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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69화 (69/144)

69화

차 안에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조수석의 문이 확 열렸다. 주차장 앞쪽에 장례식장 출입구가 있어서 저곳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인영은 뒤쪽에서 나타났다. 낯선 침입자인 줄 알고 깜짝 놀란 차영이 돌아보니, 다행히 온몸이 쫄딱 젖은 태주였다.

“왜 이렇게 젖었어. 식장 안에 우산도 없어?”

“어디로 가는지 아무한테도 모르게 하고 싶어서 그냥 몰래 나왔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여름에 열선을 켤 수도 없어서, 일단 차에 구비해 두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태주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반신을 스스로 좀 훔치는가 싶더니, 수건을 던져 버리고 차영에게 다짜고짜 키스를 퍼부었다. 차영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가볍게 빨아들인 그의 입술 위에서는 미약하게 빗물 맛이 났다.

불쑥 혀를 밀어 넣은 그가 좀 더 차영의 입 속을 꼼꼼하게 탐색하려는 듯 상체를 기울였다. 불편한 자세로도 차영은 열심히 그에게 호응했다. 목을 끌어안으면서 자연스럽게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붙잡았다. 덕분에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무척 에로틱했다.

보드라운 입술 주변에서 서로의 혀를 얽던 두 사람이 호흡을 고르기 위해 잠시 체온을 분리했다. 하아. 길게 숨을 내쉰 차영이 몸을 완전히 모로 틀어 태주를 직시했다.

“왜 상주 완장은 안 찼어?”

“그냥. 형식이 뭐가 중요해, 내용이 중요하지.”

“외할머니 일은 유감이야.”

“…….”

“상복까지 잘 어울리는 게 아이러니네. 그래도 다신 입을 일 없어야 할 텐데.”

태주는 손을 뻗어 차영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나 되게 어릴 때 이렇게 입은 적 있어. 검은색 위아래…… 장례식장에서 애들용으로도 빌려주는 거 알아? 진짜 자본주의 잔혹하지.”

최대한 가벼운 말투로 말하고 있었으나 분위기는 필연적으로 가라앉았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쯤, 차영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미취학 아동이었다. 그래서 그땐 별생각이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이라 제대로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걸 입은 사람이 몹시 슬픈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다. 아주 어릴 때 겪어 제대로 잔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어쩌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난 아버지 장례를 못 치렀거든.”

뭔가 생각하는 기색이던 태주의 음성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차영은 잠자코 들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또 내 동의도 없이 어느 납골당에 안치했다는 걸 알게 돼서……. 난 상복 정장은 처음 입어 봐.”

“어째 한 기장은 사연이 너무 많네. 내가 사람 잘못 고른 거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 가뜩이나 불안한데 자꾸 그러지 마. 농담한 거란 말이야.”

물끄러미 차영을 바라보는 태주의 시선은 습도 높은 날의 공기처럼 눅눅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 얼마나 더 있어야 돼? 비공개 장례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손님 많은 거 같더라.”

“응, 삼일장 한다고 했으니까 날짜상으로는 하루 더 있어야지.”

“내가 왜 한 기장한테 눈이 갔는지 알아?”

“얼굴?”

“그건 뭐…… 그것도 맞긴 한데 그걸 본인 입으로. 댁 잘난 얼굴 말고.”

“아니면 갑자기 들이대서? 아, 이 이상한 새끼 뭐지…… 하다가 자연스럽게.”

“아냐. 외로워 보여서야.”

태주는 의외의 대답인 듯 말을 아꼈다.

“너무 외로워 보여서. 내가 지켜 주고 싶었어. 웃기지. 네가 훨씬 단단한데.”

“…….”

“그런데 한태주 씨 그때보다도 더 외로워졌네. 내가 구해 줘야겠다. 한 기장 친구도 없고 동료도 없어서 나밖에 없잖아. 참고로 이건 아까 그쪽이 한 고백의 감독판이야.”

“내가 한 고백?”

“그거.”

“그러니까 내가 한 무슨 말.”

그의 뻔뻔한 얼굴은 차영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미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안됐지만 오늘 내 입으론 못 들을걸?”

“넌 사랑 고백을 꼭 미루는 경향이 있더라? 볼 장 다 본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 있다고.”

“그렇다기보단 신중한 거지.”

“그럼 시퀄도 만들어 줘.”

“물론 그럴 거야.”

“프리퀄도. 리부트, 스핀오프, 트릴로지. 전부.”

차영은 부드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태주는 웃지 않았다.

뭔가 이런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진짜 하고 싶은 중요한 말이 있는 표정을 하고 아주 진지한 태도로 차영에게 집중했다.

“이차영, 약속해 줄 수 있어? 나 안 버리겠다고.”

“또 그 소리 한다. 내가 한 기장한테 그렇게 믿음을 못 주고 있어?”

입술을 달싹이는 태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뭔가 결심한 기색이던 차영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양 제 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어 이 서사를 완성하자는 듯이 가운데 세 개의 손가락을 접고 내밀어 보였다. 그런데 정작 약속해 달라고 요구하던 태주가 급작스럽게 한 수를 물러나 그걸 제 손에 걸고 찍기를 망설이는 것이었다.

약속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자신이 거기까지 욕심을 부려도 될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무척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한태주처럼 제 위에 누구도 없는 듯 사는 안하무인의 결정체가 왜 종종 자신에게만큼은 자신감을 잃고 맥을 못 추는지 모르겠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기저의 사연이 조금 더 남아 있는 것도 같은데 아직 거기까진 그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여전히, 차영은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말하겠지 하고 말이다.

“왜? 한 기장 막상 나한테 코 꿰일 것 같으니까 싫어?”

“아냐. 난 너무 좋은데…… 너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될 것 같아서.”

“나도 너무 좋은데. 왜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돼? 충동적으로 결정할래.”

“난 이걸 아주 오래 생각했고, 넌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더 먼저 좋아했다는 소리야.”

“우리 속도 비슷하지 않았나?”

“아냐, 확실히 내가 먼저야. 그것도 훨씬.”

그는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내듯 모를 말만 내뱉고는, 차영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대신 그 위에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차영은 그 순간의 그가 너무 숭고한 물건을 만지듯 제 손을 붙잡고 있어서 할 말을 잃었다.

태주가 차영의 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끌어안았다. 어느새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에 그의 젖은 몸은 조금씩 말라 가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차가웠다. 차영은 제 옷도 그에게 닿은 자리마다 조금씩 젖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함께 이 순간을 공유하는 감각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태주를 마주 안았다.

그들은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로 빗소리를 배경 음악처럼 귀에 담았다. 태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차영은 그와의 시퀄이나 프리퀄, 스핀오프 따위들의 장면들을 차분히 그렸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차영은 태주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한 기장, 나 이제 가 봐야 돼. 내일 출근.”

“아, 응, 새벽에 시간 너무 오래 빼앗았다. 와 줘서 고마워. 나도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아냐. 내가 너 가는 거 보고…….”

“오늘은 내가 그러게 해 주라. 한 기장 뒷모습 봐 주고 싶어.”

“나 뒷모습 보이는 거 싫은데.”

“그래도 내가 봐 주고 싶어.”

잠시간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태주가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차영은 뒷좌석의 우산을 꺼내 태주에게 쥐여 주었다.

“나 우산 두 개니까 이거 쓰고 들어가. 계속 비 맞으면 감기 걸려. 그리고 나 이번 여름휴가 다 반납할 거거든. 10월에 휴가 몰아서 쓸 테니까 그때 우리 열기구 축제 보러 가자.”

“장거리 비행기 타실 수 있겠어?”

“해 보지 뭐. 한 기장이 내 옆자리에서 가.”

“그래.”

“그리고 다음엔 전화 말고 육성으로 고백해. 내 눈 보고. 그럼 나도 대답해 줄게. 아까 너 좀 치사했어.”

물끄러미 차영을 보던 태주가 우산의 손잡이 부분을 살짝 엄지로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끝내 픽 웃었다.

“그래.”

알겠다는 양 가볍게 뺨에 입 맞춘 그가 차영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는 듯 차량의 뒤쪽으로 걸었다. 걷다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 돌아보았다. 차영이 룸미러로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터다.

태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 차영도 다시 핸들을 붙잡고 운전을 하려 하는데 그의 앞에 어떤 고급 세단이 헤드라이트를 아주 길게 깜박였다.

순간 눈이 부신 차영이 얼굴을 팔로 가렸다. 무척 불쾌했다.

“뭐야, 매너 없이.”

그리고 인공적인 불빛의 밝은 기운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천천히 제 팔을 내렸을 때, 이미 정면의 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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