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한 전망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창밖으로는 물줄기가 약하게 흐르는 강변이 내려다보였다. 오후의 노을 지는 정경은 여태까지 봐 온 것들 중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많이들 이런 곳에서 데이트를 해 왔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차영은 내심 아쉬웠다. 조금 더 태주를 빨리 만났다면 좋았을 뻔했다.
더 많은 좋은 것들을 공유하고, 누리고, 가끔 그것에 대해 소소한 대화를 나누면서 오랜 기간을 보냈다면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렸을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되새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애써 아쉬움을 달래며 아포가토의 녹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맛보고 있는데,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태주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됐다.
“사람 먹는데…….”
“먹어.”
“그렇게 보고 있으면 어떻게 이걸 입에 넣어.”
“먹고, 아이스크림 묻은 혀 보여 줘.”
“보여 주면?”
“내가 빨게 해 줘.”
“봐, 이러니까 못 먹겠다고.”
태주는 동의하는 건지 부정하는 건지 모를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칠 뿐 시선을 거두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것치곤 여태 잘 먹던데?”
“놀리지 말고. 그만 봐. 나 부끄러움 많은 사람인 거 알지.”
“예전에 말했듯이 그런 건 내가 없어. 넌 하던 거 계속해.”
마지못해 차영이 겨우 아이스크림 한 입을 더 입에 넣고 그를 마주 봤다. 계속 장난스럽게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모양새가 왠지 그에게 할 말이 더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예감에 불과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태주가 얇은 재킷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마그넷?”
차영은 자신이 말을 꺼내 놓고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기엔 외관이 지나치게 비싸 보였다. 짐작건대 이 안에 아주 의미심장한 물건이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태주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차영 쪽으로 좀 더 밀었다. 자연스럽게 바통 터치 하듯 차영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열어 보니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시계였다. 무난한 짙은 갈색 시곗줄에, 어딜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금색 러그와 베젤, 그리고 시계의 중심부에 동그란 모양 다이얼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건 전체적인 디자인이 그렇다는 것일 뿐, 꼭 장인이 세공한 듯한 섬세한 모양새가 한눈에 봐도 이게 엄청나게 비싸리라는 사실을 짐작게 했다.
사실 차영도 「브라이틀링」이라는 이름의 이 시계 브랜드는 여러 번 들은 적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중 내비타이머 라인은 파일럿들의 시계로 유명했다.
“마그넷이…… 아니네.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차영이 네가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대단히 민주적이긴 한데…… 아무리 좋은 연장 쥐여 줘도 그게 뭐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는 사람한테 주면 무용지물인 건, 잘 알지?”
자세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요하는 것이다. 그걸 안 태주의 눈빛이 일순 진지하게 변했다.
“지난여름에 파리 갔을 때 커플용으로 맞춘 건데. 이번에 잠깐 갔을 때 찾아왔어. 우린 둘 다 남자를 사귀는 건 처음이고. 또 그런 상태에서 반지나 목걸이 같은 걸 나눠 끼는 건 아직 피차 좀 낯설 것 같아서. 손목시곈 뭐 너나 나나 항상 차는 거잖아.”
“커플용?”
“그 부분은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핵심 문장 파악을 잘하네. 너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지?”
“당연히 잘했지. 파일럿 시계라고 하면 공항 직원끼리 피차 핑계도 좋네. 한 기장이야말로 머리 많이 썼다.”
“극도로 일부분만 쓴 거야. 원래 머리가 아주 뛰어난 거지. 이런 나를 독식하고 있는데 자부심을 가져.”
차영은 부드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농담을 한 당사자인 태주는 웃지 않았다. 아마 그는 이렇게 속박을 의미하는 증표를 전달하는 순간이, 자신이 좀 긴장하거나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여겼던 것 같았다. 실제로 그 생각이 아주 틀리진 않지만, 솔직하게 기쁜 마음이 더 컸다.
“이건 어떻게 보는 거야? 시침.”
“이 부분을 조정하면 세계 시각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어.”
화려한 다이얼을 가리키며 묻던 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태주의 손목을 힐끗 살폈다. 커플용이라고 해 놓고 정작 태주의 손목에 이 시계가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기장은 왜 안 찼어?”
“그거 커플용이라고 했잖아. 네가 허락하면 나도 찰 거야.”
“바보 아냐? 무슨 허락. 이건 당연히 내 거지.”
제 손목에 채워져 있던 검은 줄 시계를 아무런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푼 차영이, 태주를 향해 왼쪽 손목을 덥석 내밀었다. 그제야 픽 웃음을 터트린 그가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차영의 손목에 그것을 채웠다. 케이스 안에 외롭게 머물러 있을 때보다 제 주인을 찾은 뒤 훨씬 안정감이 느껴졌다.
“일단 주니까 받았는데 난 뭘 해 주지?”
“오늘 밤새 같이 있어 줘.”
“되게 자연스럽게 꼬신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먹은 혀 핥게 해 줘.”
태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영은 엄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기각.”
“기준이 뭐야? 섹스는 되는데 혀는 왜 안 돼.”
“몰라, 가끔 한 기장 좀 이상해. 애초에 아이스크림 묻은 혀를 왜 보여 달래?”
“입 안에 숨겨 있으니까 야하잖아. 침이랑 섞인 아이스크림 색깔이 꼭 그거 같지 않아?”
“재벌 외손자가 소박하네. 나 같으면 진짜 네 정액을 혀에 발라서 보여 달라고 하겠어.”
그 말을 듣고 태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이차영…… 너 많이 변했다. 나 좀 더 분발할게.”
“분발 말고 자중해.”
“어쨌든 그러면 네 말대로.”
“물론 당연히 그것도 기각이야.”
이번에도 그가 말로 요구 조건을 분명히 꺼내기도 전에 차영이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고는 상냥한 미소를 띤 얼굴로 태주를 직시했다.
픽 웃음을 터트린 태주가 이윽고 제 손목에도 시계를 채우려고 했다. 그러자 벌떡 제 몸을 일으킨 차영이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직접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기꺼이 주도권을 넘긴 그가 시계를 단단히 채우는 데 열중한 차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신중하게 손을 움직이는 데 집중한 나머지 자신을 봐 주지 않아서, 부디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양 키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영의 주의는 온통 태주의 손목에 쏠려 있었다.
“다 됐다.”
겨우 성공한 그가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태주와 제 살결에 그들만 알고 있는 증거를 부착하고 있다는 게 꽤 뿌듯한 것 같았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차영의 빈틈을 공략하듯 태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선물 하나 더.”
“또 있어? 뭔데?”
“비행기 티켓 예약했어. 10월 초.”
열기구 축제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한 기장 생각보다 집요하네.”
“내가 얼마나 집요한지 네가 알면 깜짝 놀랄걸.”
“댁이 대영 그룹 외손자라는 것보다 더 놀랄 게 있어?”
“너무 많아서 문제지.”
그냥 농담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영은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정확한 날짜 알려 줘. 2주 전엔 말해야 돼.”
“티켓 보낼게.”
태주의 대답을 귀로 정성껏 들으며 차영은 제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봤다.
“생각할수록 웃기네. 나 진짜 한창 에너지 넘치는 파릇파릇한 10대, 20대 초중반 전부 무기력하게 살다가 늦바람 들어서 별걸 다 해 본다. 드라마에 나오는 건 다 하고 있어.”
“장르가 뭔데?”
“당연히 로맨스지. 아, 말하면서도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아.”
“19금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해 줘. 성인 로맨스인지, 아닌지.”
“와, 나 내심 설레고 풋풋했는데 그 대사 끼어든 순간 갑자기 찌든 느낌이야.”
와하하 웃음을 터트린 태주가 차영을 지긋이 직시했다. 뚫어질 듯한 노골적인 시선을 꽤 올곧은 태도로 받아 내고 있던 차영이 불현듯 무슨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 한 기장. 아까 올라오면서 창밖 내다보니까 이 건물 뒤쪽에 강변 따라 산책로 길게 있더라. 날씨도 좋은데 좀 걸을까?”
차영이 원하는데 안 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태주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의 목울대를 스쳐 지나갔다. 손을 잡고 걸을 수도, 걷다가 멈춰 서 문득 입맞춤을 할 수도 없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다. 경치는 아름다웠고, 그걸 보면서 각자의 옆에 함께 거닐고 있는 사람은 서로의 눈에 그보다 더 아름다웠다.
낮게 형성된 제방을 따라 걷던 두 사람은 태주의 차를 세워 둔 주차장 인근에서 걸음을 멈췄다. 제방 아래에는 레저 보트 몇 대가 정박하고 있었고, 거리에 간헐적으로 비치된 가로등 불빛이 해수면을 반짝거리게 만들어 주었다.
차영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태주는 착하게 와서 곁에 앉았다. 가까이에 바짝 닿으려고 해서 차영이 살짝 옆으로 물러났다. 다만 가볍게 엉덩이를 들썩이는 데 그쳐서 한 뼘이 겨우 벌어졌을 따름이었다. 사실 그도 외부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뿐이지 싫은 건 아니어서, 어두운 밤, 낯선 동네에 와서는 조금 경계심이 무너졌다.
“그런데 우리 진짜 10월에 여행가도 돼? 놀러 가는 거잖아.”
“왜. 놀러 가면 안 되는 무슨 이유 있어?”
“아니, 그쪽 외할머니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으니까.”
“…….”
“괜찮은 거야? 무리하는 것처럼 보여.”
태주는 잠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 봤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여태 죽은 사람 붙잡고 질질 짜고 있을 만큼 감성적이지도 않아.”
묘하게 진짜 속마음은 감춘 듯한 형식적인 말투였다. 차영의 진중한 눈길이 그런 태주의 옆모습에 잠시 닿았다. 그러나 평소 이런 일이 생길 때 꼭 마주 쳐다봐 주고, 또 시선이 어긋난 뒤에도 집요하게 뒤쫓곤 하던 태주는 웬일로 그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