직 그 정돈 아니라고. 게다가 나 진짜 아픈 거 정말 싫어하는데…… 왠지 이러다가 내가 다 참고 견뎌 주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래.”
“…….”
“한 기장이 안 슬퍼야 나도 안 슬프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후로도 지금까지 줄곧 태주는 뭔가를 깊게 꾹꾹 억누르고 참고 있는 사람 같았다. 툭 건드리면 전부 폭발해 버릴 듯한 날카로움과 예민함이 느껴졌는데 그걸 곁의 자신을 향한 애정으로 애써 견뎌 내는 것처럼 보였다. 차영은 그게 싫었다.
슬픈 게 있으면 슬픈 대로, 힘든 게 있으면 그런 대로. 감정에 유효 기간이라는 건 없지만 계속 지층처럼 쌓여서 좋지 않은 감정이라는 건 있기 마련이었다.
“너무 외로워하지 마. 이제 내가 한태주 씨의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전부 되어 줄게.”
그의 이 다정한 고백을 들은 태주는 대답 대신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모든 걸 알게 되어도 그가 자신의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전부 되어 주겠다고 말해 줄까.
확신이 없었다.
* * *
그들을 태운 차는 수풀이 우거진 숲의 근방에 외롭게 주차되어 있었다. 한참 뒤편으로 산을 넘으면 드문드문 펜션들이 있고, 더 가까운 근방에는 아까 전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였던 강이 흘렀다. 이곳에 레스토랑의 손님들이 보통 야외 주차를 해 두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늦어서인지 인적이 거의 없었다.
가로등이 적은 외지는 어두웠다. 일부러 은밀한 행위를 하라고 마련해 뒀대도 이상하지 않게 들릴 만큼 창밖 사위에 음험한 분위기가 맴도는 기묘한 장소였다.
차 안의 두 사람은 카 시트 위에 몸을 겹치고 있었다. 차영을 조수석에 먼저 앉히는 듯하던 태주가 예고도 없이 시트를 길게 눕히는 통에 저항할 틈이 없었다. 그사이 태주가 빠르게 차영의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고는 수 분째 이 상태였다.
“이제 내려와. 무거워.”
하중을 전부 받아 내고 있던 차영이 겨우 내뱉었다. 그러나 태주는 도리어 더 짓누르듯 차영에게 제 몸을 기댔다. 그가 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계속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행동도 그렇지만 어느새 제 복부를 압박하고 있는 그의 성기 윤곽이 조금씩 그려졌다.
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거나, 직접 말하는 게 곤란하면 자연스럽게 손을 뻗으면 될 텐데 왜인지 태주는 그저 차영을 안은 채로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비키라고 해도 흘려듣고, 그렇다고 어떤 액션을 취하지도 않으니 차영은 좀 답답했다. 이토록 밀접하게 닿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더 깊숙하게 섞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는 걸 모르는 것일까. 하나 그가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둔하진 않을 터다.
“차영아, 나…….”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리고 아주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 어울리지 않게 밭은 숨을 내뱉으며 뒷이야기를 흐렸다. 말을 고르는 기색이어서, 차영은 얌전히 기다렸다.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
무슨 할 말이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아마 한태주라는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슬픔에 관한 것들이리라.
어린 시절 조실부모한 외로움일 수도 있었고, 제 외조부모에 관한 단상일 가능성도 있었다. 혹은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곤란함일 수도, 현재 품고 있는 크고 작은 고민일 수도 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얼추 어떤 영역인지 정도는 가늠이 됐다.
그가 솔직히 말하겠다는 건 털어 내고 싶다는 의지의 피력인 터라, 차영은 그저 기뻤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다 이야기할게.”
“얼마나? 한 기장이 말할 생각만 확고하다면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기꺼이 할 수 있어. 나 의외로 지구력 있거든. 몰랐지.”
“정말 조금만 더. 얼마 안 걸려.”
대관절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벌써부터 겁을 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태 자신이 보아 온 태주는 했던 말은 지키는 사람이니 때를 기다리면 알게 될 듯했다.
사실 그가 언제쯤 제 내부를 괴롭히고 있는 고민들을 다 털어놓을지 그 시기가 궁금하기보다는 왜 굳이 미리 이런 언질을 하는지에 더 신경이 갔다. 얼핏 그가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는 듯 보이지만, 반면으론 자신에게 들을 준비를 하라는 경고처럼 와닿았던 것이다. 단순히 혼자만의 고민은 아닌 듯싶었다.
그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몰랐지만 차영은 불안해졌다. 제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라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그래서 그의 인체에 눌려 있는 두 팔을 힘겹게 뻗어 태주를 끌어안았다.
이것을 신호탄으로 태주가 고개를 틀어 차영에게 입맞춤을 시도했다. 순순히 제 입술을 내준 차영은 태주의 혀가 주는 충만감을 느끼면서 차분히 눈을 감았다. 침대 같은 안정적인 공간과 달리 원체 좁고, 또 야외라는 긴장도 더해져서 몸을 운신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내심 불안해하는 차영을 그도 눈치챈 것 같았다. 태주가 차영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자세를 틀어 자신이 시트 위에 안착하고 그를 제 허벅지 위로 올려 앉혔다. 그러고는 엉덩이까지 무리 없이 덮는 간절기용 트렌치코트를 차영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나름대로 태주의 위에서 위치를 잡고 있던 차영은 그의 앞섶을 만지작거렸다. 천 아래에서 이미 딱딱하게 발기한 태주의 성기는 육안으로도 강직도 식별이 가능했다. 차영은 복부 아래 툭 불거져 있는 부분을 가볍게 쓸었다.
“읏…….”
낮은 탄성을 내뱉은 태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차영은 그의 구겨진 미간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춰 달랬다. 뒤이어 그의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까지 내렸다. 속옷 위에 두드러진 윤곽 위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훑었다. 생각보다 크기가 많이 커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지금 꽤 괴로울 듯했다.
차영이 태주의 성기 위를 속옷 위로 더듬는 틈에, 태주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차영의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까지 어설프게 끌어 내리고 셔츠는 허리 부분이 보이도록 살짝 들췄다. 피차 움직일 때 자세가 불편해서 페팅을 진하게 진행하기가 버거웠다. 하는 수 없이 차영이 제 회음 부위에 태주의 성기를 천 위로 문질렀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하읏……!”
“아…….”
글러브 박스에서 대충 손에 잡히는 크림을 꺼내 든 태주는 내용물이 뭔지도 확인하지 않고 제 손에 쭉 짜냈다. 손바닥 위에서 향긋한 꽃 냄새가 확 풍겼다. 아마 예전에 차영이 가끔 바르라면서 넣어 뒀던 핸드크림이 아닐까 싶었다.
아쉬운 대로 그것을 차영의 회음 부위에 바른 태주는 제 꺼떡거리는 성기를 꺼내 그 위에도 발랐다. 차영은 제 은밀한 부위를 망설임 없이 만지는 태주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러다가 위치를 옮겨 그의 팔뚝을 더듬고, 어깨를 매만졌다. 그리고 어느 틈에 태주가 향긋한 크림을 치덕치덕 바른 제 기다란 손가락을 차영의 안에 밀어 넣었다.
“아…… 으응! 이거 서두르지 마. 천천히…….”
차영이 이마를 좁혔다. 언제나 그가 처음 제 안을 달래기 위해 인체의 일부로 꿰뚫는 이 순간이 가장 수치스럽고, 또 기분이 오묘했다. 손가락은 태주의 것에 비해 굵기가 얇고 가는 탓에 통증은 없이 미묘한 불쾌감만이 그의 배 속을 타고 전류처럼 흐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야릇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차영이 제 음낭과 성기 끄트머리를 태주의 살결 위에 비볐다. 이 선정적인 촉감이 느껴지는지 아래 깔려 있는 태주가 인상을 쓰는 모습이 차영에게도 보였다. 꿰뚫리기 직전의 상태인 건 자신인데도 미묘한 정복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