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한참 뒤, 퇴근 시간에 맞춰 교대해 줄 직원에게 인수인계까지 마친 차영은 마치 습관이라도 든 양 다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잠잠했다. 이쯤 되면 섭섭하다고 말해도 될 듯했다. 사실 태주가 뉴욕에 도착했던 날 연락하지 않았을 때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었는데 그를 배려하는 좋은 연인인 척하기 위해 애써 제 마음을 다잡고 참고 있던 거였다.
그를 태웠을 한국 항공 092편은 승객들도 모두 하기하고 승무원들마저 전부 내렸을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경험은 감정의 선생이다. 차영은 순간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립고 익숙한 도시라고 해도 그렇지. 태주는 왜 미국만 가면 이렇게 연락 두절이 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곳의 열기구 축제를 가자던 그의 말을 다시 진지하게 심사숙고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전화 계속 안 한다 이거지……. 무슨 일인지 메시지라도 보내 주지. 내가 걱정하는 건 생각도 안 하나.’
오늘까지만 참으면 그를 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니 여태까지 억눌러 왔던 원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차영이 휴대폰을 꽉 쥔 채로 내려가고 있는데,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화들짝 놀란 그가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기대를 전면으로 배반하는 하이 톤 음성이 그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한…….”
- 야, 이차영.
“어? 도윤이야?”
- 내 번호 안 떠? 너 무슨 고구려시대 유물 휴대폰 쓰니?
“그게 아니라…… 어쩐 일이야?”
- 저번에 네가 한태주 일정 물어봤잖아. 그때 나랑 통화했던 선배 방금 공항에서 만났는데 한태주 기장 092편 조종간 안 잡았대. 돌아오는 길에 뉴욕 현지에 스탠바이 하고 있던 다른 기장이 운항했다는데? 그리고 난 지금 들은 건데 이륙할 때 한 캡 회장님한테 된통 깨졌대.
“회장님? 그 사람이 한 기장을 갑자기 왜? 뭐 실수한 거 있나?”
- 거기까진 모르겠어. 그러게 성격 좀 죽이고 살지. 잘린 거 아냐?
“스카우트해 온 게 회장이라고 했잖아.”
- 고용할 권한 있으면 해고할 권한도 있는 거지. 아무튼 혹시나 싶어서 알려 주려고 걸었어. 지난번에 통화할 때 네가 좀 걱정하는 것 같길래.
이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걱정이 더 커진 느낌이었다. 차영이 대답하지 않는 사이, 도윤도 제 비행 예정으로 바쁜 모양인지 끊자는 인사를 얼렁뚱땅하더니 통화를 뚝 종료했다.
휴대폰은 깜빡깜빡하다가 금세 까맣게 꺼져 버렸다. 그걸 무기력하게 보던 차영은 그대로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돌아오면 이렇게 이따금 연락이 안 되곤 하는 버릇을 고치도록 종용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던 게 수 분 전인데, 도윤의 전화를 받은 뒤로는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한편에서 급속도로 커졌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존심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제 마음인데도 이랬다저랬다 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원래 연애가 이렇게 복잡한 건지, 상대가 한태주이기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한참 땅만 보면서 걷던 차영이 겨우 제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 순간, 검은 정장 차림의 누군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조수석에 올라타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헉! 누구…….”
고개를 돌려보니 수상쩍은 남자의 정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태주? 어떻게 된…… 읍!”
그는 설명도, 해명도 없이 무턱대고 차영의 얼굴을 붙잡더니 입술 세례부터 퍼부어 댔다. 주린 배를 부여잡은 짐승같이 허겁지겁 달려들어서 차영의 뺨을 어루만지고, 목울대와 어깻죽지를 정신없이 쓸다가 다시 얼굴을 매만졌다. 그가 그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보조를 맞춰 주고 있던 차영이 황급히 태주를 밀어냈다.
“무슨……. 하지 마. 여기 공항 주차장이야!”
몇 번을 뿌리쳐도 엉켜 오다가, 입술을 꽉 깨물자 그제야 떨어져 나가서 제 입가에 묻은 타액을 손등으로 스윽 닦는 것이었다. 제 쪽을 집요한 눈길로 빤히 바라보면서 하는 행동이었던 터라 이상하게 차영의 눈엔 야한 장면처럼 각색돼서 보였다.
그의 얼굴은 좀 피곤해 보이는 것 외엔 멀쩡했다. 다치거나 아팠던 건 아닌 듯했다. 연락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의미다.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차영은 어이가 없었다. 헛웃음을 토해 내면서 그를 관찰했다.
지금 제 눈앞의 그는 제복 차림이 아니었다. 다만 더운 날씨에도 제대로 갖춰 입은 차림새는 어디 격식 있는 자리에라도 다녀온 모양인지 근사하고 멀끔했다.
“한 캡 어디 결혼식이라도 다녀와?”
“내려.”
“한 기장, 내가 어디 다녀오는 거냐고 묻잖아.”
“뭐 해. 내리라니까.”
대화라는 건 내가 말을 했을 때 상대가 그에 해당하는 적당한 대응을 해야 가장 완벽한 구도로 이루어지는 법이었다. 그러나 태주는 차영의 질문은 간단히 묵살한 채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화가 난 차영이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 그가 조수석에서 내려 버렸다.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차영이 그대로 시동 건 차를 운행하려고 손을 뻗은 찰나였다.
출발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운전석의 문이 활짝 열렸다.
“내리란 말 안 들려?”
“너야말로 내 말이 안 들리는 것 같은데. 이런 상태라면 난 할 말 없어. 나 퇴근하던 길이야. 꺼져.”
순순히 제 말에 따를 기미가 안 보이자, 태주는 과감히 완력 쓰기를 강행했다. 그리고 차영은 이런 태주의 무자비한 태도를 보고 정말로 열이 치밀었다. 그래서 그를 걷어차려고 바깥으로 다리를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려!”
“내리길 바라면 무슨 일인지, 왜 이러는 건지 나한테 제대로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래야 내가 따라갈지 말지를 결정하지. 한 기장 지금 내가 그쪽 말 안 들으니까 억지로 꺼내려고 굴었어. 힘으로 제압해서 나 차에서 끌어 내리려고 했다고. 1주일 사이에 더위라도 먹고 미친 거야?”
“어디 가는지 말하면 따라올래?”
“들어 보고.”
“호텔 갈 거야.”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나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 엿 같아서 못 하겠어. 너랑 잘 거야.”
그 순간, 그들 사이에 아주 무겁고 축축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1주일 동안 연락도 한 통 안 되다가 갑자기 멀끔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호텔을 가자는데. 한 기장이라면 이 상황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 가서 뭐 하게? 둘이 마주앉아서 손잡고 쎄쎄쎄 할 거 아니잖아. 네가 나랑 자는 거면 나도 너랑 처음으로 하는 건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아야지.”
“시간이 없어서.”
“우리 시간 많아. 너만 제때 연락이 되면……!”
“네가 다 알게 되면 날 찰까 봐.”
이 말에 차영은 움찔하게 됐다. 종종 그는 이런 식으로 뜻 모를 말을 하곤 했다. 궁금함을 해소해 주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질 말지. 가슴이 답답했다.
“뭘 다 알게 되는데. 알게 되면 내가 널 왜 차는데. 한태주 너 지난번에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언정 네 마음만큼은 진짜라고 지금이랑 비슷한 말 했었지.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비밀스럽게 굴래. 내가 너 좋아하는 죄로 얼마나 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 돼. 언제까지 궁금한 거 참고 기다려야 되는 건데!”
자신이 선택한 그가 아주 용감하고, 당당하고, 뻔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동안의 생각에 수정을 할 필요가 있는 듯했다. 태주는 차영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침묵하기를 택했다. 비겁하게도 말이다. 차영은 그런 그를 노려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태주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알아 온 시간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푹 빠졌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을 만큼 좋아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흐렸다. 그래서 여태까지 속 시원히 물어보질 못하고 그를 존중한다는 핑계로 모른 척해 왔다.
그런데 이제 차영은 우선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가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자신은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못 했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이다. 그와 사귀고 있는 자신이 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의 직장 동료인 도윤의 도움을 빌려야만 한다는 게 너무 참담했다. 애써 초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괴롭고 힘들었다.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고통스러웠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태주를 좋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태주 씨, 그쪽 산업 스파이야? 아니면 국정원 같은 건가?”
“…….”
“혹시 뭐 심한 정신병 같은 거라도 있어? 엄청난 유전병 같은 거 숨기고 있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집안에 흉악 범죄 저지른 사람이라도 있어서 그래? 나 그런 건 상관없어! 하나도 안 무서워.”
내내 그는 대꾸가 없었다.
“잠깐, 너 혹시 유부남이야? 미국에 애 딸려 있고 그래? 그건 상관있어.”
“하…… 그럴 리가 있어?”
“그럼 내가 꺼려 할 만한 네 문제가 뭐야 대체! 나 같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거긴 해?”
버럭 소리치는 와중에 때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공항 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쪽의 두 사람이 다투는 것 같았는지 차 방향을 힐끗거리면서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애썼다.
직원들이 완전히 지나칠 때까지 애써 분을 삭이면서 기다리고 있던 차영이 이윽고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왜 1주일이나 연락 안 됐어? 미리 경고하는데 이건 거짓말하거나 방금 전처럼 입 닥치고 있으면 한 기장이랑 나 1차 전쟁이야. 참고로 나 반전 주의자 아니야. 뒤끝도 엄청 길어.”
“외할아버지랑 같이 있었어.”
“갑자기 뉴욕에서? 왜?”
“너무 길어. 여기선 설명 못 해. 그냥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어. 못 믿어도 할 수 없지만 거짓말은 아냐. 나 그런 건 안 해. 너도 알다시피.”
“하지만 감추고 말하지 않는 건 있다고 했잖아.”
“차영아.”
“하……. 내 이름이 무슨 만능열쇠인 줄 알아? 부르면 어쩔 건데.”
“차영아, 나 좀 봐.”
서로의 눈이 치열하게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제 이름은 만능열쇠 같은 게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잘난 얼굴은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태주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약해진 차영은 입술 위를 꽉 깨물었다.
결국 차량의 문을 닫고 완전히 그의 앞에 가까이 선 차영이 제 손을 내밀었다.
“내놔.”
“…….”
“내놔, 이 개자식아.”
가만히 차영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태주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마그넷을 꺼냈다. 뉴욕을 형상화한 것이었으나 지난번에 주었던 것과는 모양이 달랐다. 어쨌든 연락이 닿지 않는 동안 제 생각을 개미 눈물만큼일지언정 하고 있긴 했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집어 들던 차영이 그와 동시에 태주의 정강이를 ‘뻑’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힘껏 걷어찼다.
“윽…….”
“차 어디 있어. 어느 호텔인데. 한 기장 차로 갈 거 아냐?”
물끄러미 차영을 응시하던 태주는 굳은 얼굴로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