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초가을의 대학 캠퍼스는 새로운 한 학기가 시작되는 생기발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태주는 그곳의 한 강의실에 도우미인 선재와 함께 나와 있었다. 한국 항공에서 권장이라 쓰고 실제로는 강제하는 항공 운항과 특별 강연을 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원형 경기장을 구현한 듯한 둥그런 모양의 대형 강의실 안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도 오늘 강연을 올 한국 항공의 기장이 최근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해당 항공사의 후계자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던 것 같았다.
본사 차원에서 얼굴이 공표되는 것은 막았던 터라 생김새는 알 수 없었으나 한 씨 성에 그리 흔하지는 않은 이름이라 평소 한국 항공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객석에는 남학생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파일럿을 꿈꾸는 여학생들도 꽤 보였다. 인원수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전부 항공 운항과의 학생은 아닌 것 같았으나 확실하진 않았다.
단상에 선 태주는 그들을 한번 쭉 돌아보았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일 등에 태어난 이래로 단 한 순간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선재의 견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태주에게 ‘선배가 늘 하시던 대로 하면 다들 좋아할 것’이라는 아주 이상한 조언을 했다.
“각종 항공 이론에 대해서는 매일 배우고 있으니까 이미 빠삭할 거고. 아직 아마추어인 학생들이 현역에 있는 프로에게 듣고자 하는 게 뭘까를 생각…….”
그가 본격적으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무대에서 한 걸음을 내디뎌 학생들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는데, 때마침 객석 제일 뒤쪽에 모자를 푹 눌러쓴 학생 한 사람이 뒤늦게 들어왔다. 잠시 말을 멈춘 태주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자연스럽게 이미 제자리에 앉아 있던 수십 학생들의 시선도 그를 따랐다.
“지금 방금 들어온 학생.”
지각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태주의 부름이 자신을 지칭한다는 것을 깨닫고 ‘저요?’ 하듯이 검지로 본인을 가리켰다. 태주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금 전 학생이 열고 들어왔던 출입문을 향해 손짓했다.
“그림자 한 백 미터 됩니까? 들어왔으면 문을 닫아야 할 거 아냐.”
그러고는 멋쩍어진 학생이 문을 닫는 사이 다시금 앞자리의 학생들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학생들이 현역에 있는 사람에게 제일 궁금한 건 명백하다고 봅니다. 어떻게 해야 조종간을 잡을 수 있는지. 파일럿이 되는 방법이 궁금할 텐데.”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선재가 알아서 준비한 PPT 화면을 힐끗 보면서 픽 웃었다. 사관 학교에 입학해서 비행 훈련을 하거나, 이곳 대학과 같은 공군 ROTC가 있는 항공 운항과에 진학해 장교가 되거나, 혹은 교육원 등지에 들어가 훈련을 받는 등의 학생들도 익히 아는 방법들이 도표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태주는 그 스크린 화면을 가리켰다.
“이건 사실 학생들 머릿속에 이미 다 있는 거예요. 파일럿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알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낙마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거죠. 그걸 다른 사람이 알려 줄 수는 없어요. 본인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제일 잘 아니까.”
학생들은 하나같이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심지어 난 해외 민항사 출신이고, 저런 방식으로 조종사가 되지도 않았거든요. 덕분에 해 줄 수 있는 말은 지극히 원론적이고 개념적인 답변밖에 없어요. 듣는 사람한테도 별로 재미없겠죠. 그래서 난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무대 좌, 우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가볍게 말하던 그가 중앙에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끌어모으는 효과도 있었다.
“파일럿이 되면 좋은 점. 실제 연봉, 또 상여금, 항공사의 대우나 주변의 평판, 그리고 운항 및 객실 승무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부딪치는 여러 갈등들에 이르기까지 실제 종사자들이 솔직하게 말해 주길 꺼려 하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에 접근할게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 전부 파일럿이 되리라고 믿고요.”
경청하던 객석의 학생들은 본인들 모두가 조종간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태주의 믿음에 보답하듯 환호했다.
다만 강의실에 제일 나중에 들어온 학생만큼은 턱을 괴고 앉아서 무대 위의 태주를 물끄러미 직시하기만 했다. 무심결인지 태주가 객석 제일 뒤쪽을 힐끗 쳐다보는 것을 느껴서, 그는 모자를 벗고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씨익 웃는 지각생은 다름 아닌 차영이었다.
바로 그 순간, 태주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그는 처음부터 차영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잠시 말없이 시선을 교환한 그는 단상에 우뚝 서서 다시금 강연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 * *
특별 강연이 끝난 직후, 태주의 뒤를 학생들이 쫓았다. 그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나온 태주가 지하 주차장에서 선재를 붙들고 제 신용 카드를 건넸다. 뒤풀이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차영이 찾아와 줬다는 것을 아는데 그럴 이유는 더더욱 없어졌다. 그는 선재의 쓸모가 다름 아닌 이 부분에서 빛을 발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강연은 내가 했으니까 나머진 네가 해라. 애들 술이라도 한잔 사 주면서 이야기 들어 줘.”
“와, 이 카드…… 이거 한도 없는 거죠. 아, 진짜 그냥 가세요?”
“너 내가 빈말로 시간 낭비하는 거 봤어? 애들 여기까지 따라 내려와서 귀찮게 하기 전에 너 얼른 다시 올라가.”
“선배 저한테 밥 사셔야 돼요!”
승강기 방향으로 뒷걸음질 치던 선재가 차에 탑승하려는 태주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언젠 네가 샀어?”
“비싼 거 사셔야 돼요.”
“언젠 저렴한 거 샀어?”
“아, 할 말 없게. 저 오늘 이거 선배의 애첩이 된 심정으로 막 긁어요.”
“미친 새끼, 그거 한도 있어.”
“거짓말인 거 알거든요.”
“나 조강지처도 있어.”
“뻥이 느셨네요. 선배가 여자 만나는 걸 제가 본 적이 없는데.”
“역시, 그 허접한 상상력. 간다.”
헛웃음을 터트린 태주는 제 차를 몰아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캠퍼스는 무척 넓고, 단대마다 건물들의 사이가 멀었다. 정문을 향해 운전하던 그는 오른편의 나무 아래 그늘에서 서 있는 어떤 남자를 그냥 지나쳤다. 낯이 익었다. 그러다가 멈춰 서서 백미러로 어이없어하는 남자의 표정을 힐끗 살피더니,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후진했다.
끼익. 마침내 태주를 태운 차량이 조금 전 지나친 남자의 앞에 멈췄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태주의 상체를 제가 단어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손등으로 툭툭 때렸다.
“감히, 그냥, 간다, 이거지.”
“너 대체 여긴 어떻게 왔어. 근무할 시간 아냐?”
“한 기장은 잘 모르겠지만 지상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직장인에겐 반차라는 놀라운 마법이 있거든. 비행기 한번 타면 착륙하기 전까진 자기 마음대로 내리지도 못하는 조종사들은 절대 꿈도 못 꾸지.”
“그래? 난 대신 한 달에 20일 남짓만 일해. 물론 해외 체류 기간 포함.”
회심의 대답을 들은 차영의 입이 꾹 다물렸다. 자신은 야근이나 비상근무를 밥 먹듯이 했다. 가끔은 교대 시간이 맞지 않아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단 몇 문장으로 진 것이다. 차영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자, 태주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부드러운 파동이 차영의 허리 아래에서도 느껴졌다.
“거리 먼 나라로 비행 가면 수당 외 돈도 나오지?”
“약간.”
“역시 파일럿이 됐어야 했는데.”
2퍼센트의 진담과 98퍼센트의 농담의 섞여 있는 차영의 말에, 태주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전벨트를 매느라 미처 그 침묵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런데 한 기장 후배는? 따로 가?”
“응. 걔는 후배의 맡은 바 역할을 하는 중이라서.”
“내가 생각한 것보다 특강 성실하게 하더라. 그런 거 시키면 끝까지 절대 안 할 거 같은데 열심히 하는 거 진짜 신기해. 본인 항공 스케줄도 취소하는 법 없이 꼬박꼬박 다 맞추고.”
“천민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래. 돈 되는 건 다 해. 부자가 공으로 되는 줄 알아?”
“특강하면 또 줘? 와, 진짜 조종간 잡을 만하다.”
“하찮은 금액이지만 준다던데? 그걸로 입 짧은 이차영 맛있는 거 사 먹여야지.”
차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또 인상적인 것이 생각났다는 듯 불쑥 물었다.
“PPT도 막 준비하고. 그것도 후배가 한 거겠지?”
“내가 한 거야. 원래 후배의 공은 내 공이니까.”
“양아치.”
“너무 차갑다. 보다 사랑을 담아 불러 줘. 애칭 예쁜 거 많잖아. 자기, 여보. 아니면 형 같은 것도 괜찮다. 색다른데?”
“나 그런 거 간지러워서 싫어. 꿈 깨셔.”
“싫어. 계속 꿀 거야. 자고로 처음부터 용을 그려야 결과물이 이무기라도 나오는 거야. 애초에 이무기를 그리기 시작하면 까딱했다간 뱀장어 같은 거나 나오는 거라고.”
응답을 곱씹던 차영이 발끈했다.
“그래서 내가 뱀장어라는 거야?”
“자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형 말이 맥락 파악이 안 돼?”
“와…… 얼굴색 하나도 안 바뀌고 어떻게 저러지? 어우, 소름 끼쳐.”
“저는 보고 싶어서 반차까지 내고 여기까지 날아와 놓고 내숭은.”
그는 대답과 함께 차영에게로 몸을 기울이곤 가볍게 쪽, 입을 맞췄다. 아무리 차 안이라지만 지나다니는 대학생들이 있는 거리 한복판이어서, 차영이 그를 살짝 밀어냈다.
“사람들 봐.”
“누가 운행하는 차 안을 굳이 들여다봐. 그리고 여기 다신 안 올 거라 괜찮아.”
“그래도. 한 기장 가끔 보면 완전히 심각한 안전 불감증이라니까.”
“물론 위험한 걸 알지만 널 향한 관심과 사랑을 참을 수가 없는 거지.”
“하여튼 말은 늘 청산유수다. 잘나셨어.”
작게 투덜거리는 차영의 한쪽 볼을 그가 귀엽다는 양 쭉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손을 떼어 내서 약간 부어오른 뺨을 치아로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 행위는 또다시 장난스러운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앞 좀 제대로 봐. 핸들도 놓지 말고. 그러다 사고 나.”
“나온 김에 드라이브나 하자.”
대신 이거라도 잡아 달라는 양 태주가 제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졌다는 듯이 차영이 그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가볍게 깍지를 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