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태주와 비서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져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아이와 여자의 가까이에까지 금세 닿았다. 더욱 지척에서 보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묻고, 또 듣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현장의 모두가 가뜩이나 비가 내리고 업무가 고된 바람에 그녀의 존재를 본의 아니게 무시했다.
〈엄마, 엄마!〉
급기야 아들과 손을 잡고 있던 그녀가 아이의 손을 놓치고 경찰을 뒤쫓았다. 겁에 질린 상주 남자아이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졸졸 따랐다. 그러다가 태주 일행이 주변에 도착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돌아보았다. 그때 태주와 눈이 마주쳤으나 아이는 제 어머니가 어딘가로 또 빠르게 걸어가려는 기미를 보여서 금세 피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아저씨, 쟤 이름이 뭐예요?〉
〈글쎄요. 제가 이름까지는 잘……. 알아다 드릴까요?〉
〈도련님이 왜 여기 계셔!〉
태주가 비서를 돌아보는 사이, 뒤통수를 찌르는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급작스럽게 등장했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힘겹게 돌려 보니 우비를 입은 채로 그들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안 실장이었다. 태주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커다란 우산은 빗줄기를 꽤 가려 주긴 했으나 무서움까지 감춰 주지는 못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수행 비서의 뒤로 숨을 뻔했다. 그걸 겨우 견뎠다.
다만 안 실장이 제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뒷걸음질 치게 되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한 발짝 뒤로 내디뎠을 때 수행 비서의 다리에 제 몸이 부딪쳤다. 활로가 막힌 것이다.
〈안 실장…….〉
〈도련님,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왜 오신 겁니까.〉
그는 침착한 음성으로 태주를 탓하고는 곧바로 뒤쪽의 비서를 엄중히 꾸짖었다.
〈여기 깔린 기자들이 몇 명인데 생각 없이 도련님을 모시고 와. 제정신이야?〉
〈실장님, 회장님 의중이십니다.〉
〈회장님께서?〉
〈네, 도련님께서 현장을 꼭 보셔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려오면서 실장님께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현장에서 워낙 정신이 없으신 것 같길래……. 죄송합니다.〉
〈현장을 왜.〉
수행 비서는 안 실장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문 회장이 거기까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태주를 일부러 제 아버지의 유해가 발견된 곳에 보낸 건 전제 군주들이 국민이라 쓰고 노예라 읽는 사람들을 다룰 때 종종 쓰는 통치 방식이었다. 공포감을 조성해서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록 낡았지만 아주 전통적이고 현재까지도 유효했다.
안 실장은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 끄덕이고는 제 허리 조금 위만큼 오는 어린 태주를 내려다봤다. 눈높이가 맞지 않다고 느꼈는지 몸을 숙여 태주를 바라보았다. 계속 두려움에 떨고 있던 태주가 제 화를 못 이기고 그를 쏘아봤다.
〈도련님, 현장 확인하시겠습니까?〉
〈나한테 결정할 권한 있어요?〉
〈권한은 회장님께 있지만 전 언제나 도련님께도 의견을 물을 겁니다.〉
그리고 상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현실을 일깨우는 건 안 실장의 방식이었다. 그는 까마득하게 어린 미성년의 태주를 데리고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 따위 없어 보였다.
대꾸하지 않고 안 실장을 지나친 태주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음성이 덩어리져 있는 위치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그가 비를 맞을세라 수행 비서가 재빨리 뒤쫓아 왔다. 보이지는 않지만 안 실장에게 별말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도 같이 이동하는 듯했다.
마침내 노란 폴리스 라인이 쳐진 현장 부근으로 접근한 태주는 먼발치에서 거의 잔해가 되어 버린 경비행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정확히 반대편 지점에 서 있는 아까 그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여전히 어머니와 함께였다.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태주가 입술을 달싹이다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아이 쪽에서 또 먼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왠지 섭섭한 마음도, 안타까운 기분도 들었다.
이미 다 식어 버린 잔해들 위로 무정한 빗줄기들이 세차게 쏟아졌다. 한겨울, 운이 나쁘게도 비명에 함께 죽어 버린 두 남자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이제 돌아오지 못하십니다. 앞으로 도련님께서 의지할 건 회장님 내외뿐입니다.〉
태주는 차가운 얼굴을 한 안 실장을 올려다봤다. 그날, 그는 두려움이 너무 크면 증오심마저 불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고, 뼈에 새길 정도로 깊이 깨달았다. 안 실장과 제 외할아버지가 너무 끔찍했다.
사건 현장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경찰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쉽게 협조해 주지 않자 그들이 안 실장이 있는 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걸 눈치챈 안 실장이 황급히 태주부터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수행 비서의 우산을 대신 들어 태주의 뒷모습이 노출될 일을 완전히 통제하고 외부 도로의 차량 방향으로 안내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마른 어깨에 안 실장이 손이 닿게 됐다. 태주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들은 어느새 차량 인근에 도착했다. 다시금 태주를 차에 태우는 안 실장은 비를 쫄딱 맞으면서 뒤따라온 수행 비서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태주는 뒷문을 연 채로 손을 바깥으로 뻗어 빗물을 받아 봤다. 이렇게 많이 내리고 있는데, 각도가 비스듬해서 정작 손은 젖기만 할 뿐 물이 고여 들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옵니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쩝니까.〉
안 실장은 태주를 살짝 안으로 밀어내더니 문을 닫아 버렸다. 발끈한 태주가 다시 활짝 차 문을 열었다. 그가 돌아서려 하다가 도로 문이 열린 것을 보고 아까 그랬던 것처럼 태주의 앞에 허리를 숙여 정면에서 눈을 마주쳤다.
〈도련님은 이제 서울로 다시 돌아가시면 됩니다. 아니면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버지랑 같이 죽은 아저씨. 저기서 그 집 아들 봤어요.〉
〈도련님은 그런 건 모르셔도 됩니다. 현장만 기억하십시오.〉
〈현장에 그 애가 있었다고요.〉
〈…….〉
〈나보다도 어려 보이던데, 앞으로 걘 어떻게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어린애한테서 아빠를 빼앗아요. 네? 우리 아빠는 왜 나한테서 빼앗아요.〉
〈누구도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잘 살아가겠죠.〉
〈외할아버진 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요.〉
‘왜’라는 질문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태주는 그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휩싸여 어영부영 며칠을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저 처참한 모습을 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어렸어도 뭐가 잘못됐는지, 혹은 나쁜 건지에 따위에 대한 방향성은 인간이기에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외할아버지는 틀렸다.
〈전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서울로 올라가시죠.〉
그는 구체적인 대답 대신 조수석의 수행 비서에게 눈짓했다. 뒤이어 허리를 세우려 하자 태주가 그의 우비를 확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그의 뺨을 내려쳤다. 옳고 그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태주는 나이와 상관없이 누가 더 권력의 우위에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안 실장은 특별히 동요를 훤히 드러내진 않았다. 다만 이 순간의 굴욕을 최대한 유연하게 억누르는 모양인지 음성이 더욱 낮고 차가워졌다.
〈아직 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까?〉
〈아까 그 애 이름이 뭐예요.〉
〈한 선생님과 동승하신 조종사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이차영입니다.〉
〈이차영……. 그 이름도 걔 아빠가 지어 줬겠죠.〉
읊조리듯이 낯선 이름을 중얼거린 태주는 자신이 눈앞의 안 실장의 뺨에 대단한 흠집을 내지는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젖은 뺨은 색이 변하지도, 태주의 손자국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이미 장성한 어른인 그를 상대하기에 자신은 아직 너무 어린 것이다.
차라리 끔찍한 얼굴을 안 보겠다는 양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안 실장이 태주의 의중을 이해하고 바깥에서 문을 닫았다.
묵직한 배기음을 내며 그를 태운 차량이 빗속을 뚫고 산길을 주행하기 시작했다. 창에 타닥타닥 부딪히는 물줄기들이 여전히 태주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차영이라는 이름의 그 애는 지금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추후에 후폭풍이 올 때쯤엔 모든 것이 늦어 있을 터다. 사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와 버린 뒤였다.
오직 제 외할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