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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64화 (64/144)

64화

목 언저리와 턱 주변에 아까 전 싸움에서 파생된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남아 있었다. 언제 긁히고 터졌는지는 대충 추측만 가능했고, 범인만큼은 명확했다. 태주는 당시의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미간을 흠씬 구겼다.

그러고 보면 공항 병원의 진료실은 처음 오는 것이었다. 조종사의 가장 큰 임무는 안전하게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본인의 건강은 필수로 유의해야 해서 애초에 이런 문제로 병원 문턱을 밟을 일이 많진 않았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있던 태주는 공항 내에 있는 이런 풍경이 생경해 무심결에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오늘 하루는 상처에 물 닿으면 안 되고요. 이튿날 거즈 떼고 새로 붙이는 건 기장님이 직접 하셔도 되고, 그게 정 어려우시다면 주변 병원에 들르셔도 되고요. 혹시 공항 인근에 거주하시면 여기로 오셔도 돼요.”

“나머진 대충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거 씻기 전에 뗄 수 있죠.”

“그래도 오늘까진 그냥 두시는 게 나은데, 정 불편하시면 하는 수 없고요. 거즈랑 약을 좀 넉넉히 챙겨 드릴게요.”

심한 상처는 아니라 처치는 금세 끝이 난 듯했다. 치료해 주던 의사와 그녀를 보조하던 간호사가 꾸벅 인사했다. 자연스럽게 태주도 묵례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걸어 나가려는데 병원의 출입구 앞에서 익숙한 인영을 맞닥뜨리게 됐다. 차영이었다.

“한 기장 진짜 여기 있네.”

“나 병원 갔다는 소문이 관제탑까지 났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개싸움 났다는 소식인데 얼마나 재밌어. 벌써 이륙한 비행기들에까지 다 났을 거다.”

“그래서 나 얼마나 다쳤는지 보려고 터미널까지 달려왔어?”

대답하지 않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게 분명했다. 태주는 차영을 이해했다. 똑같은 상황을 자신과 차영의 정반대의 경우라고 가정해 보면 답은 나왔다.

더 이상 어떤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는 차영의 손목을 붙잡은 그는 자동문을 지나쳐 공항 의료 센터를 빠져나왔다. 출입국장이 있는 위층에 비해 퍽 한적한 복도를 걸어 두 사람의 몸을 가려 줄 부스 옆에 섰다. 그러고는 차영의 허리를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여기 사람들 지나다니는 데야! 한 기장 미쳤어?”

그제야 당황한 차영이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태주는 아주 강경하게 나왔다.

“하지 마. 진짜!”

“네가 하지 말라면 난 더 하고 싶어.”

급기야 가볍게 턱을 쥐고 입술마저 부딪쳤다. 더 놀랄 기력도 없어진 차영이 그를 미친 듯이 밀어냈다. 지금은 운이 좋아 다니는 사람이 없다뿐이지 언제 누가 지나갈지 알 수 없는 터미널의 일각이었고 또 모든 공항은 사방에 감시하는 보이지 않는 눈이 있는, 사생활 보호 지수가 낮은 공간이었다. 이렇게 허술한 사각지대로는 두 사람의 사회적 안전과 명예를 보장받기가 어려웠다.

차영의 걱정을 아는 건지 계속 버틸 것 같던 태주가 겨우 그를 놓아주었다. 가까스로 태주의 품에서 벗어나게 된 차영이 그를 노려봤다.

“진짜 돌았지?”

“너랑 입 맞추니까 연고 맛 나.”

“입 주변에 연고 바른 건 한 기장이잖아.”

“내 탓이라는 거야?”

“당연히 그쪽 탓이지. 종일 얌전하게 탑에서 일만 한 나겠어? 아직 그쪽 정신머리가 생각이란 건 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은데 비행기에선 왜 그랬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 대단하신 이유가 뭔데.”

태주는 대답 대신 여봐란듯이 일부러 다시 차영의 뺨을 붙잡고 키스했다. 거부하면 더 재미있어서 저러나 싶었는지 주변의 눈치를 살핀 차영이 얌전히 있었다. 그러자 그는 제 입술 주변에 묻어 있던 연고를 핥아서 혀끝을 도구로 해 차영의 입 안에 짓궂게 밀어 넣었다. 그래도 차영이 얌전히 굴자 그가 뒤늦게나마 놓아주었다. 무반응이야말로 아주 현명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무섭네, 이차영. 너 소문 다 듣고 묻는 거지?”

마주 보니 얼굴을 구기고 태주를 쏘아보는 차영의 눈빛이 생각보다 차가웠다.

“나 진짜 열받았어.”

아니나 다를까. 차영의 음성도 평소에 비하면 아주 싸늘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일에 내 잘못은 없어.”

“아냐, 일부지만 있어. 주눅 들어서 말 못 하게 한 원인 제공은 네가 했다고. 내가 처음부터 넌지시 말했었지. 좀 둥글게 말할 순 없어? 맞는 소릴 해도 한 기장처럼 싸가지 없이 하면 들어주기 싫어. 여기 한국이고,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한테 좀 흠이 있어도 일단 우대하고 존중해.”

“그거 틀린 거야.”

“누가 몰라? 맞든 틀리든 관례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까마득하게 어린 사람한테 면박당하면, 나 같아도 싫어. 그 부분에 관한 한 너 완전히 개자식이야.”

“그래도 넌 내 말 들어 줄 거잖아.”

“제발 잔소리하면 좀 새겨들어라. 응? 꼴 볼만하다. 얼굴이 이게 뭐야 진짜. 속상하게.”

“영광의 훈장이지.”

느물거리면서 대강 눙치고 넘어가려는 듯해서 차영이 짜증스럽게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애도 아니고. 말로 하지 왜 주먹다짐을 해. 탑승교에서까지 그러는 통에 승무원들 다 봤다며. 사내 복무규정 있을 거 아냐. 징곗감 아냐?”

“감은 맞는데. 이번에 나는 진짜 결백…….”

“한태주.”

차영이 엄정한 눈길을 보내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태주가 제 뺨을 슬쩍 긁었다.

“……알았어. 반성하면 되잖아.”

“회장님이 한 기장 외할아버지라며. 좀 봐 달라고 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권 부기장만 징계할 거야.”

타인의 권위를 이용한다는 게 좀 치사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가 이 사건으로 얻는 불이익이 없다면, 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제야 차영이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던 걸 멈췄다. 눈이 마주치자, 뺨을 실룩거리던 태주가 다 터진 입으로 픽 웃었다.

“한태주 씨는 지금 웃음이 나오다 보다.”

“오랜만에 너 실물로 보니까 좋아서.”

차영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렸다.

* * *

비행이 없는 어느 이른 오전, 대영 한국 항공 본사 빌딩에 도착한 태주는 사고 윤리 위원회가 주최한 징계위에 참석했다.

해당 사건의 두 관계자인 태주와 권 부기장이 참석하고, 그날 발생한 사건의 전말을 각자 증언했다. 마지막 발언까지 모두 마쳐 자신의 입장을 소명한 그들은, 회의장을 빠져나가 위원회 위원들의 회의가 끝날 동안 대기하는 중이었다.

회의장 안에서는 그들의 증언과 목격자들의 증언, 그리고 현장의 녹취된 음성이나 당일 그들과 교신했던 관제사들의 증언 따위를 토대로 징계의 수위를 결정하고 있을 터다. 기다란 소파형 벤치에 멀리 떨어져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는 그들 사이에 대화라곤 없었다.

침묵의 강이 아주 오래, 느긋한 속도로 흐르고 마침내 양 문으로 된 회의장 문이 열렸다. 서류철을 들고 있는 직원 한 사람이 그들을 비어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우선 한태주 기장님께는 한국 항공 교육 과정 이수 네 시간을 명합니다. 여러 번 해 봐서 알고 계시죠? 항상 사유가 제각각이셨습니다만 이번엔 칵핏 내 기장들 간의 의사소통 원활화를 위한 인적 자원 관리가 그 사유입니다.”

태주가 또 지겨운 그 짓을 반복해야 하느냐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징계 사항을 통보하던 직원은 별 동요 없이 권 부기장을 향해 시선을 돌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권영하 부기장님께서는…… 3개월 비행 대기와 6개월 감봉을 명합니다.”

권 부기장은 당연히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규로 이 문제를 다룰 때 태주보다 자신의 잘못이 훨씬 더 큰 것은 사실이었다. 제 행동이 그릇된 것이었다는 점은 알았다.

하나 태주의 징계가 생각보다 너무 가벼워서 자신도 그러리라 여겼다. 당연히 죗값을 치를 생각이지만 처벌이 공평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 희망이 무너진 것이다. 특히나 기장에 승급할 때 이런 인사 고과들은 큰 영향을 미쳤다.

직원이 꾸벅 인사하고 자취를 감췄다. 태주도 일어서려 하는데, 권 부기장이 그를 잡았다.

“한태주, 너 도대체 무슨 빽이냐? 새파랗게 어린놈이 온갖 특혜 다 입고 기장 견장을 달질 않나. 대영 그룹 총괄 회장도 퍼스트 듀티로 너만 따로 부르질 않나. 원인 제공 내가 했어도 탑승교에서 주먹다짐은 같이했는데, 왜 나만 비행 대기에 감봉이냐?”

“왜 다짜고짜 상급자한테 반말이야? 아직 정신 못 차렸네? 그래서 당신이 안 되는 거야.”

대충 무시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온 태주는 뒤쫓아 온 권 부기장이 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 팔뚝을 덥석 붙잡는 바람에 과잉 반응을 보이게 됐다.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상대를 확, 떠민 뒤에 낮은 벤치 위로 그를 쓰러뜨리고 밀어붙여 한쪽 다리로 전신을 압박한 것이다.

“헉…… 윽. 이 새끼가!”

지나친 반응에 당혹을 금치 못한 권 부기장이 얼떨떨해하는 기색을 하고 누운 채로 태주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태주를 향한 적대감은 여전히 눈가에 형형했다. 그런 그를 주시하는 태주의 표정은 일말의 동정심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차가웠다.

“허락 없이 어딜 손대. 죽고 싶어?”

“너 뭐 대단한 집 아들이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집 아들인데? 어? 같이 좀 알자.”

“현장에서 잘못은 그쪽이 했고, 난 캡틴으로서의 책임만 지는 게 당연한 결과야.”

“캡틴으로서의 책임? 넌 널 보좌해야 하는 부기장을 제대로 통제 못 했어. 부기장이 날뛰게 만들었다고! 그러면 너도 같이 비행 대기와 감봉 명령을 받았어야지!”

“그게 바로 중요한 지점이야. 날뛴 게 내가 아니라 너라는 거.”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경고하던 태주는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권 부기장의 관자놀이를 툭툭, 농락하듯 건드렸다.

“당신은 여기 머리가 달려 있으면 제발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 내내 장식으로 달고만 다니지 말고. 생때같은 자식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야,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냐.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아예 부기장 자격을 박탈해 버리고 싶은 걸 누가 반성하라는 통에 참은 줄이나 알아.”

“일개 기장인 너한테 그럴 권한이나 있냐?”

“없을 것 같아?”

의미심장하게 대꾸한 태주가 압박에서 자유롭게 놓아주자, 권 부기장은 다시금 그에게 달려들려는 목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방금 막 징계를 받은 상황에서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을 우려한 태주가 받아 주려 들지 않자, 이번에는 아예 그의 앞을 막아서고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승강기에서 내린 본사의 임원진들이 그들 사이를 지나쳐 갔다. 보는 눈이 많으니 하는 수 없이 태주를 놓아주고 겨우 분을 삭이는 그를 향해, 태주가 용건 끝났으면 꺼지라는 듯 오만하게 턱짓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발견한 임원진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들 사이를 지나쳐 복도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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