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이차영 관제사.”
제 이름이 불린 건 자동 개폐형으로 된 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앞에 서 있던 안 실장이 그를 부르자, 차영을 위시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물렸다.
돌아선 그가 서서히 차영을 향해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 냈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속내를 노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기 싸움에서부터 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싫었다. 태주 또한 자신이 저자세로 구는 건 결코 원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도리어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크게 화를 내리라.
“이 안에 회장님이 계십니다. 회장님과 독대할 땐 반드시 예의를 갖추셔야 합니다.”
“뭐 어느 나라 국가수반이라도 되시나 봐요.”
“그런 가볍고 망령된 어투를 구사하시는 것도 물론 안 됩니다.”
“저 혹시 신분제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나요?”
“이차영 관제사.”
“저 지금 여기 반강제로 이끌려 왔고, 덕분에 이렇게 저한테 미리 겁을 주시면, 제 반항심도 커질 수밖에 없어요. 그분이 존경할 만한 어른이라면 제가 알아서 존중합니다. 전 태생이 예의 바른 사람이고,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가정 교육도 아주 잘 배우면서 자랐거든요.”
태주가 미워하는 사람을 자신이라고 좋아할 필요 같은 건 없었다.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도리를 지키세요.”
진심으로 하는 충고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차영은 자신을 이른 아침부터 일방적으로 불러낸 약속 상대에게 심사가 꼬여 있었다. 아까 전, 조금 출근이 늦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탑장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그가 이미 자신의 지각에 대해 알고 있어서 차영은 무척 놀랐다. 안 실장이라는 저 남자가 미리 손을 써 뒀다는 추측은 쉽게 가능했다.
모든 예의는 상대가 자신에게 갖출 때 이쪽도 제대로 지켜 줄 마음이 드는 법이다. 문 회장은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셈이었다.
“오늘 일 한 기장한테 다 이를 거예요.”
계속 뻣뻣하게 구는 차영을 지켜보던 안 실장의 눈가에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아주 잠시 스쳤다. 그러나 누가 눈치채기도 전에 바람처럼 흩날려 흩어졌다. 이윽고 그가 수신호를 보내자 수문장처럼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노크를 했다. 안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안 실장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활짝 열린 문을 향해 안 실장이 손짓했다. 한 걸음 내딛던 차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선 시대에 평민 신분인 사람이 왕을 알현하려고 했다면 꼭 이런 절차를 거쳤을 것 같아서였다. 눈에 담기엔 우습지만 한편으론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들을 이렇게 전근대적 방식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문 회장의 권력이 두렵기도 했다.
차영이 안으로 들어가니, 안 실장이 그를 조용히 뒤따랐다. 자연스럽게 안에서 문 회장을 보필하고 있던 직원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천천히 뒤쪽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덜컥 크게 겁이 났다. 이 안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구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태주에게 연락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파리에 있는 그가 연락을 받은들 올 수도 없을 터라 애써 차영이 그를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도 컸다. 문 회장도 일부러 이런 시기를 골랐을 게 뻔했다.
“이쪽으로 오게.”
가장 상석에 앉은 노회한 노신사가 차영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가 내뱉은 것은 아주 낮고 묵직한 음성이었다. 이 음성이 지닌 보이지 않는 힘에 짓눌린 차영이 자신도 모르게 그가 부르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차영이 문 회장의 앞에 멈춰 섰다. 안 실장은 그들의 조금 뒤쪽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차영 관제사라고?”
“네, 그렇습니다.”
차영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단 앉아.”
의외로 문 회장이 차영에게 보이고 있는 태도는 꽤 정중했다. 태곳적부터 그랬다는 양 점잖고 엄숙한 모습으로 상대를 최대한 존중했다. 내뱉은 것은 분명한 명령이지만 말투는 부드러웠고, 놀랍게도 표정은 너그러웠다.
차영은 언론에서 종종 보았던 좀 더 차갑고 강건한 이미지를 상상했던 터라 내심 당황스러웠다. 하나 이런 속을 알 수 없는 유형이 상대하기엔 더욱 어려운 법이었다. 나이가 자연스럽게 들어 가면서 그가 쌓아 온 연륜은 미숙한 차영에 비할 바가 못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런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치고 잔인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텐데, 이쪽에선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일만 남아 있었다.
“저를 여기에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아, 그렇지. 이쪽으로 어려운 발걸음 하게 만든 것 같은데. 집 가까운 곳에서 봤어도 됐겠지만 요즘 내가 부인 상 치른 지도 얼마 안 됐고, 주변에 말이 새 나갈 것도 그렇고, 공항이 제일 무난할 것 같아 여기로 정하고 통보했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무슨 작전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에두른 협박? 보이지 않는 위협? 이러다가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도 점쳐졌다. 혼란스러운 차영이 그의 앞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만 걸치고 앉은 채로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문 회장의 시선이 잠시간 그 위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바쁜 사람 보자고 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태주랑은 무슨 사이지? 친구?”
물론 이런 상황에서 친구라고 대답하는 건 아주 무난한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려 한다면 이런 험악한 자리가 또다시 조성될 것은 기정사실이다. 가능하면 횟수도 줄이고, 여파도 최소화하고 싶은 것이 차영의 심정이었다.
그가 어떤 방식을 써서 자신을 다루려고 드는지 따지기보다는 제 쪽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 차영은 내내 떨어뜨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똑바로 문 회장을 쳐다봤다.
“회장님 외손자분은 에둘러 말하는 걸 싫어하던데. 회장님은 다르십니까? 단순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절 굳이 따로 보자고 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서요.”
“아주 맹랑하네. 물론 무섭다고 어깨가 구겨져 있는 것보단 훨씬 낫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정확히 뭡니까? 계속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적당히 놀다 헤어지게.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지원하지.”
어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분명하게 강압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차영은 갑자기 자신이 재벌 남자와 가난한 여자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옛날 통속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유치하고 뻔했다는 뜻이다. 문 회장은 마치 자신이 한태주의 옆에 달라붙은 거머리라도 되는 양 전제하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보다 많은 것을 양보하고, 또 제공하고,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은 태주였다. 하나 그건 본연의 성격과 이 연애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일 뿐이지 자신이 태주에게 경제적으로 원하는 바가 있어서는 아니다. 발칙한 성격의 태주조차 한 번도 자신으로 하여금 이런 문제로 불쾌한 기분이 들게 만든 적은 없었다. 차영은 애써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잇새를 살짝 물었다.
“정확히 무슨 지원요. 돈 쥐여 주시려고요?”
“필요하다면. 그 외에도 자네가 갖지 못한 것 중에 내가 줄 수 있는 게 아주 많이 있겠지.”
“불로 소득 좋은 거 물론 잘 알지만 제가 워낙 잘 배우고 바르게 자라서요. 그런 건 됐고요. 적당히 놀다 헤어지겠습니다.”
크게 망설이지도 않고 간단히 답하자, 문 회장이 그런 차영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어차피 남자끼리 결혼할 것도 아니고요. 서로 진지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심각한 사이인 건 아닙니다. 다만 몇 년이나 적당히 놀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0년이 될 수도 있고, 20년쯤 될 수도 있을 거고요. 어쩌면 내일 당장 헤어지게 될 수도 있겠죠. 아무튼 언제 끝낼지는 저희가 주도적으로, 알아서 정하겠습니다.”
다만 자신은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고, 지금 기분으로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끝이 가늠이 잘 안 가기도 했다. 정말로 수십 년이 될지, 내일 당장 결별하게 될지 차영 자신조차 몰랐다. 태주도 그럴 것이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어?”
“당연히 지금 제 말에 스스로 책임집니다.”
“순하게 생겨서 생각보다 건방지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문 회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그걸 본 차영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였던 모습은 연막일 뿐 이제부터가 진짜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대함이나 관용이라곤 없고, 무자비하고, 몰인정하고, 때론 악독할지도 모르는 그런 어두운 모습들 말이다. 차영은 두려운 기분이 불쑥 들어 더는 이곳에 앉아 있고 싶지가 않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