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치-60화 (60/144)

60화

한여름의 열기가 뜨거운 계절, 태주는 로마의 한 호텔 안에 자발적으로 갇혀 있었다.

- 거기 우리나라랑 기후 비슷하던가?

부드러운 어투와 느긋한 파동이 그의 귓전을 다정하게 감쌌다. 이른 아침부터 듣게 된 반가운 차영의 음성이었다.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어깨로 지탱한 그는 창가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확 쳤다. 유럽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한눈에 보이는 숙소는 전망이 무척 좋았다.

“비슷해. 여기 더우면 거기도 덥고. 넌 이제 출근해?”

- 한 기장 시차 계산할 줄 몰라?

“아, 그렇지. 거기 점심 좀 지났겠다.”

차영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건너왔을 때에는, 그걸 붙잡아 귓전에 영영 앉혀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 편안하게 잤어? 오늘 호텔 근방에서 유유자적하면서 푹 쉬어. 시차 한 시간 극복하는 데는 꼬박 하루가 필요하대.

“일단 어젠 네가 자장가 불러 줘서 푹 잤어.”

- 누가 자장가를 불러 줘. 한 기장이 나랑 통화하다 그냥 잠든 거지.

“불러 줬어. 꿈에서.”

- 꿈꿨으면 제대로 못 잔 건데…….

“농담한 거야.”

- 나야말로 농담에 대답해 준 거야. 각주 달아 줘야 돼? 이 페이지는 농담입니다.

“이차영 오늘 왠지 짓궂다.”

- 보고 싶어.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릇은 차영 본연의 다정함을 못 쫓아 왔다. 따뜻한 말투보다도 그가 전한 말이 더 기분 좋게 태주에게 스며들었다.

“다음엔 같이 오자.”

- 같이 갈 데 엄청 많네.

“열기구 축제가 제일 먼저야.”

- 10월 초순이라며? 나 장기 휴가 8월부터 낼 수 있는데. 여름휴가 있거든.

“여름휴가? 며칠이나?”

- 선배들이 많이 쉬는 주간 피해서 연차 몰아 쓰면 뭐, 꽤…… 난 평소에 워낙 일만 해서.

아직 차영은 태주의 손에 거의 반강제로 이끌려 제주도에 다녀왔던 이후로는 멀리 떠나 본 일이 없었다. 평소의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기도 했지만, 여유를 내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을 터다. 태주의 일정에 맞춰서 그가 운항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용기도 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차영은 끝내 그러지 않았다. 아직은 하늘이 온전하게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 귀국하면 어디 가까운 데라도 같이 다녀올까?”

- 비행기 타자는 거지? 그건 다음에. 정말 거리상으로 가까운 곳에서 놀자.

“정 걱정되면 조종간 내가 잡으면 되잖아.”

- 한 기장이 잡으면 뭐 좀 달라?

“차원이 다르지.”

- 항상 자신감이 넘치신다.

“내가 능력에 비해 얼마나 겸손한 건지 네가 알면 까무러칠걸.”

수화기 건너편에서 차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태주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종일 아무 소리도 없이 오직 그의 웃음소리만 듣고 있으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말한 바가 없으니 그걸 아는 것도 아닐 텐데, 차영은 냉정하게도 금세 웃음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꽤나 진지한 어조로 태주를 회유하려 들었다.

- 한 기장 혹시 저가 항공사로 옮길 생각 없어? 내가 보니까 그런 덴 취항하는 데도 제한적이고 운항 거리도 짧아서 1박이나 2박으로 짧게 다녀오더라. 한국 항공은 노선이 너무 많아.

“나도 보고 싶어 미치겠어.”

- 곡해를 꽤 좋아하네. 국어 공부는 별로 못했겠다.

“꼭 그렇게 한 번은 튕기더라. 아까처럼 남자답게 순순히 인정하시지.”

-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거 알면 얼른 오기나 해.

“정 우리가 서로 보고 싶으면 폰 섹스로 각자의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도 있어.”

- 절대 싫어.

말이 채 끊기기도 전에 통화는 일방적으로 종료됐다. 그립고 애틋한 차영의 음성 대신 차가운 기계음만이 잠시 울렸다.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겠냐 이거지. 가끔씩 몹시 매정하네.”

깍둑썰기 하듯 단칼에 끊긴 화면을 애석한 얼굴로 보던 그는 픽 웃었다. 그러고는 화면 위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지만 차영의 익숙하고도 달콤한 음성을 뒤쫓듯이 그 위를 매만졌다.

차영은 아마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자신을 모를 때부터. 태주는 그를 알았다. 혼자 차영 몰래 쌓아 온 서사들이 이미 산을 이룬 뒤였다. 그걸 허무는 게 도저히 불가능해진 지경에 이르렀을 때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진 태주는 그의 앞에 제 존재를 드러냈다.

〈이차영 관제사입니다.〉

관제탑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차영은 정말 처음 보는 사람 보듯 자신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두 사람은 아주 아득한 오래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우연 같은 게 아니다. 반드시 만나야만 했던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땐 너무 어려 스쳐 지나가야만 했다.

물끄러미 휴대폰을 보고 있던 태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주 까마득한 지점에 위치한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장대비가 내리는 어느 겨울, 민족의 대명절을 앞두고 있던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어린 태주는 차 안에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충청도로 향하던 한 경비행기가 개발되지 않은 택지 주변의 울창한 숲에 추락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충청 지역의 한 야산에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정상 너머 내리막길 우거진 숲속에서, 등산을 하던 한 주민이 파손된 기체를 발견해 어제 오후 신고했습니다. 인명 피해는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피해자는 탑승하고 있던 조종사 외 탑승자 한 명으로, 이를 제외한 다른 피해 사항은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사고의 원인은 조종사의 음주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에서 기인한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 경찰은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수색차 현장에…….]

〈라디오 끄세요.〉

태주가 조수석의 수행 비서를 향해 명령했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는 음 소거 했다. 애써 덤덤하게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지만, 아까부터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려 둔 태주의 두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상태였다.

며칠 전 제 방에 허락도 없이 침입해서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까 외할아버지에게 묻던 위협적인 남자가 창밖의 바로 지척에 있었다. 그런데 정확히 어디쯤 서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어느 틈에 가까워지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물방울이 차량의 창문으로 쉴 새 없이 내리꽂혔다. 뒤쪽 창문에는 와이퍼가 없었다. 그래서 안에 있는 태주가 아무리 차가운 창문을 손으로 쓸어내려 봐도 물방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저씨, 창밖이 잘 안 보여요.〉

〈이제 곧 도련님께서 직접 나가셔서 현장 확인하셔야 합니다. 경찰에게 연락이 올 겁니다.〉

〈제가 꼭 봐야 돼요?〉

〈회장님 명령이십니다.〉

때마침 차량 내부의 전화가 울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짤막하게 통화를 하는가 싶던 수행 비서가 이내 밖으로 나가려고 손잡이를 쥐었다. 커다란 우산을 펼친 그가 태주가 있는 자리의 문까지 열어 내리기를 유도했다.

〈저 아무것도 보기 싫어요.〉

〈말씀드렸다시피 회장님 지시셨습니다.〉

그들에게 외할아버지의 명령은 곧 성문법과도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어린 태주에게는 거기에 저항할 아무런 힘도 권리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서 도로 반대편의 야트막한 야산을 올려다봤다. 굵은 비가 내리면서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들을 뒤덮는 모습이 시각적인 공포감을 조성했다.

태주는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비서가 안내하는 숲 쪽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들의 목적지엔 아버지가 타고 갔다던 추락한 경비행기가 모든 동력을 잃은 고철덩어리가 되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걸을수록 점점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에 넘어진 자신을 지탱해 줄 사람은 있어도, 마음을 위로해 줄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한 그는 애써 기운을 내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자신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어떤 남자아이를 하나 발견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동승했던 경비행기 조종사 부인 되시는 분입니다. 함께 있는 친구는 외아들 같습니다.〉

태주의 질문이 담고 있는 핵심을 용케 파악한 수행 비서가 즉각 답을 주었다. 대답을 들으면서도 태주의 시선은 남자아이에게 꽂혀 있었다. 창백한 혈색을 하고 있으나 퍽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는 아주 많아야 자신 또래거나 십중팔구 두세 살 어려 보였다.

아직 본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태주만큼이나 아무것도 모를 천둥벌거숭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저렇게 뭐가 뭔지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얼굴을 하고 있을 수 있을 터다.

다만 질린 듯한 표정을 한 제 어머니의 손을 아주 꼬옥 붙들고 있는 모양새가, 주제에 그녀를 위로하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그 조그마한 게 검은 옷을 차려입고 팔뚝에 상주 완장까지 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어울리지 않고 우스꽝스러워서 꼭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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