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70화 (70/144)

70화

소문은 정말 바람보다 빨랐다. 외할머니의 발인이 끝난 며칠 뒤, 태주가 비행을 위해 운항 사무실에 나타났을 때 그는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시선 세례에 혹사당했다. 심한 말 한마디, 건드리는 타격 하나 없이도 이튿날 몸살을 앓을 것만 같았다.

그중 용기를 낸 직원들이 지나가다 마주친 그에게 고인의 명복을 빈다면서 한 마디씩을 건네려고 하면, 태주는 모두 무시했다. 그들 사이를 지나치는 그의 표정이 무척 안 좋았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운 뒤라 컨디션이 나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전 중에 안 실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사내 메신저의 투서 때문이 컸다.

장례식장에 내내 얼굴을 비추기로 결심하면서 문 회장의 외손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라는 점은 당연히 예상했다. 그러나 해당 투서 때문에 사내의 직원들은 물론이고 이 그럴싸한 낚시 떡밥을 문 외부의 언론들을 통해 제 일이 온 국민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게 문제였다. 어느 날 갑자기 바라지도 않았던 대영 그룹의 정식 후계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건 다른 사람도 아닌 문 회장이 가장 반길 만한 일이었다.

“선배 나오셨어요. 좀 괜찮으세요?”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선재가 이윽고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태주를 보고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는 가볍게 묵례로 답했다. 그런 뒤 브리핑을 받기 위해 운항 팀 직원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기장님. 저 이사장님 일은 직원들도 매우 유감…….”

“인사는 됐고. 브리핑이나 하시죠.”

“어…… 그런데 오늘 한 기장님 비행이 없는 걸로 제가 알고 있거든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으로 태주의 눈치를 살피던 직원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네, 확실히 비행 일정 취소되셨는데요.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무슨 소립니까. 오늘 파리행 왕복이고, 변동 소식 못 들었습니다. 오류 아니에요?”

“아뇨, 시스템 오류는 아닙니다. 오전에 다 확인했거든요.”

“혹시 심 테스트 때문에 그러는 거면 일정 다시 잡았으니까.”

“그게 아니고…….”

“아니면 징계 때문이에요? 돌아와서 네 시간 교육 명령 이수 다 할 겁니다. 특별히 결격 사유 내규가 새로 생긴 게 아닌 이상 갑자기 비행 취소는 말이 안 됩니다. 다시 확인해 보세요.”

태주의 음성은 낮고, 또 짜증이 한껏 깃들어 있었다. 움찔한 직원이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없는지 다시금 운항 일정을 확인해 봤으나, 결과는 똑같았던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했다.

“변경되신 게 맞습니다. 팀장님 전결입니다.”

“운항 팀장 어디 있어요. 당장 오라고 하세요.”

“본사 전략 기획 실장님과 동유럽 지역에 새로 취항한 운항 편 때문에 회의 중이십니다.”

“안 실장이 여기 와 있어요?”

“네, 저 여기 와 있습니다. 궁금하신 게 뭡니까. 제가 직접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그때, 안 실장이 운항 팀장과 뭔가를 진지하게 논의하면서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들은 회장의 오른팔과 외손자가 같은 자리에 나타나 있으니 당연히 살얼음판이라도 걷는 듯 긴장하게 됐다. 그들이 눈치껏 자리를 피하는 동안 태주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당장 중요한 업무를 봐야 할 경우를 대비해 운항 팀장만 제외하고 모든 구경꾼들이 전부 빠져나갔다. 그때라야 태주의 입이 열렸다.

“뭡니까, 이 치졸한 짓거리는.”

“내주부터 본사로 출근하시라는 회장님 명령입니다.”

화를 참지 못한 태주는 테이블 위 모니터 옆에 장식되어 있는 크리스털로 된 컵에 시선을 돌렸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안 실장의 안면을 향해 던져 버렸다. 타악! 직격타를 맞은 컵은 땅으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났다. 아울러 안 실장의 눈 주변에 부딪혀서 빨갛게 된 자국이 남았다. 파편이 떨어지면서 눈 밑을 스친 모양인지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안 실장은 그것을 덤덤히 깨끗한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두 사람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동안, 사위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사무실에 남아 있던 운항 팀장만이 책상 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태주는 현재 거기까지 신경 쓸 심정적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런 갈등 상황이 외부로 퍼져 나가는 건 무엇보다 본사의 이미지에 좋지 않으니 운항 팀장의 입은 안 실장이 알아서 갈무리할 터다.

“누구 마음대로.”

“모든 건 회장님 지시에 따라…….”

“됐어요. 더는 안 실장이랑 싸움하기도 지겹습니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으니 난 곧 사직서 제출하죠. 앞길 계속 막으라고 하세요. 어디 작은 나라에 처박혀서 적당한 크기 기체 몰아도 됩니다. 뭐 한 군데 없으려고.”

그가 어깨 위의 견장을 떼어 내서 던지려고 하자, 그의 앞을 안 실장이 막아섰다.

“내가 대영 그룹 개새끼한테 길 가로막힐 만큼 한가해 보이나?”

“도련님, 듣고 가십시오.”

“들을 이야기 없다잖아. 안 비켜?”

“이미 뉴욕에서 보셨을 겁니다. 그건 서막에 불과합니다. 이미 도련님의 행동반경은 회장님 손바닥에 있습니다.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 불가능한 범주라는 게 세상엔 있는 법입니다.”

“당신 지금 감히 나 협박해?”

“회장님을 오래 모셔 온 수하로서 드리는 충고입니다. 새겨들으시길 바랍니다. 너무 일방적인 처사였다는 건 회장님도 인정하실 겁니다. 저도 그 조심스러운 의중을 알고 일부러 직접 온 겁니다. 이 일은 제가 책임지고 운항 스케줄 돌려놓겠습니다. 운항 팀장.”

안 실장이 운항 팀장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아닌 체하면서 이쪽을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던 운항 팀장이 뭔가를 모니터상에 입력하는 모양인지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태주에게 꾸벅 인사한 안 실장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승객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브리핑 듣고 터미널로 가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허리 숙여 인사를 하더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바깥에서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과 운항 승무원들이 들어와도 될지를 가늠하는 사이, 태주가 견장 위를 한번 꽉 움켜쥔 뒤 선재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하나둘씩 다시 들어와 제자리로 복귀했다.

* * *

생각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차영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편이었던 터라, 의아한 일이었다.

7층의 태주는 지금쯤 파리에 접근하고 있을 것 같았다. 출근 시간까지 사이가 크게 떴는데, 가까운 곳에 태주가 없다고 생각하자 그걸 낭비할 방법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진 날은 몇 번이고 있었을 텐데, 기억마저 전부 삭제된 듯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차영은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날은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려 꽤 무더웠다. 그나마 처서가 지난 아침이라 버틸 만한 정도였다. 그는 더운 건지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편의점 앞 강아지에게 휴대용 선풍기로 바람을 쐬어 주다가, 출근 시간에 맞춰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가자마자 산책을 잠깐 했고, 강아지와 조금 놀아 주었다. 자신이 집을 비운 시간은 도합해도 한 시간 남짓밖에 안 됐다. 눈앞의 풍경에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상하게 낯선 느낌이 들었다. 왜였는지 모르겠다.

편의점에서 산 우유와 버터 따위들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주방을 빠져나가려던 차영은 불현듯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선반에 넣어 둔 시리얼 상자와 디스펜서도, 각종 캔 따위도 여전히 제자리였다.

거실로 나와 봤지만 볕이 잘 스며들고 있는 창가도, 비 내리는 늦은 밤 앉아 있으면 빗소리가 선율처럼 잘 들려오는 소파의 위치도, 매일 오전 기상을 확인하는 모니터도, 책장의 비행기 모형들마저 다 원위치였다.

“왜 이러지.”

자꾸 이질감이 드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그는 안정을 찾기 위해 벽면의 마그넷 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하다 보니 처음 태주가 언급했었던 열 개는 이미 오래전 채워진 뒤였다. 그런데 문득, 묘하게 삐뚤어진 한 개를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분명히 관제하듯 나란히 예쁜 모양으로 정렬해 두었던 것이다. 물론 자석의 접착도에 따라 조금씩 움직일 수도 있는 문제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헉…….”

태주를 제외하면 이 시간에 제집에 찾아올 사람 같은 건 없었다. 놀란 차영이 인터폰을 확인했다.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그 화면 안에 갇혀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문 회장의 비서실장이라던 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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