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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59화 (59/144)

59화

야경이 보이는 창가 방향 소파에 새 시트만 뒤집어쓴 두 사람이 맨몸으로 겹쳐 있었다. 조금 전까지 진득한 사랑을 나눴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무겁고 눅눅한 공기가 흘렀다. 열락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아직 해결 못 한 현실의 문제들이 그들 사이에 남아 있다는 것을 새삼 인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한태주 씨 아직도 나한테 할 말 없어?”

어렵사리 차영의 입술이 열렸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태주가 차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머리에서 풍기는 것과 같은 청량한 샴푸 향이 풍겼다. 태주는 사르륵, 하고 손가락 사이에 흩어지는 머리카락들이 차영 같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지금 제 품에 안겨 있는데도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한국 항공 문현기 회장. 이름 들어 본 적 있어?”

“문 회장? 당연하지. 그 어른 모르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어디 있어.”

꼭 공항에 근무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의 성명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인들 중 문현기 회장은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거의 맨손으로 시작해 항공 분야뿐만 아니라 유통·물류 업계나 운수 업계 전체를 꽉 잡고 있는 대기업으로까지 사업체를 끌어올린 입지전적인 인물이어서기도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국내 기업인들이라면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제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어서 다들 족벌 경영을 일삼는 와중에, 그만큼은 이미 죽은 딸 이후로는 자식을 보려 하지도, 입양 따위를 하지도 않고 산수가 다 된 나이까지 스스로 고독하게 버텨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사람 외손자야.”

오후에 도윤을 통해 들었던 말이 이제 와 떠올랐다. 그가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문 회장에게 크게 타박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태주가 제 외할아버지와 뉴욕에서 내내 함께 있었다고 했던 말까지 생각났다.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어서 아깐 거기까지 사고를 진척시키지 못했으나, 앞뒤 맥락을 따져 보면 그 어떤 것보다도 적합한 해답이긴 했다.

짐짓 당황한 차영이 그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태주가 차영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기도 해. 그런데 내가 계속 한 씨 성을 유지하고 혼자 조용히 자라서 사람들은 내 존재에 대해서 잘 몰라.”

“한 기장 부모님 혼인 신고서…… 나 봤어. 문나은 씨……. 아…… 회장님 딸이구나.”

이제야 전부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 태주의 고백은 단순히 누군가의 외손자라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과 그의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르다는 개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뭔가 차영이 짐작하지 못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기저에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라면 태주가 본인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 거에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할 이유도, 지금 저렇게 괴로워하는 얼굴을 할 이유도 없었을 터다.

“응, 어머닌 아버지랑 결혼을 못 한 상태에서 날 낳고, 결국 돌아가셨어.”

“…….”

“외할아버진 나를 양아들 삼고 싶으시대. 본인이 일군 회사를 정식으로 물려주고 싶다는 것 같아. 열심히 일해서 그만큼 키워 뒀으니 남 주긴 아깝기도 하겠지.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든.”

차영은 지금 이 순간의 그가 왠지 완전히 솔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그가 꺼낸 이야기가 퍽 충격적이라서 말을 아꼈다.

“그러면 결국 우리 아버지 고용주 일가였던 거네. 한 기장 앞에서 한국 항공 욕 괜히 했다. 그때 말하지 그랬어.”

“…….”

“한 기장이 유부남도 산업 스파이도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내뱉으니 태주가 차영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 맞추며 픽 웃었다. 내내 굳히고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지자 차영은 뻣뻣했던 제 마음의 결도 그제야 조금 보드라워지는 느낌이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혹시 한 기장 뭐 정략결혼 같은 거 해야 돼?”

사실 이런 다루기 난감한 단어는 드라마에서만 들어 봤던 것이었다. 그래서 농담 삼아 건넨 말이었다. 또 차영의 상상력이 실제로 딱 거기까지이기도 했다. 겁이 나서 더 뭔가를 생각하거나 고민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한편으로는 있었다.

“그런 거 안 해. 너만 괜찮다고 하면.”

“내 의사가 한 기장 결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 확실해?”

“확실해. 내가 너 계속 좋아해도 된다고 네가 허락만 해 주면 난 네 옆에 있고 싶어. 말했잖아. 난 차영이 네가 좋다고.”

당연히 그가 제 옆에 있는 걸 허락하겠다고 말해야 하고, 또 그러고 싶은 게 진심이었는데, 차영은 이상하게 아무것도 섣불리 결정해서 말해선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차영이 침묵하자 태주가 결심한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이 진짜인데…….”

차영은 경청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내가 계속 마음에 안 들면 언젠간 회사 사람이 널 찾아올지도 몰라. 아마 회장님 비서실장. 아마도.”

“회장님 비서실장?”

“너도 얼핏 본 적 있을 거야.”

“혹시 집 앞에 찾아왔던 사람이 그 사람이야? 안경 쓰고, 좀 차갑게 생긴?”

그가 끄덕였다.

“사실 미국에서 그거 때문에 좀 마찰이 있었어. 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계속 내 주변 반경이 통제됐거든. 휴대폰 전파도 전혀 안 터지고.”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이었나 싶었더니, 아무래도 그의 발언으로 추측건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들킨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뉴욕에서 문 회장에게 몇 날 며칠 붙들려 있었다고 설명하면 말이 된다. 주차장에 나타나 자신을 그렇게 몰아세웠던 일도,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내보인 그의 초조함 섞인 눈빛도, 이곳에서의 난폭함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됐다.

“와, 재벌들은 진짜 그렇게 사는구나. 자식 손자 행동반경 통제하면서. 아무튼 무슨 말인진 대충 알겠어. 보자마자 진작 이렇게 말을 해 주지. 한 기장도 힘들 텐데 괜히 화냈잖아.”

“…….”

“그런데 한 기장.”

“응, 차영아.”

“나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죽는 건 아니겠지?”

그가 너무 괴로워 보여 꺼낸 농담이었는데. 태주가 굳은 얼굴로 말이 없어 차영은 괜히 불안해졌다.

“웃자고 하는 말인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진짜로 무섭게. 우리 괜찮은 거야?”

“무섭겠지만 차영이 너만 날 믿어 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우리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비장한 거 아니야?”

“말했잖아, 난 진지하다고.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라서, 도리어 차영이 당황하게 됐다.

차영은 돌아보지 않고 창가에 비친 태주를 직시했다. 그는 설핏 웃고 있는데 왜 자신의 마음은 아픈지 모르겠다.

“누가 나 찾아오면 그땐 내가 어떻게 해야 돼? 매뉴얼이나 알려 줘. 이 사실 나한테 비밀리에 감추고 있던 동안 해결 방법 정도는 생각했겠지? 한태주 씨.”

차영의 몸을 얇은 시트 위로 쓸어내리던 태주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차영을 아주 진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이 말을 듣고도 이쯤에서 태주와의 관계를 끝낼 생각이 다행히 차영에게는 없어 보였다. 태주는 정말 안도한 기색이었다.

“일단 나한테 어떻게든 그 사실을 알려.”

“그러면 한 기장이 나 찾으러 오나?”

“당연하지.”

“그다음은?”

“차영이 네 마음 가는 대로.”

“주문이 너무 어려워.”

“정말 내키는 대로 전부 해도 돼. 외할아버지랑 난 별개라고 여기고 평생 살았어. 나 그 사람한테 바라는 것도, 구할 것도 없어. 아쉬운 게 없으니 저자세일 필요도 없지. 양자 같은 것도 안 될 거고, 재산도 안 물려받아.”

“그런데 왜 지금까지 맞춰 드려?”

“외할머니 때문에. 나한텐 어머니고, 또 아버지였거든. 그 정돈 해 드리고 싶었어.”

그리고 제 외할머니의 건강 상태로 미루어 아마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태주는 거기까지 말을 꺼내 차영의 불편함을 가중시켜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지? 구질구질한 신파 드라마는 별로 안 찍고 싶어. 물론 나 한 기장 엄청 좋아하는데, 아직은 내가 더 좋고, 중요해. 다치기 싫어.”

아직이란 말을 쓴 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없어서였다.

태주는 그런 제 말에 그렇다는 대답 대신 마른 온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영민한 차영은 이 행동으로도 그의 뉘앙스를 읽을 수 있었다.

“뭐든 해. 날 버리지만 마.”

두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복잡한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태주에게 감춰진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 듯했으나, 차영은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듣는 편이 나을 것이라 여겼다. 그도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게 퍽 어렵겠지만, 자신 역시 실은 여기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정리하는 데 매우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심란한 차영이 어리광을 부리듯 태주에게 더 깊숙이 기댔다. 그가 화답하듯 정수리에 입 맞추는 다정한 촉감을 느끼며 차분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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