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일부러 승강기가 아닌 비상계단으로 걸어 내려온 태주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담배가 말려서 주머니를 뒤져 보지만, 아주 어릴 때 호기심으로 피워 봤다가 조종간을 잡게 된 이후 바로 끊은 터라 나올 리가 없었다.
“별…… 좆같게 진짜.”
짜증스럽게 애꿎은 제 뺨만 슬쩍 긁은 그는 주차해 둔 자차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익숙한 낯을 마주쳤다. 안 실장이었다. 그가 90도로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얼마 전 태주가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만들어 놨던 상처들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잘 아문 것 같았다.
“뭡니까. 주차장까지 쫓아 내려와서. 전화로 하면 안 될 이야기예요?”
“개인적인 용무로 온 게 아닙니다. 이사장님 소식입니다.”
운전석 문을 열려던 태주는 멈칫했다.
순간 머릿속에 외할머니의 핏기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는 늘 일정한 그 나이 대 평균 체구를 유지했다. 급격히 살이 찌지도, 빠지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턴가 눈에 띄게 말라 가고 있어서 가끔 마음을 쓰게 됐다.
다만 워낙 잔정이 없는 그가 먼저 애틋하게 구는 일은 쉽지 않아서 계속 속에만 담아 두고 있던 차였다. 그러고 보면 제 부모님의 혼인 신고서를 넘겨받은 뒤로 얼굴 한 번 들여다볼 생각조차 안 했다. 매정하다고 자신을 탓해도 할 말이 없었다.
“외할머니께 무슨 일 있어요?”
“하루라도 양자 입적을 빨리 진행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이 안 좋으십니다.”
“그거랑 내 성 문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도련님.”
“뭐 어쩌라는 거예요.”
“당장 본가로 가셔야 할 듯합니다.”
“뭐가 얼마나 안 좋길래 이렇게 갑자기…….”
대꾸하던 태주가 그를 불현듯 쏘아봤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안 실장이 그의 무언 속 질문을 이해한 듯 반대편으로 묵묵히 손짓했다. 저쪽에 차량을 대기시켜 뒀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아 버린 태주는 조용히 그를 따랐다.
“뭐야, 저거.”
그리고 승강기와 주차장이 연결된 입구에서 권 부기장이 우연히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목격한 장면의 중요도를 감지한 그는, 차량이 떠나가는 장면까지 모두 휴대폰 화면에 담고 난 뒤라야 촬영을 종료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도련님?”
그는 휴대폰 화면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 * *
오늘 차영은 퇴근이 무척 일렀다. 마침 태주가 쉬는 날이었고, 또 내일부터 그가 시뮬레이션 테스트로 2, 3일가량 바빴다. 꼼짝없이 사흘간 데이트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아 일부러 오늘 자신이 다른 사람과 일정을 조정한 것이었다. 마침 탑장이 살 게 있어 터미널에 가야 한다면서 그를 따라나섰다.
“오늘 날씨 죽인다, 야.”
“전 이런 날씨 좋은 것도 잘 모르겠어요. 너무 더워요.”
“그게 좋은 거지. 혹독한 겨울을 떠올려 봐. 올해 눈 많이 안 왔으면 좋겠는데…….”
“그러게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나부낀 데다 그 옆에 작열하는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한 초등학교 교실 미술 수업 시간에 그리라고 시키면 열 중 여덟 명은 그릴 법한 전형적인 여름 상공이었다. 눈에 보기엔 예뻤다. 또 습도가 높지 않아 그늘에선 그나마 살 만했다. 다만 햇빛에 정통으로 맨살이 닿으면 살갗이 너무 뜨겁다는 단점도 있었다.
마침 떠오르고 있는 비행기에 시선을 두고 있던 차영이 불현듯 픽 웃음을 터트렸다.
“비행기 뜨는 게 뭐가 그렇게 웃겨?”
“아뇨, 그냥…….”
“이차영이 너 요즘 연애하지?”
그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정곡을 찔리면 때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아득해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차영이 곤란한 듯 말을 더듬었다.
“네? 그게 무슨…….”
“아니라곤 하지 마라. 너 안 하던 짓 얼마나 하는지 아냐? 일밖에 모르던 이차영이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 들여다보고, 그러다 가끔 화면 보고 혼자 쪼개고, 또 가끔은 뭐 안 좋은 일이 있는지 괜히 툴툴거리고. 게다가 언제부터 개별적으로 항공기 뜨는 거 하나하나 신경 썼다고 한국 항공 기체는 뜨기만 하면 발 동동이에요.”
“아니, 그건 그냥. 국적기니까.”
“도대체 언제부터 애국자신데?”
“…….”
“그것뿐이면 내가 말도 안 하지. 갑자기 다른 사람한테 네 자리 맡기고 사라졌다 몇십 분 뒤에 다시 나타나고 그러기도 하잖아. 네가 생전 안 하던 교대까지 해 달라고 선배한테 부탁하는 거 보고는 딱 확신했다. 이거 전형적인 사내 연애 패턴 아니냐.”
자신의 행동이 주변 사람의 눈에 도드라져 띌 정도로 바뀌었다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한 번에 몰아서 들으니 언제나의 자신과 요 몇 달 사이의 이차영이 달랐다는 것을 스스로도 확실히 알겠다. 그 정도라면 탑장도 그렇지만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도 대충 눈치챘을 듯했다.
“죄송해요. 제가 근무지 이탈 너무 자주 했나 봐요.”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냐. 여태 네가 메워 준 공백이 얼만데 다른 놈들은 몇 번이나 더 해 줘도 모자라. 너 놀러 가는 애들 대신 연말에도 일하고 신년에도 일하고 그랬던 건 까먹었냐? 여기 온 지도 벌써 2년 넘어가는데. 처음 봐서 그런다, 그러는 모습. 그때 그 식당에서 봤던 한국 항공 승무원이지? 눈 이렇게 크고, 키도 크고…….”
아. 가볍게 입을 벌린 차영이 곤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도윤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긴 한데, 제 입 안이 아주 썼던 탓이다. 괜히 애꿎게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타이밍 적절하게도 그를 구해 줄 전화가 걸려 왔다.
“저, 탑장님 죄송한데…….”
“오냐. 여기서부턴 따로 이동해. 통화해라. 내일 보자.”
“네, 내일 봬요.”
그가 손을 흔들고 앞서갔다. 차영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휴대폰을 귀에 댔다.
“한 기장 어디야? 위원회 끝났어? 결과는 바로 알려 주는 거 아닌가? 언제 알려 준대?”
속사포처럼 내뱉고 보니 꼭 자신에게 도윤이 평소에 하는 양 같았다. 여태까지의 그는 그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들이기만 해 왔다. 그런데 상대에게 궁금한 게 많아졌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반성하는 중이었다. 너무 한꺼번에 많은 걸 물었나 싶어 입을 닫고 있자니, 수화기 건너편의 태주마저도 침묵해서 머쓱해졌다.
“왜 대답이 없어.”
- 지금 차 안이고. 위원회는 끝났고. 결과는 바로 알려 줘서 교육 과정 네 시간 이수 명령 받았고. 대답 생각하느라 잠깐 입 닫고 있었어.
착각이 아니라면 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 걱정할 것 같아서 걸었다. 꼭 해야 할 말도 있고.
“언제 와?”
- 실은…… 오늘 얼굴 보기 어렵지 싶어서. 외할머니를 좀 뵙고 갈까 해.
“본가 가는 거야?”
- 응. 웬만하면 너랑 한 약속 우선으로 지키고 싶은데 거기서 밤을 새우게 될 수도 있어서 취소하는 편이 낫겠더라고. 아무래도 좀 위독하신 것 같아.
“위독? 어디 많이 안 좋으셔? 지난번에 그런 말은 없었잖아.”
- 나도 이렇게까지 안 좋은 상황인 줄은 모르고 있었어.
“어떡해? 괜찮은 거야?”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 차영이 황급히 묻는데, 건너편에서 “내리시죠” 하는 무뚝뚝한 음성이 희미하게 전달됐다.
그 순간 차영이 흠칫했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지만 귀에 익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이미 주차장에 도착한 뒤였으나, 차영은 차에 타려는 생각도 못 하고 그 옆에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서 있었다.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익어 가는 듯했다. 멀리 공항 청사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있다간 이 위에 선 차영의 온몸도 땅으로 흡수되어 버릴 법한 강력한 무더위가 유독 기승을 부렸다.
- 나 본가에 도착했거든. 먼저 끊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차영이 그를 애타게 불렀다.
“저기, 한 기장. 한태주!”
뚝. 전화는 간단한 예고를 하긴 했으나 상대의 동의는 없이 일방적으로 끊겼다. 차영이 새카맣게 변한 휴대폰 화면을 직시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무례한 태주는 최소한 자신과의 통화 중에 이런 결례를 범하지 않는다. 무척 잠겨 있던 음성도, 다급한 태도도 모두 마음에 걸렸다.
부디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걱정스러운 차영은 괜히 교대를 해 달라고 한 건 아닌가 싶어져 까마득히 멀리 있는 관제탑을 보다가, 어차피 그의 전화를 받고 심란해서 제대로 일을 못 했으리라 여기고 뒤늦게 제 차의 시동을 걸고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