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로마와 인천 사이의 구간을 운항하는 한국 항공의 기내에서 합동 브리핑이 한창이었다. 전단의 이착륙과 순항 구간을 태주의 팀이 맡게 됐다. 그리고 그와 함께 손발을 맞출 부기장은 몇 번 사소하게 부딪혔던 전례가 있는 권 부기장이었다.
탑승 전 운항 브리핑 때 태주는 오늘 자신이 직접 기체를 확인할 수가 없게 됐으니 부기장이 대신 꼼꼼하게 살펴봐 달라는 전언을 남겼다. 그러고는 지금에야 마주친 것이었다.
“권 기장, 기체에 이상 없는지 정비사들이랑 같이 최종 확인했습니까?”
브리핑이 끝나 갈 무렵 그가 체크할 사항들을 눈대중으로 훑다가 물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 성실하게 임했으리라 믿고 그냥 점검차 질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꾸가 그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든 듯했다.
“네, 확실히 보고받았습니다.”
서류에 눈을 박고 있던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삽시간에 그의 분위기가 싸해졌다는 것을 느낀 다른 승무원들이 웅성거림을 멈추고 침묵을 지켰다.
“보고? 직접 본인 눈으로 확인 안 했어요?”
“그 사람들은 항공기 정비에 관한 한 저보다 훨씬 뛰어난 전문가들입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매번 조종간 잡을 때마다 기체 상태 일일이 확인하는 줄 압니까?”
승무원들이 눈치를 살피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 궁리하기 바빴다. 그사이, 다른 것들도 다 웬만해선 그냥 넘어갈 수 없지만 비행에 관한 한 그 예민한 지점이 극대화되는 태주가 권 부기장을 향해 독침 쏘아붙이듯 신랄하게 비난했다.
“왜 일방적으로 보고만 받아요. 권 기장이 정비사들 상사인가? 비행기는 각자 자리에서 협업을 하는 종합 시스템입니다. 내가 책임 기장인 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전 승무원들 대표해서 책임을 지는 위치라는 거지 당신들보다 머리 하나 위에 있는 상사라는 의미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거 몰라요?”
사람들이 다 있는 앞에서 또 무안을 당하게 생긴 권 부기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들은 사적인 대화 한 번 나눈 적도 없이 만나면 일만 하는데도 번번이 이런 식으로 크고 작게 마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업무로 호흡을 맞추는 사람들 사이에도 상성이라는 것이 있다. 태주는 모든 위험 요소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까다롭게 구는 타입이라면 상대는 조금 여유롭게 하는 편인 듯했다. 그 상성이라는 게 꽤나 맞지 않는 것이다.
“부기장이 반드시 같이하라고 특별히 부탁까지 하면서 맡긴 일인데 그걸 다른 사람한테 전적으로 일임하면 어떡합니까. 권 기장 보고 좋아하시죠. 그쪽은 나한테 그 보고할 때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해 보세요.”
“정비사들을 신뢰해서 그런 겁니다. 한 기장님이야 워낙 꼼꼼하시지만 평소에 다른 기장님들은 그렇게 정보만 전달받기도 하시니까요. 제 불찰은 인정하나 이렇게까지 비난하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제 입장입니다.”
“이렇게까지? 아직 정신 못 차렸네. 말귀 못 알아들어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철을 권 부기장에게 던져 버렸다. 그것이 상대의 금색 견장 위에 맞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걸 내려다보는 권 부기장의 두 손이 부들거리면서 떨렸다. 다만 저항하거나 반박하기보단 차라리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매조지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한 듯 말을 아꼈다.
“그러다가 기체에 드라이버 하나라도 발견되면, 창공을 열 시간을 넘게 날아야 하는데 권 기장이 책임질 건가?”
“시정하겠습니다.”
“당연히 시정하셔야죠. 당장 내려가서 본인 눈으로 직접 아무런 문제 없는지 확인하고 오세요. 그래야 사고가 생겼을 때 칵핏에서도 대처 방법을 가장 빨리 찾습니다. 사무장님은 승객 리스트 중에 노약자나 임산부들 명단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고요. 아무래도 비행시간이 길면 단거리 구간에 비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많이 벌어집니다.”
“네, 알겠습니다.”
사무장이 대답과 함께 서류철을 주워 건넸다. 브리핑이 잠정적으로 종료된 것이다. 분을 참지 못한 권 부기장이 기체를 빠져나갔다. 태주는 쳐다보지도 않고 조종석으로 향했다.
* * *
조종석 안은 정적이 흘렀다. 기내에서 발생하는 기계의 소음들과 엔진 소리, 그리고 교신할 때의 잡음 따위들의 외부적인 요소들을 제외한다면 조종간을 잡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 겨우 들릴 지경이었다. 그들은 서로 반드시 필요한 업무적 대화 외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딱딱한 분위기에서 운항을 한 뒤라야, 그들과 승객들 모두의 최종 목적지인 인천 국제공항에 근접했다.
“권 기장, 관제 연락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권 부기장은 태주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기내의 계기판 수치와 각종 경고 램프 따위들을 살피는 태주는 그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지, 그러다가 혼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여유가 있었더라도 크게 관심이 없었으리라.
1분여가 지났는데도 권 부기장은 관제 요청 대신 침묵했다. 이에 의아함을 느낀 태주가 그제야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뭐 합니까. 거북이 기어가는 것도 이것보단 빠르겠네요. 얼른 타워에 착륙하겠다고 알리고 유도 지시 달라고 하세요. 공항 코앞입니다.”
태주가 재촉하자 입술을 달싹인 권 부기장이 교신 장비를 든 채로 한참을 더 머뭇거렸다. 태주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전방과 측방 계기판의 수치들과 표시 램프 등에 이상이 있는지 여부를 전부 확인하던 그는 특별히 문제는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라야 다시 권 부기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장비를 만지고만 있을 뿐 여전히 권 부기장의 입술을 가르고 관제 요청의 메시지 따위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권 기장.”
태주가 나직이 호명하자, 그는 몹시 곤란해하는 얼굴을 하고 태주를 쳐다보았다.
“기장님, 그게…….”
그러고는 난감한 듯 목덜미를 긁었다. 문제가 생겼으면 해결해야 했으므로, 태주는 일단 경청하는 태세를 취했다.
“그게, 그다음에 할 말 뭡니까. 하세요.”
“교신 장비가 말을 안 듣습니다.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좀 이상하더라고요. 계속 교신을 시도해도 잘 안 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주파수 제대로 맞췄어요?”
“네, 맞췄는데 먹통입니다.”
“일단 내가 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메시지를 보내세요. 그리고 통신 기기에 다른 문제 없나 먼저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통신 장비가 말썽을 일으키면 기체는 큰 곤란에 직면했다. 자신들이야 거의 착륙 직전인 상태라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지만, 그 후 이 비행기는 간단한 절차만 마친 뒤 다시금 먼 거리 여행을 떠나야 하는 숨 가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최대한 빨리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고 해결하는 게 중요했다.
명령을 내린 태주가 확인 차원에서 부기장의 조종석 쪽으로 살짝 상체를 숙여 장비를 눈에 담았다. 권 부기장이 이를 말리려고 했으나 민첩한 태주의 움직임이 좀 더 빨랐다.
태주는 눈동자를 굴리던 와중 바닥에 구겨 놓은 낯선 브랜드의 빈 생수 페트병을 발견하게 됐다. 일순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허리를 다시 곧추세운 그가 권 부기장을 황당해하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권 기장 칵핏에 외부 생수 갖고 들어왔어요?”
“네, 아니 저기 그게…….”
“마시는 거 못 봤는데 물통은 비어 있네요.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설마 기내에 쏟았습니까?”
딱딱하게 굳은 권 부기장이 난감해하는 기색으로 태주의 눈치를 살폈다. 짐작건대 아무래도 교신 장비 따위가 말을 듣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태주의 말없는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 내던 권 부기장은 본인도 억울한 측면이 많았는지 발끈해서 다소 횡설수설하며 항변했다.
“그, 아까 잠깐 자리 비우셨을 때……. 바닥에. 그런데 기기에는 얼마 안 튀었고요. 그라운드 콜 버튼에는 조금 많이……. 안 그래도 내려서 바로 확인 요청하려고 했어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한 겁니다. 게다가 교신 장비가 제 것만 있는 것도 아닌데…….”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런 일이 있었으면 운항 중에 진작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그걸 착륙하기 직전까지 입 닥치고 있어!”
대충 이 상황의 맥락이 유추가 된 태주가 몹시 분노했다. 하대가 이어지자 다혈질인 권 부기장도 순간적으로 울컥해 헤드셋과 선글라스를 집어 던졌다.
“하……. 너 이럴 거 아니까 그랬다, 이 새끼야. 너는 좋게 좋게라는 걸 못 배워 먹은 새끼니까! 어디 새파랗게 어린 게 따박따박 반말이야!”
“당신이 이러고도 프로야? 문제가 생겼으면 최소한 정직하게……! 하. 내 입만 아프지.”
“뭐 인마?”
“내 칵핏에서 꺼져.”
더 이상 권 부기장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태주가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냉정을 발휘해 관제 센터에 착륙 요청을 하려던 때였다.
옆에서 손을 불시에 뻗은 권 부기장이 태주의 목울대 급소를 훅 올려 쳤다.
“한태주, 이 건방진 새끼가. 너 뭐 그렇게 잘났어!”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자신을 가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태주의 반응 속도가 느렸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권 부기장의 손에 울대뼈를 강타당했다.
“윽……! 이런 씨발!”
이윽고 눈앞이 아찔해진 그의 상체가 어설프게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