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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73화 (73/144)

73화

“한 기장이 없는 날에 절 찾아오신 걸 보면 일단 좀 비겁하시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 곱게 안 나갑니다. 무례하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실 말씀 다 끝나셨으면 일어나 봐도 되겠습니까? 출근 시간이 이미 지났거든요.”

“이차영 관제사, 자넨 태주에 대해 얼마나 아나?”

왜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때때로 누군가를 얼마나 잘 아느냐고 판에 박힌 듯 묻는 건지 모르겠다. 비단 문 회장뿐만 아니라 공통된 기조였다. 자신들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차영은 자신이 눈앞의 남자보다는 한태주에 대해서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릅니다. 외할아버지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것 외에는요.”

“태주는 자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언중에 의도만 있고 핵심은 없으시네요.”

이런 화법은 곱씹을수록 최악이었다. 본인은 뭔가 알고 있으나, 어리석은 상대는 모르고 있고, 또 그걸 알려 줄 순 없지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우월감은 느끼고 싶어서 시혜적으로 한 마디 툭 던져 보는 저 저열한 방식 말이다.

한태주가 자신에 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스스로 잘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차영이 태주를 모를 때부터 그는 자신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도 하고 있었다. 그 시기까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 정도 논리적 유추는 가능했다. 그가 그 이상은 아직 밝힐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언젠간 그가 솔직해지리라 믿었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가 정말 차영을 좋아하고 있다면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게 분명해 보여서 꺼낸 말이네.”

이미 아는 이야기를 현자의 설교랍시고 듣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충고는 새겨듣겠습니다. 회장님 고견 따라서 저희가 더 자주 대화하고, 친해질게요.”

“좀 더 고분고분했으면 좋았을걸. 우리가 곧 또 만나게 되겠어.”

그리고 어쩌면 다음번엔 문 회장의 태도도, 자신을 그의 앞에 대령하는 방식도 이렇게 신사적이지 않을지 모른다. 아무래도 순순히 보내 주고, 제 되바라진 말을 모두 받아 주는 모양새가 오늘은 탐색전일 뿐인 듯했다. 차영은 근미래의 제 일을 자연스럽게 직감하게 됐다.

“다시 뵐 때까지 안녕히 지내세요.”

“그래. 나가 봐.”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한 차영이 나가려고 발걸음을 뗐다. 안 실장이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쥐었다. 바로 그때, 문 회장이 말로 차영을 잠시간 붙들었다.

“오늘 일은. 태주에겐 함구하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이런 기분 나쁜 일을 당했다는 걸 그에게 고스란히 고해바치고 싶지 않았다. 태주와 외할아버지 간의 의가 더 상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런 정도로 속없는 천사 표는 아니었다. 단지 그가 기분이 나쁜 자신 때문에 자책하고, 힘들어하고. 오늘의 이 일을 상상하며 괴로워할 게 싫어서다.

알겠다는 양 묵례해 보인 차영이 다시 걸어 나가자, 안 실장이 그를 배웅했다. 한참 걸어 터미널 쪽으로 나온 그가 마침내 돌아보았다.

“안 실장님, 우리 혹시 예전에 어디서 본 적 없어요?”

“글쎄요. 전 오늘 처음 뵙니다만.”

그로부터 정답을 들으리라는 기대도 안 했다. 다만 오늘은 미끼를 던져 본 것이다. 두 사람 간에 우연히라도 스쳤던 일이 있다면 안 실장이 이것을 물 것이고 아니라면 버릴 터다. 어쨌든 지금은 본전도 못 찾은 차영은 먼저 그 자리를 벗어났다. 평생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공항의 귀빈실 출입구를 돌아보자, 안 실장과 경호원들이 가는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걸음을 빨리했다.

관제탑으로 향하는 길에 보안 구역을 거쳐 검문을 하면서, 차영은 무심코 아까 전 문 회장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주는 자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문 회장이고 안 실장이고, 둘 다 아주 기분 나쁜 인간들이다.

* * *

밤 11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차영은 집 앞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검푸른 색의 비단결 같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배경색은 무척 어둡고, 그 위에 알알이 박혀 있는 별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태주가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시간은 한국 시간으로 오후 10시 35분이었다. 아직 태주에게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하늘길에서 운항이 조금 더뎌져 아직 상공 위에 있을 수도 있었고, 이미 시간에 얼추 맞춰 착륙을 한 뒤 승객들이 하기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일 수도 있었다. 야간 비행은 쉽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밤이 되면 낮에 비해 착륙하는 비행기 수가 적어서 탑에서 관제할 때 그를 태운 항공기의 순서가 밀리지는 않았을 터다.

벤치 위에 두 다리를 올려 본 차영은 무릎을 좁혀 쪼그리고 앉았다. 두 다리를 땅에 내디뎠을 때보다 운동화 코가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그 위를 괜스레 매만져 보는데, 멀리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느껴졌다.

한 손으로 제 눈 위를 어설프게 가린 그가 차량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찌푸렸다.

태주의 차였다.

벌떡 일어난 차영을 운전석의 태주도 눈치챈 것 같았다. 그가 가볍게 경적을 울리더니 제 자리에 빠른 속도로 주차했다.

“이차영.”

차에서 내린 제복 차림의 태주가 차영을 와락 안으려고 했다. 그래서 화들짝 놀란 차영이 두 팔을 뻗어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제야 주변을 스윽 둘러본 태주가 알겠다는 양 웃었다.

“왜 나와 있어.”

“한 기장은 왜 나한테 전화 안 하고 그냥 와.”

“예상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메시지 보냈는데 너한테 답이 없었어. 자는 줄 알았지.”

황급히 뒷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보니 그의 말대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무음으로 해 뒀던 통에 몰랐던 것 같았다.

“한 기장 오는 날인데 내가 이 시간에 왜 자.”

“그래서 여기서 기다렸어? 나 보고 싶어서?”

“당연하지. 10분만 더 늦었어도 나 심장 아파 죽을 뻔했어. 오늘 한 기장 사람 한 명 살린 거야.”

차영의 그답지 않은 능청에 태주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차영에게로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엔 제 고개를 오른편으로 기울여 키스를 하려고 해서 차영이 황급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사방에 보는 눈이 있는지를 살핀 다음,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직 야외 주차장이라서 누가 볼까 걱정이 많이 되는 것 같았다.

태주는 순순히 그의 손에 딸려 갔다. 그들은 승강기에 올라 태주의 집으로 함께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함께 씻으러 욕실로 향하려고 하는 태주를 막아 세운 건 차영이었다. 그는 현관의 문이 닫히자마자 탄탄한 그의 몸을 꽉 안고 자신의 전신을 기댔다.

“이차영, 너 무슨 일 있어?”

그에게 보고할 만한 무슨 일은 이미 사흘 전에 있었다. 물론 말하지 않을 셈이었다.

“아…… 한태주 좋아서 심장 아파. 너무 보고 싶었어. 그래서 그래.”

매일 그와 전화 통화를 할 땐 목소리를 최대한 밝게 꾸며 내면 되니까 기분을 애써 감출 수 있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마주치게 되니 거짓을 구현하는 데 불편함을 겪는 차영은 더 이상 숨기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의 품에 한가득 안긴 채로 마주 보지 않는 게 훨씬 도움이 됐다.

“그냥 말해. 내가 직접 알아내면 그땐 네가 직접 말했을 때의 몇 배는 더 열받아.”

“뭘 말해. 보고 싶었다는 말 말고 뭐가 더 필요해? 계속 기다렸어. 죽을 뻔했다는 말 그냥 한 말 아냐. 진짜 상사병 걸리는 줄 알았어.”

태주가 잠시 생각을 이어 가는 듯 가볍게 차영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무척 무거운 주파수의 음성으로 내뱉었다.

“너 혹시 우리 외할아버지 만났어?”

“만났으면 전화를 했겠지. 바로 달려오시겠다고 한 누구한테.”

“지금 그 말 확실해? 책임질 수 있냐고.”

외손자 아니랄까 봐 그는 누구랑 똑같은 소릴 하며 확인받길 원했다. 차영이 그의 품에 안긴 채로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른이 나 찾는대? 구체적으로 언제 만나러 오시는데? 나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지.”

“…….”

“말만 잘하다가 왜 갑자기 대답 안 해. 봐, 우린 확실히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해.”

문 회장의 충고는 무척 기분 나쁘긴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를 속인다는 사실 때문에 꽤나 우울해진 차영이 태주를 끌어안은 제 손을 깍지 꼈다. 벗어나지 못하도록 제 인체로 결박하고 뺨을 그의 어깨에 비볐다.

얌전히 서 있던 태주가 조심스럽게 차영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기묘한 불안을 애써 억누르려는 듯 으스러져라 차영의 온몸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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