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생에 죽음이 드리워진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안색이 혈색이라곤 하나 없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이다. 지금 태주의 앞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녀가 바로 그랬다.
“외할머니 소화 기관이 많이 안 좋으신 거, 치매 초기인 거, 노환. 이거 세 개 말고 내가 모르는 거 말하세요. 상태가 이런 지경인데 숨기는 거 의미 없어요.”
주치의는 태주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렵사리 대꾸했다.
“위암 말기입니다.”
태주는 이마 사이를 좁혔다. 탄식이 나올 뻔한 입을 도려내고 싶었다. 안 좋은 징후들을 뻔히 봐 왔으면서 제 성격이 살갑지 못하다는 이유, 외할아버지가 싫다는 핑계 따위를 대면서 그녀에게 소홀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그러니 물론 이제 와서 슬픈 척하거나 괴로움을 토로하는 게 비겁하고 치사한 짓이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당장 이런 음험한 기운이 얼굴에 깔릴 만큼 나쁜 상태라고는 예상 못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급속도로 전이가 돼서…… 현재 매우 안 좋으십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태주가 한 걸음 뒤쪽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안 실장을 돌아보았다.
“안 실장 대답해 보세요. 외할아버지가 이러신 거 아니에요? 뭐 안 좋은 거 먹이시거나, 주치의한테 제대로 처방을 못 하게 했다거나!”
“도련님.”
“잘 생각해 보세요. 그 어른은 그러고도 남을 분 아닙니까. 외할머니 뭐 밉보인 일 있는 거 아닙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그가 주치의가 있는 앞에서 말을 가려 하라는 듯 넌지시 눈짓했으나, 태주는 거침이 없었다. 뭔가 더 안 실장에게 따져 물으려고 하는데, 갑작스럽게 자신의 손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태주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매몰차게 쳐 냈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위치상 현재 자신의 손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침대에 누워 있는 제 외할머니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고개를 돌려 보니 역시나 정신이 든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태주 왔구나. 안 실장, 내가 따로 할 말이 있어 그러는데 잠깐 다들 좀 내보내 줘요. 수행 비서고 주치의고 할 거 없이 전부.”
“알겠습니다.”
이는 안 실장마저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가 침실 안에 있는 모두를 전부 내보내고 자신마저 나간 뒤 밖에서 문을 굳게 닫았다. 그때까지 공허하게 서 있던 태주가 의자를 끌어다 그녀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태가 심각하리라고 짐작은 했는데 그렇다고 암이신 줄은…… 왜 그때 저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
“여기 오기 꺼려 하는 네 마음 내가 왜 모르겠니. 그래서 일부러 말을 안 한 거니까 넌 마음 쓸 것 없다.”
“상태는 괜찮으신 겁니까? 통증은요. 많이 심하시다면서요.”
“병이 급하게 전이가 됐대. 이걸 지난해 말쯤 알게 됐어. 주치의는 원망하지 마라. 너도 짐작하고 있을 테지만 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얼마나 안 좋은지 들어 봤자 고치지도 못할 거 서로 심란하기만 하지.”
“그래도 당장 몇 개월도 안 남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씀을 해 주시죠. 그럼 지금보단 자주 들여다봤을 거예요.”
“태주야,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죽어. 딸이랑 사위 먼저 앞서 보내고 너무 명줄이 긴 것 같아서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오히려 내 생각보다 더 오래 버티지 않았나 싶다.”
그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죽어야 될 사람 따로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주름지고 힘없는 손을 어렵사리 멀리 뻗어 태주의 손등 위를 덮었다.
“태주야, 그런 벌받을 말은 귀한 입으로 하는 게 아냐. 아무리 미워도 네 외할아버지야. 네 엄마의 아버지고. 그건 뼈에 새겨져 있어서 영영 지워지지가 않는 거란다.”
“그런 말씀 듣기 싫어요. 제가 얼마나 외할아버지 불편해하는지 아시잖아요.”
“네가 오해하고 있어. 회장님은 널 미워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어. 아무리 무정해도 자기 금지옥엽 딸이 낳은 소중한 아들이 왜 안 예쁘겠니. 다만 네 아버지가 너와 산모 중의 한 사람을 살려야 했을 때, 나은이가 아니라 널 살렸기 때문에 그걸 힘들어는 하셨다. 그게 다 나은이 뜻이었는데…… 네 엄마는 이미 죽어 탓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가 평생에 걸쳐 제 외할아버지를 미워했던 건 단순히 문 회장이 자신에게 보다 너그럽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막무가내로 휘두르려고 했던 때문도 아니었다. 아주 깊은 곳에 감춰 두고 있던 아픔이 자꾸만 그의 입술을 간질였다.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외할머니에게 짐이 되더라도, 그녀 역시 진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아버질 죽였어요.”
“…….”
“아버지 사고로 돌아가시던 그날 저, 제 방에서 외할아버지를 봤습니다. 안 실장도 함께 있었죠. 처음엔 저도 죽이려고 하셨어요. 목을 조르셨는데…… 그 순간을 전 다 기억해요. 많이 놀라시겠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이 일은 제가 증인이고요.”
필요해서 살려 둔 것이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지 못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제 핏줄이어서 동정심이 일었을 수도, 나중에 회사를 승계할 때 써먹기 위함이었을 수도, 또 다른 어떤 이유들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제 외할머니가 입마저 귀하다고 말하는 자신의 목숨이 문 회장의 결정 한마디에 좌지우지됐다는 사실이다.
문 회장은 태주를 보면서 종종 ‘손자가 둘만 됐어도……’ 같은 소리들을 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태주는 ‘둘만 됐어도 너까지 죽였을 거다’라는 말로 치환이 돼 들려서 끔찍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외할아버지라는데. 그런 그가 알량한 관용을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 주고 이젠 장성한 자신을 제 기업을 위해 이용하고 싶어 하는데. 그 허울뿐인 관계를 스스로 자유롭게 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다는 게 무척 억울했다.
그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노파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건 내가 평생을 속죄하며 살았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한 태주가 그녀를 직시했다.
“뭐라고요?”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아서 되물었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완고한 입매가 자신이 지금 들은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여태 이 문제를 그녀가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녀도 태주에게 언급한 적 없었고, 그도 마음 약한 그녀에겐 괜히 말했다가 혼란만 가중시킬 이유를 못 느꼈다. 그저 자신을 많이 아껴 주고, 의지할 어른이 되어 주는 것으로 고맙고, 또 족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대답으로 인해 여태까지 그의 모든 생각과 결심들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하강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제 손등 위를 덮고 있어서, 그걸 차분히 빼냈다.
“외할머니.”
싸늘한 반응을 겪고도 그녀는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 알고 계셨던 거예요?”
“태주야…….”
“아시고도 이러는 거예요? 아무리 미워도 네 외할아버지라는 엿 같은 소리나 하면서?”
“태주야, 용서해라.”
“용서? 외할머니……. 뭘 용서해요. 누굴 용서해요?”
“태주야…… 제발.”
여태 자신은 외할머니의 뭘 보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워낙 문 회장의 독선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기도 했고, 그와 반대로 마음이 여린 그녀는 그 사건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겨 함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녀가 다 알고 있었다니. 태주는 충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실 수가 있어요!”
그가 어울리지 않게 언성을 높여 그녀를 힐난했다. 그녀는 잠시 흐느끼는가 싶더니 이내 소리도 없이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태주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연민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옆에서 말려 주지 않았던 외할머니도 방관자셨던 거네요. 정말 믿고 의지했어요. 내 옆에 남은 유일한 어른이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똑같은 분이셨어요. 차라리 죽을 때까지 말을 하지 마시지. 모르는 척하시지 그러셨어요!”
“…….”
“대체 왜 피해자한테 모두 잊고 용서하라고 말하시는 거예요.”
통렬한 비난을 퍼부은 그는 냉정하게 일어섰다.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어른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다고 느꼈던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죄다 지워 버리고 싶었으나 이제 와 방법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외할아버지를 향한 미움보다 그녀를 향한 배신감이 더 컸다.
그렇게도 끔찍하게 증오하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건 9할은 그녀 때문이었다. 너무나 뼈아팠다.
“저 상주 못 해 드려요. 하기 싫어졌어요.”
“태주…… 태주야…….”
“할 수 있는 한 가장 외롭게 가세요. 전 장례식장에 안 가요.”
그녀에게는 남은 자식도, 자신을 제외하면 자손도 하나 없어서 관례에 어긋난다는 건 알지만 기꺼이 상주 역할을 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고 나면 제게 남은 모든 악연들을 다 털어 버리리라 아주 오래전부터 결심했다.
그런데 자신은 이제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태, 태주야.”
그는 제게로 손을 뻗는 그녀를 완전히 없는 사람인 양 굴었다. 망설임 하나 없이 등을 돌리고 나가려는데, ‘툭!’ 하고 외할머니가 뭔가를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연 주치의와 수행 비서들이 와르르 몰려 들어왔다.
돌아보지 않으리란 결심이 무색하게 태주도 뒤늦게 그녀를 쳐다봤다. 한순간에 변심하긴 했지만 여태까지 쌓아 올린 신뢰라는 성곽의 돌담은 단번에 무너뜨리기엔 너무 높고 튼튼했기 때문이다.
“하…… 할머니, 외할머니!”
깜짝 놀라 빠르게 다가간 태주가 거품까지 물고 경련하는 그녀를 살폈다. 늙고 마른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헉, 허억…… 헉! 헉!”
가쁜 숨을 내쉬면서 미친 듯이 몸을 떠는 그녀는 너무 추하고, 짠했다. 무척 괴로운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주는, 결국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