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71화 (71/144)

71화

“누구세요?”

상대에게 정체를 묻는 차영의 음성 끝이 조금 떨렸다.

- 이차영 관제사 댁 맞습니까.

일순 차영은 이 분명한 음성에 기시감을 느꼈다. 얼마 전 태주와 통화할 때 미묘하게 익숙하다 느꼈던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때도 이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본인이 누구신지 밝히는 게 우선 같은데요.”

- 저는 대영 한국 항공 전략 기획실 안진석 실장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언젠간 회사 사람이 널 찾아올지도 몰라. 아마 회장님 비서실장. 아마도.〉

올 게 왔나 싶었다. 차영은 내내 불안해했던 자신을 되새겼다. 인간의 직감이란 쉽게 무시할 게 아니라는 것을 절박하게 느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머뭇거림 끝에 현관문의 열림 버튼을 매우 조심스럽게 눌렀다. 문이 열릴 때의 익숙한 기계음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꺼림칙하게 들리는지, 지금 이 순간의 차영의 기분은 쉽게 언어로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굳이 표현하자면 안에 얼마나 위험한 물건이 들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무턱대고 상자를 개봉한 듯한 불안한 느낌이었다.

현관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인터폰 모니터로 봤던 남자의 모습이 차츰 드러났다.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덕분에 쌍꺼풀이 없는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감춰졌지만, 차영에게만큼은 그 너머에 있는 서늘한 기운이 여실히 훅 끼쳐 왔다. 자신을 향한 그 차가운 눈빛에서도 음성을 들었을 때처럼 정체 모를 익숙함이 느껴져서 당황스러웠다.

“안녕하십니까, 이차영 관제사.”

“네, 제가 이차영이긴 한데…….”

제게 꾸벅 인사하는 고갯짓에는 절도가 있었다. 이윽고 안 실장은 현관으로 들어가도 되겠냐는 듯 내부를 향해 손짓했다. 순간 차영은 그의 마른 손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왜 자꾸 이러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뇌리에 없는 사람이라 자꾸 익숙한 기분이 드는 게 불편했다.

“아…… 안진석 실장님이시라고요.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와도 된다는 양 홀린 듯이 한 걸음 물러서자, 비슷한 보폭으로 한 걸음 다가온 안 실장이 현관에 우뚝 섰다.

차영은 그를 현관이 아니라 아주 집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해야 예의에 맞는 걸까, 찰나간 고민했다. 그러나 쉽게 내키지가 않았다.

오래전 태주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를 여기 초대했던 건 제 인생에서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좀처럼 없었던 일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일일 것이다. 차영은 모두에게 친절한 만큼 경계심도 많았다. 그때 태주에게 손쉽게 마음을 열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가 첫눈에 좋아져서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종종 생각했었다. 물론 그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출근하십니까?”

차영의 차림새를 살짝 훑어본 그가 넌지시 물었다. 그때 차영은 이상한 직감을 받았다. 왠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제 사적인 공간을 훑고 간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물론 피해망상에 가까운 비합리적인 상상이었으나 왠지 순순히 믿겼다. 덕분에 남자를 향한 경계심이 한층 강해졌다.

“이제 하려고요.”

“시간 오래 빼앗지 않고 여기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대가 고민을 덜어 주어서 다행이었다. 신발장 손잡이를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단단히 붙잡은 채로 차영은 남자의 입술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왜였을까. 아무리 두려운 상황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는 하나 너무 극심하게 손이 떨려 댔다. 그걸 다잡는 게 매우 어려웠다. 간헐적으로 구역질까지 치밀어 올랐다.

왜지. 잘 갖춘 정장 차림에 정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그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저기…… 빨리 용건을…….”

“저희 회장님께서 따로 좀 뵙기를 청하십니다.”

“이쪽에서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나요.”

“제가 아는 회장님은 좀 더 강압적인 방법을 쓰시려고 할 겁니다.”

차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목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따가웠다. 눈물이 날 만큼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건 회장이 강압적인 방법을 쓸 것이라는 그의 대답을 듣고 불안해진 게 아니다. 눈앞의 남자가 주는 위협감 때문이다. 그런데 정확히 그게 남자의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 어디로 가면 되죠?”

“공항 귀빈실입니다. 준비하고 나오시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뇨, 어차피 출근해야 하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시간…… 알려 주세요.”

“그러면 30분 뒤는 어떠십니까.”

“알겠어요.”

일방적으로 대답을 마친 차영은 안 실장이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치자마자 제 팔을 길게 뻗어 현관을 굳세게 닫았다. 가빠진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겨우 호흡을 고르면서 현관이 제대로 잠긴 게 맞는지를 눈대중으로 확인했다.

서서히 집 안으로 들어온 그가 인터폰으로 문밖을 확인했다. 안 실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거실로 뛰어가 창밖을 내다보니 때마침 그가 차량에 탑승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태운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라야 차영은 커튼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찌익. 그의 악력이 과했던 바람에 커튼의 일부가 찢어졌다.

“나 왜 이러지, 진짜…….”

이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이 아직 독대하지도 않은 문 회장 때문이 아니라, 안 실장을 향한 감정이라는 것만 명확했다. 그 외엔 이토록 혼란스러워진 이유를 무엇도 인지할 수가 없어서 차영은 몹시 당혹스러웠다.

* * *

파리의 한 대로변 위에 태주를 태운 차가 멈췄다. 창문 밖에는 화려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보석을 판매하는 곳과 시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 따위의 단조로운 간판들이 그의 눈을 유독 사로잡았다.

그걸 쳐다보고 있던 태주는 이내 핸들을 가볍게 두드려 봤다.

자연스럽게 생택쥐페리 「야간 비행」의 한 내용이 떠올랐다.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로비노가 어떤 소중한 물건을 통해 마음이 절로 온유해지는 것을 느끼는 장면이었다.

소설 속의 그는 사하라에서 가져온 거무스름한 조약돌들에게서 본인의 어두운 애정 관계나 삶의 지난함 따위를 크게 위로받았다. 그리고 로비노는 삶에서 오직 돌멩이들만이 그에게 따뜻함을 전해 준다고 느꼈다.

태주에게 차영은 그런 존재였다. 평소엔 숨겨 두고, 아주 가끔은 타인의 앞에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싶고, 때때로 마주하면 자신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사실 원래는 차영을 위한 마그넷을 사러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제게 이런 안정감을 주고 있는 소중한 그에게 너무 소박한 선물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당사자는 이것만으로도 기뻐해 주리라. 그래도 좀 더…… 그를 어떤 분명한 형태로 구속하고, 속박할 핑계를 찾고 싶었다.

보석 매장과 시계 매장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태주는 어느 쪽이 덜 부담스러울까 궁리했다. 파리는 워낙 도로 교통이 험악해서 방향을 잘못 선택하면 계속 뱅뱅 도는 수가 있었다.

결단을 내린 그가 이윽고 오른편으로 진입했다. 고급스러운 시계 매장이 있는 건물이었다.

발렛을 맡긴 그가 건물 안으로 입성하자, 점원이 상냥한 얼굴을 하고 태주를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짓을 하며 보다 안쪽 방향을 가리켰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손님. 혹시 찾는 모델이 있다면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불어는 썩 능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주 기본적인 것들은 어릴 때 배워 할 줄 알았다. 화려한 모양의 시계들이 가득한 진열대 위를 눈대중으로 훑던 태주가 이렇게 대답했다.

『시계를 맞추고 싶은데. 커플용으로.』

『커플용 시계요.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는 친절한 점원의 안내에 따랐다.

* * *

터미널에 위치한 공항의 귀빈실은 다른 나라의 수반이 오거나, 그게 상응하는 유력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만 개방하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한국 항공의 문 회장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듯했다.

공항에 출입하는 직원이긴 하지만 어쨌든 민간인인 차영이 이곳 주변을 서성거리는 모습이 공항 경찰들에게 의아하게 보였던 것 같았다. 그들이 차영에게 접근하려 하던 찰나였다. 때마침 안 실장이 모습을 드러내 그를 데리고 안쪽으로 이동해 한시름을 놓았다. 안 실장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차영을 둘러싸게 하더니, 보다 안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들어가십시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덩치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걷고 있는데도 안전하게 느껴지기는커녕 불안감만 가중됐다. 그들이 제 편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선 남자는 안 실장이었다.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인데도 무표정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에서 느껴지는 잔인함이 차영의 뇌리에까지 닿는 것 같았다. 차영은 괜히 제 손아귀를 꽉 쥐어 봤다. 처음 태주를 찾아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신기할 정도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짜내려 해 봐도 저 남자를 어디에서 봤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라면 언젠가 과거에 한 번쯤 마주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보면 쉽사리 잊힐 인상이 아닌데도 여전히 잔상이 흐렸다.

대체 자신은 저 남자를 어디에서 봤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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